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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 제공소 (18금)

착한왕 이상하 2010. 3. 22. 01:43

아나키스트 행성을 찾아서

 

 

어떤 관계를 형성하는 동물이 있는 한, 공동체는 존재한다. 그러나 공동체는 ‘국가라는 괴물’을 중심축으로 영원히 회전해야만 하는 운명을 지닌 것일까? 국가라는 괴물이 없다면, 공동체는 붕괴하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해 자동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자가 자유를 얘기한다면, 그의 말은 모두 거짓말이다. 이 물음에 대해 부정할 수 있는 자만이 국가라는 괴물에 맞서 자유를 염원할 수 있다. 자유를 염원하는 사람들이 줄어들수록 국가라는 괴물은 커지기만 할 것이다.

 

 

 

* 정자 제공소 *

 

‘나치오’의 하늘에는 여느 때와 달리 ‘신의 독수리’라 불리는 비행 물체가 자주 나타났다.

 

“반국가주의자들의 소굴이 발견된 모양이다.”

 

신의 독수리를 본 나치오 행성 사람들은 누구나 이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은 ‘반국가주의가’ 무엇인지 모른다.

 

K는 친구와 약속한 장소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정자 제공소 618’라는 표지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정자 제공소에 들어서자, 귀에 익은 소리가 들려 왔다.

 

“여러분의 정자는 소중히 사용될 것입니다. 우리의 수가 늘고, 우리의 군대가 막강해질 때 우리는 신들과 함께 ‘악마의 행성’을 파괴시킬 수 있습니다. 국가의 적인 ‘악마의 행성’을 없애는 과업을 완수하는 날까지 여러분의 정자가 필요합니다.”

 

왠지 상투적인 목소리가 K의 기분을 거슬렸다. 국가정보원 소속인 K가 가져서는 안 되는 기분이었다.

 

“이제 왔군. 오늘로 쿠폰 10 개가 다시 확보된다네.”

   

그는 그의 올챙이들을 제공하는 즉시 여성부의 게시판에 원하는 여성들의 이름을 입력할 것이다. 여성부의 산하 기관인 ‘쾌락평등위원회’는 기계적으로 해당 남성과 여성들의 만남을 주선해 줄 것이다.

 

나치온 행성의 여성들은 30 세까지 난자를 기증해야 하는 의무를 갖고 있다. 여성들은 그 대가로 원하는 파트너를 고를 수 있는 선택권을 갖는다. 오로지 ‘신의 자식들’만 국가 정부 기관의 관리를 받지 않는다. 신의 자식들, 그들은 곧 정부요, 국가 권력이다.

 

 

“쿠폰 10 개가 확보되면, 누구에게 데이트를 신청할래?”

 

“에밀레에게는 데이트 신청을 하지 않을 것이니, 걱정하지 말게.”

 

“해도 돼. 그건 너의 선택권이니까.”

 

“에밀레에게 데이트 신청을 해도 퇴짜를 맞을 것이 뻔한데, 내가 그렇게 하겠어.”

 

한 남자가 한 여자에게 집착하는 것, 또한 한 여자가 한 남자에게 집착하는 것은 불법은 아니지만 금기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K는 한 여자에게 집착하고 있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에밀레도 K에게 집착하고 있을까? 오늘 다른 남자와 놀다가, 내일 K와의 저녁 식사에서 어제의 쾌락을 얘기하는 것은 나치오의 사회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프리섹스(free sex)’, 이것은 국가주의자와 반국가주자 양쪽 모두가 취할 수 있는 정치적 전략이다. 프리섹스가 국가 권력 유지를 위한 국가주의자들의 전략이 되는 경우도 있고, 아닌 경우도 있다. 프리섹스가 금기시된 경우에 프리섹스는 반국가주의자들에게 국가 권력에 대한 반항의 의미를 지닐 수 있다.

 

국가주의자들이 프리섹스를 장려하거나 금기시하는 모든 경우에 나타나는 공통점이 있다. 국가주의자들은 권력 유지라는 목적 달성에 프리섹스가 얼마나 효과적인 수단인지에 대해 고민한다. 그들이 프리섹스가 권력 유지에 효과적이라고 판단하는 순간, 프리섹스는 온갖 제도의 치장 속에 장려된다. 그들이 프리섹스가 권력 유지에 방해물이라고 판단하는 순간, 프리섹스는 금기시 된다.

 

“K, 바깥세상을 동경하며 부고환에 대기 중인 애들을 이번 기회에 빼주는 것이 어때?”

 

“P, 지난주에 쿠폰 10장을 쓴 것으로 아는데, 벌써 10 장 째야?”

 

K의 원래 이름은 Kαβγ...θ878이다. K가 태어난 곳은 ‘신생아 공장 Kαβγ...θ878이다. K는 그곳에서 인공수정으로 만들어진 878 번째 신생아였다. 신생아 공장에서 만들어진 여성들은 그나마 출신 공장과 무관한 이름은 갖고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성씨는 없다. 오로지 신의 자식들만 온전한 이름을 갖고 있다.

 

신생아 공장 출신의 남자들이 서로 만나면, 출신 공장의 표지인 ‘A’, ‘B’, ‘C’로 상대방을 부른다. 혹은 ‘Aα’, ‘Bθ’로 상대방을 부른다. 이 때문에, 동일한 신생아 공장에서 태어난 남자들은 서로 친구가 되기 힘들다. 또한 국가의 각 작업장은 동일한 신생아 공장에서 만들어진 사람들의 수가 최소화되도록 구성되어 있다.

 

오로지 신의 자식들만 유대감을 공유할 수 있다. 오로지 신의 자식들만 가족과 고향을 갖고 있다. 아니 그들만 가족과 고향을 가질 권리를 갖는다. 신의 자식들이 아닌 자, 그에게 가족과 고향은 사치이다.

 

“37 번 대기자, 초록색 문의 방으로 오세요.”

 

갑자기 사이렌 소리가 났다. 사이렌 소리에 놀란 K와 P는 바깥으로 나갔다. 빌딩에 장착된 대형 스크린 화면에 국가정보원 국장의 얼굴이 떴다.

 

“여러분, 어제 새벽 극악무도한 반국가주의자들, 일명 ‘아나키스트’로 자청하는 자들을 체포했습니다. 정부는 이들에게 기회를 주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들은 ‘사랑의 섬’으로 옮겨져 회개의 기회를 맞이할 것입니다. 회개한 자만이 다시 국가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나치오 행성은 세 개의 대륙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장 큰 대륙에만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오로지 하나의 국가만 존재한다. 오로지 하나의 국가만 존재하는 까닭에, 행성의 이름과 구별되는 국가의 이름은 필요 없다. 오로지 하나의 국가만 존재하는 까닭에, 정부도 하나였다.

 

사랑의 섬은 국가에서 멀리 떨어진 대륙에 붙어 있는 외딴 섬이었다. 사랑의 섬은 강간범, 살인자 등 극악무도한 범죄자들을 격리시켜 놓은 장소였다. 30여 년 전 정부는 반국가주의자들도 사랑의 섬에 이주시키기 시작했다. 반국가주의자들에게 다시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 정부의 표면적인 목적이었다. 그러나 사랑의 섬에서 귀환한 반국가주의자들은 극소수였다. 그곳에서 반국가주의자들은 정부의 하청을 받은 범죄자들의 사냥감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국가정보원 국장의 발표가 있은 후, 제 1 통치자의 얼굴이 거대한 화면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는 한 여성이 나타났다.

 

“여러분, 저는 한때 반국가주의자였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국가는 회개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사랑의 섬에서 저는 ... ”

 

연설문을 읽듯 장황한 고백을 마친 여성은 이번에 잡힌 반국가주의자들의 얼굴과 함께 명단을 발표했다. K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불행히도 그 예감은 맞아 떨어졌다. 명단에는 에밀레가 속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