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음 주제의 글을 작성하는 데 많은 시간을 투자할 마음이 없다. 글을 가급적 간략히 하기 위해 긴 논의가 필요한 부분은 괄호 속에 정보를 암시하는 방식을 택한다. 그런 방식을 택하지 않으면, 글이 너무나 길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이 땅의 과학과 기술이 발달해 공동체에 득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실현 불가능한 희망일 수 있지만 말이다. 2007년 그 잘난 대한민국 철학계에서 자발적으로 나온 이후 ‘철학 박사’라는 타이틀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글에 그 타이틀을 명시하는 이유가 있다. ‘과학이 진행하는 방식에 대한 비판적 평가’는 과학자들만의 몫은 아님을 명시하기 위해서이다. 근대 과학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던 프란시스 베이컨은 과학자가 아니었다. ‘과학에 대한 철학의 우위성’ 혹은 ‘인문학적 성찰 없는 과학의 위험성’과 같은 것에 전혀 동정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니다. 다만 과학자들도 자신들의 분과 역사에 무지할 때, 그리고 자신들의 작업에 비판적이지 않을 때, 그들 역시 ‘맹목적인 돼지’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어떤 정치적 이유에서 그런 돼지들이 과학 공동체를 대표하게 될 때, 이것이야말로 과학의 퇴보이며, 과학의 지식은 사회 공동체에 득이 될 수 없다.
이론의 두 가지 사용법
빅뱅 가설의 도그마화와 과학의 퇴보
이상하(철학 박사)
최근 중력파 관측 소식으로 대중매체가 시끄럽다. 물리학자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이번 중력파 관측으로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이 확증되었으며, 빅뱅 이후 우주 초기 상태를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말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번 중력파 관측의 결과가 아니라 관측 도구 및 방법론이 천체 물리학의 지평을 넓혀줄 수도 있다는 데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그 관측 과정에서 이론이 사용된 방식, 컴퓨터 시뮬레이션 기법 등을 고려한다면, 다음의 (1) 같이 단언할 수 없다.
(1) 이번 관측으로 지구에서 13억 광년 떨어진 두 블랙홀의 충돌이 발생시킨 시공간 구조의 잔영, 즉 중력파(gravitational wave)가 검출되었다.
(1)이 거부할 수 없는 참이라면, 영국 가디언 기사의 주장처럼 이번 관측은 동시에 두 개를 확인한 셈이다. 그 하나는 아인슈타인, 사실은 그 이전에 푸앵카레가 예측한 중력파를 확인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블랙홀의 존재를 확인한 것이다. (아인슈타인보다 먼저 ‘빛과 동일한 속도의 중력파 존재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이론화한 인물은 푸앵카레이다. 푸앵카레의 상대성 이론이 뒤늦게 주목받게 된 이유, 노벨 위원회가 특수 상대성 이론으로 아인슈타인에게 노벨상을 수상하려 했을 때 로렌츠의 반대 이유 등에 대해서는 다음 논문을 참조하라. C. Marchal, Henri Poincaré : A Decisive Contribution to Relativity. 2016년 K. Brown의 Reflections on Relativity(728쪽)도 볼만하다. 안 팔릴 것 미리 예상했는지 전체를 웹으로 볼 수 있게 해놓았다. http://mathpages.com/rr/rrtoc.htm 이 책의 문제점: 특수 상대성 이론과 시공간의 객관적 구조를 전제하는 일반 상대성이론의 개념적 구분이 약함, 공간은 물체들이 점유하는 방식에 의해 상대적으로 규정되는 장소에 불과하다는 관점을 다루지 않은 점, 그리고 그러한 관점과 일반 상대성 이론 사이의 갈등 관계 등.)
그러나 이론 물리학에 등장하는 복잡한 수식 없이도, (1)은 너무나 앞서 나간 주장임을 알 수 있다. 이번 관측에 대한 정확한 평가는 다음과 같아야 한다.
(2) 일반 상대성 이론이 옳다면, 이번 중력파 관측은 지구에서 13억 광년 떨어진 두 블랙홀 충돌로 인한 결과로 추정된다.
(1)과 (2)는 아주 다른 것이다. (1)은 일반 상대성이론뿐만 아니라 빅뱅 가설이 옳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번 관측에 참가한 과학자들에게 다음의 물음을 던진다면, 아무도 ‘yes’라고 답할 수 없다.
• 정말 빅뱅 가설이 증명된 것입니까?
빅뱅 가설이 중력파 관측으로 증명되려면, 무한소의 점과 같은 것으로 가정된 일명 ‘무한 밀도의 특이점(singularity)’ 존재가 증명되어야 한다. 그러한 수학적 특이점은 실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것이 실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경우, 무한 후퇴 논증(infinite regress argument)에 빠지게 된다. 왜 그런지는 각자 시도해 보라.) 최소한 초기 급팽창에 대한 증거로 거론 되는 우주 배경 복사 CMBR과 중력파를 연관시켜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연관시키는 경우, 중력파는 직접 관측될 수 없다. 단지 그 흔적만 추정해 볼 수 있다. 그 흔적을 찾으려는 시도는 재작년에 있었다. 그리고 실패로 끝났다. 반면에 이번 실험 목적은 CMBR과 연관된 중력파의 흔적을 찾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빛의 간섭 효과를 이용해 중력파 자체를 검출하는 것이다. 그러한 중력파는 빅뱅과 무관하게 ‘거대한 질량으로 인한 시공간 구조의 왜곡’에 의해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이 옳다면 그렇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번 관측으로 빅뱅 가설이 증명된 것은 아니다. (CMBR과 관련하여 빅뱅 초기의 중력파 흔적을 찾아보려 했던 시도와 이번 관측의 차이점, 그리고 이번 관측이 빅뱅 가설에 대한 증거가 될 수 없는 이유는 다음의 사이언티픽 아메리카 기사를 보라:
http://www.scientificamerican.com/article/not-all-gravitational-waves-are-created-equal/)
이번 관측으로 빅뱅 가설이 증명된 것이 아님에도, 이번 관측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물리학자들은 ‘빅뱅 초기의 우주의 모습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모순적인 말 속에서 미국 빅 사이언스(Big Sicience)에 의한 ‘빅뱅의 도그마화’를 엿볼 수 있다. 빅뱅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이야기는 왜 (1)이 아니고 (2)가 정당한가를 논한 다음 하자.
1.
물리학이 엄밀 과학을 대표하게 된 이유는 그것의 강한 예측력 때문이다. 그러한 물리학의 이론적 예측을 최소한으로 단순화시키면, 다음과 같은 ‘예측 도식’이다.
• 초기 조건의 실험적 구성 혹은 관측 --- (이론 개입) --> 결과 예측
전자(electron)의 질량이 이러이러하다는 이론 T가 있다고 해 보자. 전자는 눈으로 확인할 수 없다. 전자를 다른 질량의 원자와 충돌시켜 나타나는 현상을 통해 전자의 질량을 규명할 수는 있다. 그러한 충돌을 위한 초기 조건을 마련한다. 그리고 이론의 도움을 받아 충돌 때 나타나는 결과를 예측한다. 실험을 통해 얻어진 결과가 그 예측과 오차 범위 내에서 일치하는지를 따진다. 일치한다면, T를 받아들일 수 있다. 이미 뉴턴이 지적했듯이, 위 예측 도식을 만족하는 경우를 가지고 T가 확증되었다고 주장할 수 없다. 하지만 위 예측 도식을 만족하는 T를 함부로 부정할 수는 없다.
이번 중력파 관측은 위 예측 도식에 따른 것이 아니다. 그것이 위 예측 도식에 따랐다면,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실험되고 발표되었어야 한다.
• 두 블랙홀이 충돌하는 현상을 실제 관측하거나 그 현상과 유사한 초기 조건을 만들고, 특정 이론을 가지고 결과를 예측하고 실험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예측이 실험 결과와 일치한다면, 그나마 (1)처럼 주장할 수 있다.
그런데 이번 것은 위와 같은 실험이 아니다. 관측을 통해 파동의 교란 신호를 찾은 것이며, 일반 상대성 이론에 근거한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가지고 ‘두 블랙홀의 충돌 현상’을 그 원인으로 추정한 것이다. 다시 말해, 그러한 충돌로 시공간 구조의 요동이 일어났고, 그 요동의 잔영이 13억 광년을 진행해 검출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한 ‘추정 도식’은 다음과 같다.
• 관측 데이터(특정 이론이 참이기를 희망하는 것) --- (이론 개입) --> 원인 추정
예측 도식에서 결과는 ‘결과에 선행하는 원인’이 아니라, ‘원인에 의한 결과’이다. 초기 조건은 원인과 관련된다. 반면에 위 추정 도식에서 관측 데이터는 원인을 아직 정확히 모르는 상태에서 기대되는 결과에 가깝다. 위 추정 도식에서 특정 이론을 사용해 원인을 추정한 경우, 그 이론이 확증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예측 도식에 비해 추정 도식은 경쟁 가설 및 이론의 존재 가능성을 배제시키기 어렵기 때문이다. (제약, 병리학, 실험 생물학 종사자들은 이 점을 금방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우주론에서 추정 도식을 사용하는 경우, 이론 개입은 주로 컴퓨터 시뮬레이션에 의존한다. 이번 관측에는 일반 상대성 이론이 참이기를 바라는 기대가 숨어 있다. 아무튼 파동의 특이한 요동이라는 관측 데이터가 얻어졌다. 하지만 일반 상대성 이론의 방정식들만 가지고는 그 원인을 알아낼 수 없다. 이론의 적용 범위는 이론에 명시된 방정식들로만 규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한 방정식들이 성립하기 위한 조건들을 따져야 한다. 뉴턴 역학의 경우, 그러한 조건으로 ‘운동 중 질량 보존 조건’을 들 수 있다. 이번 관측에서는 ‘중력파의 전파는 매질뿐만 아니라 전자기파 등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조건을 들 수 있다. 좀 더 엄밀하게는 ‘중력에 의한 시공간 구조의 요동 혹은 왜곡은 운동과 무관하다’는 조건이다. 이러한 조건들에 여러 방정식들을 섞어 컴퓨터 시뮬레이션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시뮬레이션 결과로 ‘13억 광년 전 두 블랙홀의 충돌’이 원인으로 추정된 것이다. 이로부터 중력파는 시공간 구조의 왜곡에 의한 잔영이며, 모든 매질 및 전자기파, 우주 대부분을 차지하는 플라즈마 등과 무관하게 빛의 속도로 진행한다고 단언할 수 없다. 이런 식으로 단언한다면, 이번 관측은 특정 이론 및 조건들을 참으로 전제하고 그것들에 데이터를 짜 맞춘 ‘순환오류’를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관측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물리학자들은 ‘13억 광년 전 두 블랙홀의 충돌’을 참된 원인이라 못박고 (1)처럼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원래 생산 공정에서 허용 가능한 오류율을 뜻하는 ‘5 시그마’를 그 증거처럼 들이 된다. 물리학자들이 블랙홀을 생산했는가? 그들은 ‘13억 광년 전 두 블랙홀의 충돌’을 묘사한 영상 및 소리를 들려준다. 컴퓨터 화면 상의 그러한 영상 및 소리를 가지고 ‘13억 광년 전 두 블랙홀의 충돌’이 진짜 원인이라 주장할 수 있을까?
제약, 병리학, 생물학에서 추정 도식을 사용할 때, ‘5 시그마’라는 표현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추정 도식에서 원인을 추정할 때, 옹호하려는 이론은 경쟁 가설 및 이론을 배제시킬 수 없다는 점에 주목하라. (이 점은 추정 도식에서 이론 개입부분을 제거하면, 추정 도식이 가추(abduction) 도식과 대동소이하다는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가추 도식에서 관측 데이터와 같은 것은 ‘설명을 요구하는 단서’로 기능하기 때문에 여러 경쟁 가설들 생성에 기반이 되는 것이다. 가추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은 인터넷 검색을 해 보라.) 그래서 그들은 ‘통제 비교 실험’을 하는 것이다. 그럴듯한 경쟁 가설이 없는 경우, 귀무가설을 사용하는 것이다.
제약, 병리학, 생물학과 달리, 우주론은 통제 비교 실험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엄밀 과학에 속하는 분야가 아니다. ‘5 시그마’는 통제 실험을 할 수 없는 현 우주론의 상황에서 나온 임시방편적 대안일 뿐이다. 그것 자체가 경쟁 가설을 배제시킬 수 없다. 이쯤 되면, 이번 관측에 참여한 물리학자들은 ‘일반 상대성 이론은 신뢰성에서 충분한 것으로 밝혀진 이론이다’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런 주장은 그들만의 주장일 뿐이다.
일반 상대성 이론의 불충분성에 대한 논문은 앞으로도 계속 나올 것이며,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또 다른 우주론을 구상하는 인물들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일반 상대성 이론은 양자역학과 갈등 관계를 맺고 있다. (아마 일부 물리학자는 일반 상대성 이론이 거시 세계를, 양자역학이 미시세계를 다루기 때문에 서로 상보적 관계를 맺는다고 주장할 것이다. 두 물리학 이론의 모순을 다룬 논문과 책은 많으니 직접 찾아 보시라.) 더욱이 전자기학에 근거한 플라즈마 우주론과도 갈등 관계를 맺고 있다. 플라즈마 물리의 개척자로서 노벨상을 받은 한스 알벤은 ‘빅뱅뿐만 아니라 일반 상대성 이론도 서양의 창조론을 수학화한 허구’라고 주장하는 바람에 물리학계에서 사장된 인물이다. 그의 진의는 ‘아직 실험 영역에 들어오지 않은 우주론에서 빅뱅이 도그마화되는 데 경고장을 날리려고 한 것’이다. (한스 알벤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다음 자료를 읽고 찾아보라:
https://www.marxist.com/science-old/inmemory.html)
내가 예기하고 싶은 것은 간단하다.
• 추정 도식이 통제 비교 실험과 맞물릴 수 없는 우주론은 엄밀 과학으로 분류될 수 없다. 우주론의 여러 이론들, 빅뱅, 일반 상대성 이론, 플라즈마 우주론 등은 아직 그것의 진위여부를 결정지을 만큼 실험 영역에 포섭된 상태가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주론이 발달하려면 다양한 이론 형성 가능성에 대해서 열린 마음을 견지해야 한다.
이번 관측이 갖는 기술적 의의를 폄하하고 싶은 의도는 전혀 없다. 내가 과학 공동체에 원했던 것은 (1)이 아니라 (2)와 같은 발표이다. 그런데 (1)처럼 발표하고 모두 환영한다면, 이것은 빅뱅의 도그마화이며, 과학의 퇴보를 알리는 것이다. 갈릴레이가 되살아나 이 글을 본다면 (1)의 문제점을 지적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2.
빅뱅 가설이 일률적으로 발달해 이론화된 것은 아니다. 무척이나 많은 반례가 있었다. 현재 빅뱅 이론은 그러한 반례가 나올 때마다 약 30여 번의 수정을 거듭하여 살아남은 것이다. 그렇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도 우주론이 아직 통제 실험의 영역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30여 번의 수정을 거쳐 살아남은 가설이나 이론은 실험 과학들의 역사에서는 없다. (빅뱅 개념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하지 않다. 그 개념이 형성된 과정의 복잡성, 문제점, 논쟁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문이 도움을 준다. (H. Kragh, What’s in a Name: History and Meanings of the Term “Big Bang”
http://arxiv.org/ftp/arxiv/papers/1301/1301.0219.pdf)
빅뱅 개념을 자세히 다루지 않는다. 다만 다음만 간략히 언급한다.
• 빅뱅 가설의 개념적 뿌리는 우주 생성론(cosmogeny)이다. 우주 생성론은 쉽게 말해 ‘태초 혹은 창조를 전제한 세계 이해 방식’이다. 이 때문에, 우주 생성론은 문화사에서 인류 보편적인 것이 아니다. 힌두교, 불교, 유교의 우주론은 끊임없는 물질의 생성과 소멸을 허용하는 무한 우주론이기 때문에 우주 생성론과 거리가 멀다. 반면에 우주 생성론은 기독교, 마니교, 유대교, 바빌로니아 종교, 마야인들의 세계 이해 방식의 핵심이다.
• 우주 생성론은 태초에서 무한대로 혹은 종말에 이르는 ‘우주 전체의 전일적 역사’를 전제한다. 반면에 무한 우주론은 우주 부분들의 비동질적 역사들만 허용할 뿐, 그러한 전일적 역사를 전제하지 않는다. 우주 생성론에 뿌리를 둔 빅뱅 가설은 우주 전체의 전일적 역사를 전제한다. (종말을 전제하는 경우의 빅뱅 가설은 빅크런치, 즉 우리 우주의 종말을 허용한다. 펜로즈 등이 옹호하는 이러한 순환 우주론은 무한 우주론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 우주론은 버블과 같은 여러 하부 우주들의 생성 소멸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빅뱅의 유일성을 증명할 수 없는 한, 빅뱅을 가지고 무한 우주론을 부정할 수 없다. 우주 생성론의 구체적 규정 방식 등은 (출간된다면) 나의 <세속화 ‘저기’와 ‘여기’: 무종교인의 관점> ‘존재 사슬의 논리’편을 보라.)
• 빅뱅 가설의 우주론은 유한 우주론이다. 빅뱅과 무한을 연관시킬 때 그 무한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의 ‘잠재적 무한’이다. 팽창 가능성 때문에 무한을 논할 수 있을 뿐, 현시점의 우주는 유한한 닫힌 체계이다. 이때 팽창은 단순히 물체와 물체가 멀어짐을 뜻하지 않는다. ‘시공간의 구조라는 것의 등방적 팽창’이다. 이 때문에, 빅뱅의 모형으로 ‘풍선에 점들을 찍어 풍선을 부는 사례’를 드는 것이다.
•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이 빅뱅 가설을 무조건적으로 옹호해 주는 것은 아니다. 속칭 우주 상수를 어떻게 잡는가, 아니면 함수로 잡는가에 따라 유한 우주, 정지된 우주, 무한 우주 등 여러 모형이 나온다. 이를 보인 프리드만을 빅뱅 옹호자로 묘사하는 물리학자들은 자기 분과 역사에 무지한 인물들이다. 일반 상대성 이론이 빅뱅 가설과 근친 관계를 맺는 이유는 ‘팽창하는 시공간의 구조’를 모형화하는 데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을 빅뱅과 연관시킬 때, 우주의 시공간 구조라는 것이 전제된다. 시간과 공간이 서로 독립적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우주의 시공간 구조와 중력의 상호 작용이 배제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반 상대성 이론과 뉴턴 역학의 절대적 시공간 개념은 서로 다르다. 하지만 두 이론 모두에서 ‘시공간은 논리적으로 물질의 운동에 선행하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뉴턴 역학 자체에는 시공간 구조가 방정식 등에 의해 개입되어 있지 않다. 이 때문에, 뉴턴 역학 자체의 시공간 개념은 다의적으로 해석 가능하다. 실례로 동일 운동 법칙을 놓고 벌어진 클라크와 라이프니츠의 논쟁을 들 수 있다. 클라크가 뉴턴의 절대적 시공간 개념을 지지했다면, 라이프니츠는 부정했다. 뉴턴 역학과 마찬가지로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 역시 다양한 세계 이해 방식에 의해 해석될 여지를 갖고 있다. 일반 상대성 이론이 반드시 빅뱅 우주론적 관점에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은 완전한 착각이다.
위 정리를 보면, 빅뱅 가설이 기독교에 연민을 가진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가질 수 있음은 명백하다. 그 사람이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런 연민의 유무를 결정하는 것은 그의 주장이 아니라 사고방식이기 때문이다. 실례로 빅뱅 옹호자로서 기독교 교리를 주정하려는 호킹이 우주진화론 전통을지닌 가톨릭 신학자들의 비아냥감이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는 것이 좋다. (빅뱅 가설이 기독교 교리에 반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명지대를 중심으로 한 이 땅의 조잡한 창조과학 계열, 도킨스 등의 조잡한 논리에 사고가 매몰된 사람들이다. 지적 설계자 가설과 우주 생성론을 연관시키는 것은 고대 기독교부터 줄곧 이어져 온 것이다. 심지어 다윈 진화론를 과학화하는 데 기여한 인물들 다수는 우주 생성론을 옹호한 가톨릭 신자들이었다. 실례로 피셔, 도브잔스키 등을 들 수 있다.)
철학자들도 마찬가지다. 과감히 주장하건데, 서양 철학의 50%는 우주 생성론의 사고방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논증이 문화적 차이와 무관하게 인간의 조건에 대한 진리를 밝혀줄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라. 심지어 현대 분석 철학의 심신론, 개인의 동일성 문제, 인과론 등에도 우주 생성론은 깊숙이 침투해 있다. 이러한 점을 언급하는 이유는 이렇다. 세력이 강한 ‘저기’에서 빅뱅 도그마화가 진행될 때, ‘여기’에서 오히려 무비판적이면 더 쉽게 그런 도그마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상이 그렇다.
현 고등학교 통합 과학 교과서를 보면, 빅뱅으로 시작한다. 아마도 이러한 구성 방식은 전 세계에서 ‘여기’가 유일할 것이다. 교과서의 위력이라는 것은 딴 것이 아니다. 어느 정보가 교과서화되면, 사람들이 그 정보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빅뱅 가설이 정말 증명된 것인가? 아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우주론은 아직 엄밀한 통제 실험 영역에 들어와 있지 않은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빅뱅 가설이 진리처럼 소개되면, 과학은 그저 사변을 수학적 방정식으로 풀어내는 것이라고 세뇌되는 아이, 학생들이 늘어난다. 이러한 세태에서 사회 공동체에 실질적 득을 주는 실험 과학은 발달할 수 없다. 그러한 실험 과학은 대부분 실험실이라는 공간에서 이루어지며, 관측이나 탐사보다는 조작(operation)에 근거하고 있다. 우주론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우주론이 아직 엄밀 과학 영역에 들어오지 않은 상태에서는 다양한 이론 건설 가능성을 무시하지 마라는 것이다. 그러한 이론 건설 가능성을 빅뱅의 도그마화가 가로 막고 있다.
왜 미국을 중심으로 빅뱅 가설은 도그마화되었을까? 이 물음에 대해 답하는 것은 쉽지 않다. 분명한 것은 빅뱅이 달 탐사와 함께 미국의 성공적인 ‘빅 사이언스’를 대표한다는 것이다. 빅뱅은 일종의 미국의 얼굴이다. 빅뱅의 결정적 증거처럼 와전된 적색 편이 현상만 해도, 실제 그 편이 현상을 발견한 허블은 죽을 때까지 빅뱅 가설을 인정하지 않았다. 적색 편이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나 이론이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현상은 실제 물체가 멀어지는 도플러 효과에 의해서도, 컴프턴 효과에 의해서도, 그리고 시공간 구조의 등방적 퍙창, 즉 빅뱅에 의해서도 설명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로지 빅뱅 가설을 지지할 수 없다고 허블은 여겼기 때문이다. 이러한 허블의 실험 정신을 계승한 할톤 아프는 천체 관측을 바탕으로 빅뱅 가설에 반하는 입장을 펼쳤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망원경을 들여다 볼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아프는 미국의 빅뱅 도그마화로 일자리를 잃게 되었으며, 이후 독일 막스 플랑크 천체 관측소 소장으로 부임해 연구를 진행했다. 소위 ‘17세기 갈릴레이의 이단 심문’에 비유할만한 사건이 20세기에 터진 것이다. (2014년에 작고한 헐톤 아프는 천체물리 과학경시대회 준비반 학생들도 알 정도이니, 그에 대해서는 직접 찾아보라. 다음은 아프, 20세기 과학철학에 못마땅해 철학적 담론에 뛰어든 몇몇 과학자들의 강연 초록이다. 초록만 보는 것만으로도 빅뱅 가설을 단순히 확증된 이론처럼 취급하는 것이 부당함을 알 수 있다.
https://www.scientificexploration.org/sites/default/files/docs/program_6th_european.pdf)
3.
아인슈타인이 이런 말을 했다지. “신은 주사위 놀음을 하지 않는다.” 무종교인이자 무신론자인 나는 신에게 이런 질문을 해 보고 싶다. “신이시여, 이제 싹트기 시작한 이 땅의 과학은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빅뱅, 우주의 급팽창 가능성을 땜빵하기 위해 가정된 암흑 물질, 초끈, 이런 수학적 가설들이 대중을 지배하면, 과학은 발달할 수 없다. (과학에서 수학은 중요하다. 그러나 이런 가설들이 수학을 사용하는 방식은 전자기학의 맥스웰이 사용한 방식과 다르다. 어떻게 다른지는 한가할 때 글로 작성해 블로그에 올릴 것이다.) 아이들이, 학생들이 그러한 가설로부터 과학에 흥미를 얻게 된다면, 이 땅의 과학은 공동체에 실질적 득을 줄 정도로 발달할 수 없다. 나는 현재 ‘저기’의 빅뱅 가설의 도그마화가 ‘여기’에게는 아주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더 이상 쓰기 귀찮다. 그래서 날 잡아 이번 중력파 관측의 의미, 방법, 빅뱅의 도그마화, 빅 사이언스의 문제, 제대로 된 통합 과학 교과서의 구성 방식, 국외 기사 베껴서 자기 것처럼 과장하는 과학 기자들 문제, 과학의 발달을 촉진시키기 위한 정책의 선결 조건들, 과학 재단의 구성 방식 및 인적 자원의 문제 등을 토론해 보는 개인 세미나를 열 예정이다, 날짜가 정해지면, 공고할 것이다. 두 명 정도는 정해진 상태고, 오고 싶은 사람은 오시라. 물론 세미나 후 뒤풀이 상당 부분을 담당할 재력을 가진 분이 참여하면 반길 것이다. 오는 사람들 다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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