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화와 민주주의 (봉인 해제) 86

세속화와 근대화 7. 근대화 과정의 재평가

이제 근대화 과정을 재평가하기 위해, 그 과정의 ‘산업화’, ‘계층 분화에 따른 권력 이동’, ‘인종주의의 쇠퇴’라는 세 성향이 이 땅에 나타난 방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A1) 식민지 팽창을 주도한 서양 국가들과 달리, 이 땅의 산업화는 자생적으로 출발하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 시절을 이 땅의 근대화의 출발점으로 삼을 때, 일제 강점기와 경제 성장기의 관계는 ‘필연적이거나 상부 주도적 의미’가 아니라 ‘잠정적이고 민중적 의미’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A2) 서양의 경우와 달리, 이 땅의 산업화는 기술 진보와 평등 사이의 근대적 긴장감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기능하지 않았다. 오히려 경제 성장을 가속화시킨 해방 이후의 산업화 과정에서 그러한 긴장감과 유사한 현상이 나타났다. 그것은 부와 정치적..

세속화와 근대화 6. 인종주의의 쇠퇴

지동설은 신성의 영역으로 간주되었던 천체에 지구를 속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지동설의 출현으로 자연에서 인간의 지위도 재해석되어야만 했다. 그러한 재해석 문제를 놓고 ‘진보론’, ‘회의론’, ‘종말론’이 나타났다. 제 4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진보론’은 ‘인간 중심 사상’, ‘확실성 추구의 시대정신’, ‘자율적 인간상’이라는 특징들을 갖는 ‘인간의 천사화 계획’을 태동시킨 모태와 같다. ‘인간의 천사화 계획’의 연장선에 서 있는 계몽주의는 이성과 신앙을 분리하는 관점 속에서 회의론을 극복하고 종말론과 공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계몽주의를 둘러싼 여러 상반된 입장들이 ‘우리 유럽’이라는 이념 아래 공존할 수 있도록 해준 실질적 기반은 ‘백색 도덕 제국주의’였다. 백색 도덕 제국주의를 구성하는 세 특징은 ‘인..

세속화와 근대화 5. 계층 분화에 따른 권력 이동

서양의 오랜 세속화 과정에 대응하는 것이 이 땅에도 있었다는 가정 아래 가상의 역사를 논했다. 그 곳에서 기득권층을 형식적 기득권층과 실질적 기득권층으로 나누었다. 계층 분화에 따른 권력 이동 방식을 근대화와 맞물려 평가할 때, ‘여기’와 ‘저기’에 공통적으로 나타난 현상은 ‘절대적 의미의 기득권층의 소멸’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절대적 의미의 기득권층’이란 ‘실질적 기득권층이 동시에 형식적 기득권층으로 보장받는 집단’을 뜻한다. 실질적 기득권층과 형식적 기득권층의 규정 방식을 고려할 때, 절대적 의미의 기득권층이 소멸되기 위해서는 형식적 기득권층이 먼저 붕괴되어야 한다. 하지만 절대적 의미의 기득권층의 소멸이 실질적 기득권층의 소멸까지 전제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 분명히 하는 것은 계층 간 갈등이 ..

세속화와 근대화 4. 고전적 사회학 전통의 역사 읽기 방식 비판

이제 계층 분화에 따른 권력 이동이라는 근대화의 성향을 살펴볼 차례다. 그 전에 ‘고전적 사회학 전통의 역사 읽기 방식’이 갖는 문제점들을 먼저 지적하자. 이것이 이후의 논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군주가 지배했던 과거 사회와 현대 사회의 차이점을 묻는다면, 일정 수준 이상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 다수는 라인하르트 벤딕스(R. Bendix)의 책 제목이 암시하듯 다음에 동의할 것이다. • 친족, 혈연, 신분 중심의 소수 지배층이 지배했던 과거 사회가 민중의 정치적 참여를 허락하는 방식의 시민 사회로 변화했다. 일정 수준 이상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위에 동의할 때, 그들 다수는 ‘근대화’를 마치 과거와 현대를 이어주는 필연적 과정처럼 여기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여기는 경우, 현대적인 것을 ..

세속화와 근대화 3. 산업화

현대 사회의 상태는 일반적으로 ‘국민 국가(nation-state)’의 성격을 띤다. 특정 지역 사람들에게 영토를 보장하기 위해 통일성을 갖춘 법과 정부를 바탕으로 한 국가는 필요하다. 그러한 국가의 구성원들은 하나의 민족을 형성하지 않더라도 ‘국민’의 자격을 가지며, 국민들로 구성된 국가는 독립적인 주권을 갖는다. 이러한 국민 국가의 경계가 해당 사회의 내적 특징들에 의해 얼마나 충분히 결정될 수 있는지는 여전히 논쟁 중에 있다. 세계화의 평가 방식과 맞물린 그러한 논쟁은 이 작업의 주 관심사가 될 수 없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여전히 우리가 ‘사회와 국민 국가를 혼용하여 사용하는 현실’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근대화의 세 가지 성향들은 국민 국가 형성 과정을 근대화로 규정하는 방식에서..

세속화와 근대화 2

현대적인 것을 대표하는 특징들을 논할 때 세속화 과정은 빼먹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점은 어디에나 해당하는 것이지만, 이 땅은 서양의 오랜 세속화 과정에 직접 대응시킬 수 있는 과정 없이도 세속화된 곳이다. 물론 지적으로 성숙한 무종교인을 ‘그 어떤 이념에도 종속되기를 거부하는 사람’으로 규정하는 경우, 그러한 무종교인이 다수를 차지하는 사회는 아직 없다. 이 땅도 이에 대한 예외가 될 수 없다. 이 때문에, ‘이 땅은 어느 정도 세속화된 곳일까?’라는 물음이 여전히 의미를 갖게 된다. 이러한 물음에 답하는 것은 일단 뒤로 미루자. 여기서는 서양의 오랜 세속화 과정에 근거해 이 땅의 현실을 진단하는 것은 명백한 한계를 갖는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는 것만으로 족하다. 서양의 오랜 세속화 과정과 같은 것을 거..

세속화와 근대화 1

현대적인 것을 규정하는 방식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자유 확대’, ‘이성의 강조’, ‘가치 체계의 다원화’, ‘세계화’ 등이 현대적인 것을 대표하는 특징들로 자주 거론된다. 그러한 특징들이 상황과 무관한 보편성을 지향하는 이론적 논쟁 속에 종속될 때, 그것들은 현재를 과거와의 단절로 규정하는 논리를 정당화하거나, 아니면 기독교적 가치관과 같은 전통을 적절히 수정한 것에 불과하다는 논리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기 쉽다. 그러한 정당화 시도 자체가 역사적 증거를 결여한 것임을 논하는 데 이 작업의 상당 부분을 할애했고, 현대적인 것을 대표하는 특징들의 실제적 양상에 주목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그 실제적 양상들로 ‘개인의 선택을 존중하는 것 혹은 누구나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것’..

가상의 정치적 실험 6

한 지역에서 발생한 심각한 문제는 대부분 다른 지역들과 연관성을 맺고 있다. 또한 경제, 교육, 문화, 정치 등 여러 영역들에 걸쳐 있다. 그러한 문제를 ‘비국지적 문제(non-local problem)’라고 하자. 비국지적 문제의 해결 과정은 전문 지식의 거래 관계에 근거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한 경우에 대처하는 관리 및 행정 체제 역시 정치적 세력화 가능한 실질적 기득권층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이를 미연에 방지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것이 우리가 함께 고민해 보아야 할 두 번째 물음이다. 이 물음에 대해 간략히 답하기 위해서는 비국지적 문제의 성격을 좀 더 구체화해 볼 필요가 있다. 문제를 그 발생적 측면에서 접근한다면, 어느 문제든 그것이 발생한 지역과 그것이 속한 사회 영역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

가상의 정치적 실험 5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 실현된 이후의 향촌은 농업 기반의 생산 공동체의 모습을 띨 수 없다. 직업의 다양화에 따른 사회의 계층 분화로 인해, 향촌의 규모가 어느 정도일지마저 추정하기 힘들다. 향촌의 규모 문제는 논외로 하자. 왜냐하면 이 장은 이 땅의 다수이면서도 의견의 표출 통로가 가로 막힌 무종교인 계층의 딜레마가 민주주의를 논할 때 중요한 이유를 규명하기 위해 거쳐 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조합들이 구성되는 방식에만 국한해 가상의 역사 속의 향촌의 특성들에 대해 생각해 볼 것이다. 향촌의 기능 단위인 조합들이 구성되는 방식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첫 번째 방식은 각 개인이 속한 직업이나 직종별로 조합을 구성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대부분 나라들의 노동조합에서 이..

가상의 정치적 실험 4

‘향촌 기반의 조합 공동체제’는 조선 후기 야담집에서 엿볼 수 있는 이상 세계에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다. 소규모의 공동 생산 체제를 기반으로 한 계급 없는 상태의 사회가 그러한 이상 세계에 비추어 이상적인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향촌 기반의 조합 공동체제’는 공산주의와 반국가주의의 영향을 받은 ‘조합 공동체주의(syndicalism)’의 기능 단위가 ‘향촌’이 되는 정치 체제를 뜻한다. 물론 이때 ‘향촌’은 유교의 변통 가능성이 실현되는 가상의 역사 속에서 형성된 공동체를 뜻한다. 따라서 향촌이 그러한 가상의 역사 속에서 변화하는 모습을 추측해 보아야 한다. 그렇게 변화하는 모습의 향촌은 조선 후기 야담집에 담긴 이상 세계의 공동체와는 다를 것이다. 이를 살펴보기 전에, 조합 공동체주의를 먼저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