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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버릴 줄 알아야 하는 이유

착한왕 이상하 2009. 12. 24. 15:16

왕과 나! 이 관계는 오래 전에는 운명이 결정하는 것이었다. 왕이 될 가능성은 왕가의 자손으로 태어난 이에게만 열려 있었다. 그렇지 않은 이에게는 왕이 되고자 하는 꿈조차 금기시되었다. 이러한 시절은 지나갔다. 더 이상 모든 이의 위에 군림하는 왕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의 상징성’마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모든 이의 위에 군림하는 왕의 상징성은 여러 ‘작은 영역에서의 성공’으로 축소되었으며, 한 영역에서 크게 성공하고자 하는 이는 어떤 의미에서는 왕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다.

 

민주주의라는 것을 어렵게 정의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누구나 한 영역의 왕이 될 수 있음을 뜻한다. 위대한 과학자가 되라는 자식에 대한 부모의 권유는 과학계의 왕으로 군림하라는 것과 다르지 않고, 훌륭한 사업가가 되라는 권유는 사업계의 왕이 되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

 

오랜 옛날에는 ‘왕이 되는 것’과 ‘왕도(王度)’가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왕이 되는 것은 세상에 왕도(王道)를 펼치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었다. 이 때문에, 왕도가 왕을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 있었다. ‘왕’이 ‘어떤 영역에서의 성공’을 상징하게 된 지금에 와서는 성공이 왕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고, 여러 영역으로 흩어진 왕도는 빛을 바랬다.

 

이 땅은 하나의 왕도가 여러 영역으로 자연스럽게 분화되는 역사적 여정을 밟지 못했다. 각 영역에서 지켜져야 할 왕도는 도외시된 채 정상에 오르면 그만이다. 부모의 귀는 아이가 크게 될 것이라는 말에만 혹하고, 사람들은 성공의 비결을 찾아 이곳저곳 헤맨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니, 왕도를 논하는 이는 점점 더 고독해질 수밖에 없다.

 

왕도를 논하지 않는 것이 어찌 보면 편하게 사는 법 같아 보인다. 하지만 왕도를 도외시하고 사는 이가 세상에 큰 덕(德)을 밝힐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그러한 이는 스스로 삶의 주인도 될 수 없다. 그가 하는 짓은 고작 성공을 위해 남에게 휘둘리거나, 남을 현혹하는 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금 이 땅은 왕이 되는 것 자체가 성공의 이름으로 목적이 되어버린 곳이다. 이러한 곳에서 사람은 세 부류로 나뉜다.

 

• 첫 번째 부류는 무조건 한 영역의 왕이 되려는 사람들이다.

• 두 번째 부류는 한 영역에 합당한 왕도를 구하면서 왕이 되고 싶어 하지만 뜻을 펼치기 힘든 사람들이다.

• 세 번째 부류는 한 영역의 왕이 되는 것 자체에 무관심한 사람들이다.

 

첫 번째 부류에 속하는 사람은 자신이 장악해 보려는 영역의 왕도가 무엇인지를 따지지 않는다. 그가 비록 왕이 되었다한들, 그가 펼칠 왕도라는 것은 없다. 그가 만약 어떤 왕도를 내세운다면, 그의 말을 믿지 말아야 한다. 그가 내세우는 왕도란 알고 보면 세력 유지 및 확장을 위한 허울 좋은 수단이거나, 자신이 믿는 종교의 교리에 불과하다.

 

한 영역의 왕도란 그 영역에서 지켜져야 할 미덕과 같다. 미덕이란 천명(天命)을 받은 인물의 작품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라는 여과기를 통해 걸러지고 축적되어 사람들의 행위를 바로 잡아주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하나의 왕도가 여러 영역으로 자연스럽게 분화되는 역사적 여정을 제대로 밟지 못한 땅에 속해 있다. 따라서 왕도를 펼치면서 한 영역의 왕이 되고자 하는 사람, 즉 두 번째 부류에 속하는 사람이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그 자신도 그 영역의 왕도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부류에 속하는 사람에게 왕이 되는 것은 그저 왕도를 얻기 위한 수단이어야 한다. 그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왕이 되겠다는 열망과 의지가 아니다. 그에게 요구되는 것은 ‘사려 깊은 분별력’이다. 그러한 분별력은 어떤 이념으로 세상을 덮어씌워 보려는 노력으로는 결코 체득되지 않는다. 사려 깊은 분별력은 현실적 문제가 발생한 상황에 민감할 때 비로소 기능하게 되기 때문이다.

 

왕도를 실현하면서 왕이 되고자 하는 이가 사려 깊은 분별력을 갖춰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변통(變通)의 열망, 즉 현실을 왕도에 맞게 변화시켜보려는 열망을 갖고 있다. 그는 변통을 달성하기에 시의적절한 때를 알아채려고 노력해야 하는 까닭에 사려 깊은 분별력을 갖춰야 한다.

 

변통의 열망은 어느 한 영역에 적합한 왕도를 미리 알고 그 왕도를 실현하려는 의지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변통의 열망은 왕도를 무시하고 왕이 된 자들, 곧 왕이 되는 것 자체가 목적인 이들이 행한 짓거리에 대한 피 묻은 증오심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한 영역의 왕도를 구하고자 하는 이가 왕이 된다면, 이것만큼 인간사에 득이 되는 것도 없다. 하지만 한 영역의 왕도를 구하기 위해 왕이 되고자 하는 이가 왕이 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세상은 본래 사람을 가리지 않는 까닭에, 왕이 되는 것 자체가 목적인 이가 왕이 될 수도 있다. 스스로 알지도 못하는 왕도를 미끼로 내세워 한 영역의 왕이 된 사람이 더 많다. 왕이 되는 것 자체가 왕도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성공의 목적이 되어버린 곳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에, 두 번째 부류에 속한 이가 뜻을 쉽게 펼치기는 힘든 것이다.

 

왕도를 찾기 위해 왕이 되고자 하는 이가 사려 깊은 분별력을 갖춰야 하는 이유는 그의 삶과도 관련된다. 그 자신이 변통의 열망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아닌지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자신이 변통의 열망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상황에 처해 있다면, 왕이 되기 위한 행보를 재촉하라. 그러한 상황에 처해 있지 않다면, 세상을 버려라. 그래야 그는 적들에 대한 증오심으로 인한 화기(火氣)를 다스려 스스로를 온전히 보존하면서도 뜻을 펼칠 적절한 시기를 준비할 수 있다. 설령 그에게 기회가 오지 않을지라도, 그는 자신의 영역에서 왕도를 찾아 실현해 보겠다는 뜻 대신에 세상을 버림으로써 편히 살 수 있다. 또 자신의 영역에서 왕이 되지는 못하더라도 왕도에 거슬린 짓은 하지 않게 된다.

 

만약 두 번째 부류에 속한 이가 자신의 뜻을 버리고 첫 번째 부류의 사람으로 변신하게 되는 경우, 그는 성공하여도 죽을 때 행복할 수 없다. 그러한 변신의 삶은 그가 원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 두 번째 부류에 속한 사람에게 공부는 세상을 취하기보다는 뜻을 지키는 것에 목적을 두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는 실패로 인해 자신을 온전히 보존할 수 없게 된다. 세상이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내가 취할 것이 없는 세상이라 판단된다면, 세상을 버림으로써 뜻을 지켜라. 여기에 수양(修養)의 진정한 의미가 있다.

 

누군가 한 영역의 왕이 되는 것에 무관심한 사람이라면, 즉 세 번째 부류에 속하는 사람이라면, 두 번째 부류에 속하는 이에게 필요한 정도의 분별력을 갖출 필요는 없다. 그러나 왕이 되는 것에 무관심한 사람 역시 한 순간이나마 진정으로 세상을 버릴 줄 알아야 한다. 무조건 한 영역의 왕이 되려고 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무조건 한 영역의 왕이 되려고 하는 이에게 사람들은 세력 확장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에게는 왕이 되는 것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만약 왕이 되는 것에 무관심한 사람의 귀가 얇아 첫 번째 부류에 속한 이의 달콤한 선동에 휩쓸리게 된다면, 각 영역의 왕도가 실현되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게다가 그 스스로가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은 허상에 불과해진다.

 

세 번째 부류에 속하는 사람이 무조건 왕이 되려는 이의 선동에 맞서 스스로를 보존하려면, 한 순간이나마 진정으로 세상을 버릴 줄 알아야 한다. 한 순간이나마 세상에 무관심해짐으로써, 왕이 되기 위해 몸부림치는 이의 선동 문구에 휩싸이지 않게 된다. 그러한 선동 문구가 왕도로 둔갑하여 자신의 삶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는 날에는, ‘자신의 삶’이라는 것도 의미를 잃게 된다. 왕이 되는 것에 무관심한 사람도 자신의 삶에 대해서만큼은 왕이 되어야. 그 삶이 편하다.

 

세 부류의 사람들이 타고나는 것은 아니다. 분명한 것은 첫 번째 부류의 사람이 되라고 자극하는 글들이 주변에 널려 있다는 것이다. 소통하는 사회를 위해서, 타인을 배려하는 사회를 위해서, 혹은 누구나 행복한 국가를 위해서라는 거창한 문구가 붙지만, 그 이면에는 성공에 대한 맹목적인 열망을 자극하는 것 외에는 없는 경우가 많다. 이에 맞서 사람들의 증오심을 이용하거나, 아니면 피곤한 삶에 지친 사람들을 세상의 아름다움을 과장하여 유혹하는 글들이 많다. 하지만 원래 이 세상은 인간이 있어야 할 필요조차 없는 곳이다.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을 자극하는 글은 시장에서 춤을 추며 날아다니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을 위한 글의 춤은 아예 보일 기색조차 없다. 나의 모든 잡글들은 두 번째와 세 번째 부류에 남거나, 속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