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 에세이/자연철학

18세기 무신론 논쟁

착한왕 이상하 2016. 6. 20. 17:35

 

 

* 다음 글은 <18세기 무신론 논쟁> 일부를 수정한 것이다. 이 글에서 다루지 않았지만, 적어도 세 가지를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18세기 유물론 논쟁에는 지역의 정치, 문화적 전통이 깊숙히 개입해 있다는 것이다. 유물론을 무조건 무신론과 일치시카는 서술방식은 역사적 무지를 보여줄 뿐이다. 둘째, 18세기 유물론은 일반적으로 결정론적이지만 17세기에 비해 매우 유연해졌다는 것이다. 셋째, 이러한 지적 풍토를 바탕으로 19세기 마르크스 엥겔스의 유물론도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유물론을 마르크스주의의 맥락에 귀속시키는 것은 넌센스에 가깝다. 소위 '변증법적 유물론'과 유사한 사고방식은 마르크스 이전에도 있었기 때문이다. 19세기 유물론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당시 생리학의 발달, 에너지 보존법칙의 출현 등도 알아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시간이 나면 글을 올릴 것이다.

 


18세기 무신론 논쟁 

    

프리스틀리(J. Priestley)18세기 공기 과학의 대부이자 영국 과학의 자존심이었다. 공기 과학은 공기 중 원소를 분리하여 그 성질을 밝히는 분과로서 근대 화학의 기초가 된다. 공기 중 원소를 분리하는 데 사용되는 근대 화학의 여러 실험 방법은 프리스틀리에게 빚지고 있다. 그는 프랑스 혁명이 정점에 오른 1790년에 명예 프랑스 시민권을 얻었다. 영국 군중은 그를 적대시하여 그의 회의실, 도서실과 실험실을 불태워 버렸다. 이 사건에 숨겨진 군중의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혁명의 분위기가 영국으로 전이될 것에 겁먹은 영국 국왕이 이 사건을 사주했을 것으로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 프리스틀리는 당시 영국의 정치 체제를 부정적으로 평가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영국의 국교 성공회(anglicanism)의 비판자였기 때문이다. 정교 분리의 협정서가 형식상으로 왕과 의회 사이에 맺어져 있었지만, 국교에 반하는 일체의 행위는 여전히 반사회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프리스틀리는 결국 타버린 실험실을 고국에 남긴 채 1794년 미국으로 건너가 펜실베이니아에 정착했다.

 

세속화 운동을 이끈 19세기 중엽 중산층은 프리스틀리를 자신들의 입장을 뒷받침해 주는 급진적 인물로 간주했다. 세속화 운동은 특정 종교의 지배력에서 벗어나려는 해방 운동을 뜻한다. 그 특정 종교는 무()에서 자연과 인간을 창조할 만큼 전능(全能)한 신(God)을 가정하고 있는 기독교였다. 프리스틀리는 무신론자였을까? 그의 비판 대상은 왕권 체제와 맞물린 영국 국교였지 기독교가 아니었다. 프리스틀리는 만인교, 곧 유니테리언교(unitarianiam)의 목사였다. 만인교도도 다른 기독교 분파와 마찬가지로 우주가 전지전능한 조물주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믿는다. 그렇지 않다면, 만인교가 기독교의 한 분파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만인교는 초월론(antinomianism), 천년왕국설(millenarianism)과 함께 삼위일체설을 부정하는 기독교의 대표적 교파이다. 만인교도는 예수를 신이 이 세상에 보낸 존재라는 것에 대해 의심하지 않지만, 예수를 신의 육화로 여기지는 않는다. 삼위일체설을 부정하는 경우, 신성(神聖)은 예수의 몸을 통해 직접적으로, 그리고 왕을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난다는 설이 위협을 받게 된다. 기적 속에 반영된 신성은 특정인이 아니라 만인을 위한 것이라는 관점이 만인교 교리의 핵심이다.

 

프리스틀리는 자신이 속한 교파가 영국 국교와 대등한 위치를 점하게 되기를 원했고, 정교 분리의 원칙을 옹호했다. 이러한 이유로 프리스틀리는 프랑스의 급진적 계몽주의(radical enlightenment)’를 대표하는 볼테르(Voltaire), 디드로(D. Diderot), 돌바크(B. d'Holbach) 등에게 우호적인 인물로 여겨졌다. 하지만 만인교도인 프리스틀리는 그들의 적이기도 했다. 특히 돌바크의 유물론을 계승한 영국 무신론 세력은 프리스틀리와 적대적 관계를 맺게 된다. 프리스틀리의 자연 철학만 알고 있는 사람은 그러한 적대적 관계를 납득하기 힘들 것이다. 그의 자연 철학이 유물론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기 때문이다. 프리스틀리의 입장은 무엇이었을까? 유물론은 기독교 교리와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자연 철학이라는 것이다. 이를 알아보기 위해 먼저 돌바크의 유물론을 간략히 살펴보자.

 

 

(1) 돌바크의 유물론

에피쿠로스(Epicurus)의 원자론(atomism)을 계승한 로마의 루크레티우스(Lucretius)는 무신론자 돌바크의 정신적 지주였다. 전통적인 원자론은 종교적 색채를 띠고 있었다. 원자론에 따르면, 이 세상은 물질의 단위인 원자들의 형태와 운동에 의한 우연적인 결과일 뿐이다. 감각 작용도 원자들의 형태와 운동에 기인하는 것인 만큼,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이 세상의 본질인 원자들을 인식함으로써 인간은 감각이 불러일으킨 일시적인 착각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돌바크는 원자론에서 이러한 종교적 색체를 탈색시켰다.

 

원자론에 따르면, 원자는 그 자체로 빈 공간(void)을 영원히 운동한다. 돌바크는 신 개념과 같은 초자연적인 것을 끌어들이지 않고 원자의 운동 보존을 설명할 수 있다고 여겼다. , ‘원자의 운동 보존은 뉴턴 역학의 관성(vis inertiae) 개념에 의해 과학적으로 뒷받침될 수 있다고 여겼다. 물론 이러한 돌바크의 생각은 뉴턴 역학을 적절히 수정하지 않고서는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었다.

 

뉴턴의 관성은 지금처럼 질량의 속성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것은 신이 태초에 물질에 부과한 힘으로 가정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뉴턴의 관성은 물질의 상태 유지와 관련된 것이었다. 이러한 까닭에, 뉴턴의 관성 개념은 물질의 상태 유지와 관련된 형이상학적 수동성(metaphysical passivity)’으로 규정되었다. ‘형이상학적 수동성으로 규정된 뉴턴의 관성 개념은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사장된다.

 

물질은 충돌 과정에서 관성을 잃어버리게 때문에, 우주는 언젠가 멈추게 된다고 뉴턴은 믿었다. 적절한 시기에 신이 개입하여 우주에 관성을 재충전해 주어야만 한다. 따라서 분할 불가능한 물질의 기본 단위가 있다는, 그리고 물질 이전에 빈 공간이 있다는 뉴턴의 생각은 원자론의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뉴턴 자신은 전통적인 원자론자는 아니었다. 뉴턴은 스스로 영원히 운동 중에 있는 물질 개념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돌바크는 뉴턴의 관성을 신의 개입이 필요한 우주의 상태 유지가 아니라, 마치 운동 중에 보존되는 활성 혹은 에너지처럼 가정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돌바크는 원자의 운동 보존과 신 개념과의 무관성을 증명할 수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렇게 여기는 것을 정당화하려 할 때, 발생하는 문제가 있다. 신과 같은 것에 호소하지 않고 운동의 합법칙성을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돌바크가 무신론을 옹호하기 위해 뉴턴을 수용한 방식이 불러일으키는 철학적 문제는 논외로 하자. 원자론이 돌바크에게 매혹적인 이유를 아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원자론에 따르면, 신의 섭리와 같은 목적이 자연에 개입할 필요가 없다. 돌바크는 이를 정당화하려 할 때 다음과 같은 난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첫째, 질서를 무시한 자연의 탐구는 불가능하다. 자연의 탐구는 규칙적인 현상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무신론은 자연의 질서를 신의 섭리나 창조의 목적과 연관시키는 것을 부정해야 한다. 이때 자연의 질서는 우연에서 기인한 것임을 밝혀야 한다는 난제가 남는다.

 

둘째, 모든 무신론자가 원자론자는 아니다. 특히 서양에서 신은 선()의 기원으로 가정되었다. 이 때문에, 신을 부정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도덕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쉽다. 따라서 무신론은 신과 무관하게 도덕 담론을 펼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원자론이 과연 그러한 토대가 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남는다.

 

첫 번째 난제를 둘러싼 돌바크의 고민거리는 이신론(deism)’과 관련되어 있다. 이신론의 신은 합법칙적 우주를 창조했지만 창조 이후 우주에 개입하지 않는다. 사후 구원 및 심판 개념마저도 정통 이신론에서는 부정된다. 이 때문에, 이신론은 기독교 전통에서는 이단으로 간주된다. 사후 구원 및 심판은 기독교 세계 이해 방식의 핵심 전제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의 창조 행위를 중심으로 기독교 역사를 폭넓게 다룰 때, 이신론을 그러한 역사에서 빼먹을 수 없다. 이 점에서 이신론 역시 우주를 창조한 전지전능한 조물주의 존재를 가정하는 기독교의 사상적 뿌리의 한 갈래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이신론 전통에서 신의 섭리는 맹목적인 신앙이 아니라 자연의 질서를 탐구함으로써 파악된다. 이러한 이신론도 다시 크게 두 분파로 나뉜다. 신의 섭리가 자연물의 형태와 기능 속에 반영되어 있다고 여긴 분파가 있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자연을 탐구하기 위한 이성적 능력이 인간 마음에 각인되어 있다고 여긴 분파가 있었다. 어느 분파를 따르든 간에, 무신론의 완벽한 정당화는 이신론으로 귀결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귀결된다면, 돌바크는 자연의 질서를 설명하는 데 무신론의 한계를 인정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의 원래 원자론에 따르면, 무게를 가진 모든 원자는 가라앉는 본성을 가진 것으로 가정되었다. 모든 원자는 등속 낙하 운동을 한다. 이때 그 운동 궤도에서 약간 벗어난 원자로 인해 원자들 사이에 충돌이 발생한다. 또 무거운 원자들의 충돌로 인해 가벼운 원자는 위로 올라가는 힘을 얻는 것으로 가정되었다. 따라서 에피쿠로스와 에피쿠로스를 추종한 루크레티우스의 원자론에 따르면, 이 세계는 무게의 본성에 따른 원자의 낙하 운동에 충돌이라는 우연적 사건이 개입되어 형성된 것이다. 이러한 결론만으로는 물체의 성질이나 감각 작용을 쉽게 설명할 수 없다. 이 때문에, 고대 원자론자들은 원자의 크기와 형태에 근거해 그러한 성질이나 작용을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원자들의 크기, 모양, 그리고 운동에 근거해 다양성을 함축한 자연의 질서를 설명하기는 힘들다.

 

원자론적 유물론이 이신론을 완전히 부정하기 힘들다는 것 외에도 모든 무신론자가 원자론자는 아니라는 사실도 돌바크에게는 고민거리였다. 특히 두 번째 난제, 즉 원자론이 도덕 담론에서 신 존재 가정을 제거시킬 수 있는가라는 난제를 극복하는 것은 돌바크에게 크나큰 도전이었다. 맹목적인 무신론자라기보다는 당시 교회 세력의 비판자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리는 볼테르는 루크레티우스의 원자론 자체도 일종의 종교로 간주했다. 볼테르는 전통적인 원자론에 깔려 있는 종교적 색채가 돌바크의 원자론에 남아 있다고 결론내렸다. 볼테르는 돌바크의 무신론을 기독교에 대항하기 위한 새로운 종교로 여겼던 것이다.

 

 

(2) 프리스틀리의 신학적 유물론

18세기 급진적 계몽주의를 대표하는 돌바크는 단순히 종교를 갖지 않은, 혹은 신앙심을 갖지 않은 인물들이 아니라 무신론을 철학적으로 정당화하려고 했던 인물이다. 돌바크는 §4의 첫 번째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경험적으로 발견되는 모든 규칙적 현상이 원자의 운동에서 기인한 결과일 뿐이라는 관점을 고수했다. §4의 두 번째 약점을 피해 나가기 위해 돌바크는 기독교 교리 속에 담긴 도덕률이 자신의 유물론에서도 이끌어낼 수 있다는 논증을 펼쳤다. 돌바크는 고대 신화들을 자연에서 일어나는 과정들을 우화한 것으로, 그리고 모든 종교를 그러한 우화를 각색한 것으로 여겼다. 종교에서 신화적 색체를 벗겨내고 남는 것은 원자들로 구성된 자연밖에 없다는 것이다. 돌바크에게 도덕률의 뿌리가 되는 사랑과 미움은 인간관계에 배어있는 충동에, 그리고 충동은 본질적으로 물질의 운동에 기인한 것이다.

 

무신론에 대한 돌바크의 철학적 정당화가 첫 번째와 두 번째 난제를 극복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주저서는 영국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망각의 강에 빠졌던 루크레티우스의 시는 다시 부활하여 영국 낭만주의 문학가들의 영감을 자극하게 되었으며, 돌바크의 추종자들이 생겨났다. 그들 중 리버풀의 의사 터너(M. Turner)를 들 수 있다. 터너가 해몬(W. Hammon)이라는 가명을 빌려 발간한 팸플릿은 프리스틀리를 격분시켰다. 터너의 팸플릿은 돌바크의 유물론에 바탕을 두고 있었으며, 멸종된 종들에 대한 화석상의 증거로 지구의 역사가 창세기의 기록보보다 훨씬 오래되었음을 강조했다. 프리스틀리는 터너의 팸플릿에 대한 반박 편지를 썼다. 터너의 답변이 이어졌고, 다시 프리스틀리의 반박이 뒤따랐다.

 

지구의 역사가 창세기의 기록보다 오래되었다는 터너의 주장은 프리스틀리에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프리스틀리에게 창세기는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를 가진 은유 체계였기 때문이다. 그에게 문제가 된 것은 돌바크의 유물론을 가지고 기적과 구원의 의미를 완전히 사장시킬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질 수 있다.

 

프리스틀리 역시 돌바크와 마찬가지로 유물론을 옹호하지 않았는가? 프리스틀리는 사후에도 남게 되는 것으로 가정된 영혼의 존재를 부정했다. 물질과 독립된 실체로서의 마음을 부정했다. 돌바크와 마찬가지로 물질의 활성을 가정하고, 그러한 활성을 바탕으로 모든 정신 현상을 설명하려 했다. 유물론이 이신론을 부정할 수 없다면, 프리스틀리는 기독교의 한 분파인 만인교가 아니라 이신론을 옹호했어야 하지 않을까? 이신론을 옹호하는 경우, 기적과 구원은 무의미한 것이다. 이신론의 신은 우주 창조 후 인간사에 개입하지 않는 존재로 가정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리스틀리는 이신론을 부정했다. 그가 이신론을 부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프리스틀리는 사후에도 남게 되는 영혼 개념을 미신처럼 취급했다. 그러한 영혼 개념 때문에 다른 문화권에 대한 기독교 전파가 힘들다고 여겼다. 또한 삼위일체설을 부정하는 만인교 교리에 따라 예수를 신의 육화로 규정하지 않았다. 예수도 그저 인간일 뿐이라는 것이다. 다만 인류에게 도덕적 모범을 보인 특별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프리스틀리는 성서에 나오는 많은 기적들을 그대로 믿지 않았다. 하지만 신약에 나오는 특정 기적들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예수의 사후 부활이며, 또 다른 하나는 예수 재림설이다. 이를 통해 프리스틀리는 기독교 교리의 핵심인 사후 구원의 가능성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기독교의 사후 구원 개념은 일반적으로 사후 부활 가능성을 전제한 것이다. 다음 장에서 보게 되듯이, 성서의 기록에만 의지해서는 사후 부활을 위한 재료, 사후 구원의 매개물이 무엇인지를 결정할 수 없다. 그 매개물은 영혼일 수도, 의식일 수도, 그리고 육체일 수도 있다. 사후 구원의 매개물을 영혼으로 규정하는 교리 해석 방식은 16세기 말 개신교 세력의 비판 대상이 되었다. 영국의 경우, 육체를 사후 구원의 매개물로 규정하는 해석 방식은 밀턴(J. Milton)의 <실락원(Paradise Lost)>이 보여주듯 철학자 및 신학자들만의 점유물이 아니었다. 프리스틀리는 육체와 함께 소멸되는 영혼 개념에 근거한 기독교 필멸론(christian mortalism)’을 옹호한 인물들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사후 구원의 매개물을 생식 물질을 구성하는 입자들로 가정했다. 죽음과 함께 인간 정신도 사라지지만, 신은 그러한 입자를 가지고 사자(死者)를 부활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프리스틀리는 이신론자가 아님이 분명해진다. 이제 다루어야 할 물음은 다음과 같다.

 

어떻게 예수의 사후 부활 등의 기적을 믿을 만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프리스틀리는 예수의 부활에 대한 증언 및 예언자들의 증언들을 기적에 대한 증거로 제시한다. 그러한 증거가 쌓이면 쌓일수록 기적의 존재에 대한 신빙성은 높아지고, 신 존재 가정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물론과 유신론의 양립 가능성을 논하는 것은 프리스틀리에게 철학적 작업에 속하지만, 이신론을 부정하고 기적을 정당화하는 것은 역사적 작업에 속한다. 그러한 정당화 작업은 종교사에서 신뢰할 만한 증거들을 선별하는 것에 바탕을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선별 대상이 되는 기적들은 경험 가능한 것에 국한된다. 예수의 부활은 목격 가능하다는 점에서 경험 가능한 기적에 속한다는 것이다. 예수를 신의 육화로 간주하는 경우, 그러한 육화는 경험할 수 없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프리스틀리는 삼위일체설을 부정했다. 프리스틀리의 신학적 유물론을 논증적으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프리스틀리의 신학적 유물론>

유물론은 유신론과 양립 가능하다.

이신론도 유물론의 일종인 까닭에, 유물론을 가지고 이신론을 부정할 수는 없다.

경험 가능한 기적들에 대한 증언들 중 신뢰할 만한 것들이 있다. 그러한 증언들은 예수의 부활 등 기적들이 실제 일어났음을 보여 준다.

기적을 부정하는 이신론을 받아들일 수 없다.

신의 육화라는 것은 경험 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증언들은 신뢰할 수 없다.

따라서 만인교 교리에 함축된 유신론은 유물론과 양립 가능할 뿐만 아니라 역사적 증언들을 바탕으로 누구나 믿을 수 있는 것이다.

 

<프리스틀리의 신학적 유물론>에는 기적 개념과 유물론의 양립 가능성이 전제되어 있다. 프리스틀리의 기적 개념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기적에 관한 흄(D. Hume)과 프리스틀리의 입장 차이를 간략히 살펴보자.

 

흄에 의하면, 기적은 경험적으로 신뢰할 만한 것이 못된다. 기적으로 불리는 사건에 대한 믿음이 참일 개연성은 거짓일 개연성보다 항상 낮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흄의 논증 구성 방식에 대한 분석, 즉 흄 연구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분석은 이 작업의 목적에 비추어 흥미로운 것이 될 수 없다. 이 작업의 목적에 비추어 흄 철학의 흥미로운 부분은 신 개념의 다양성에 대한 그의 인식이다. 이를 알아보기 전에 기적에 관한 그의 규정 방식을 살펴보자.

 

흄에게 기적이란 자연 법칙을 위반한 사건이다. 그에게 자연 법칙은 반복적으로 경험 가능한 것들을 통칭하거나 혹은 경험에서 일반화된 것이다. 자연 법칙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인과적 힘에 대한 그의 회의론에서 기인한 것이다. 반면에 프리스틀리에게 기적이란 자연의 인과적 힘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이다. 자연 법칙도 그러한 인과적 힘과 관련된 것이다. 프리스틀리에게 기적은 자연 법칙을 위한한 것이 아니다. 이를 예수의 부활에 국한해 살펴보자.

 

예수가 정말 부활했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목격하고 증언할 수 있다. 예수의 부활은 경험 가능한 기적이다. 신이 어떤 목적에서 예수를 부활시켰을 때 예수의 생식 물질을 구성하는 입자들을 사용했을 것이다. 이때 그 사용 방식은 신이 물질에 부과한 섭리, 즉 자연 법칙에 따른 것이다. 신은 물질에 활성을 부여했고, 입자들이 활성에 의해 합법칙적으로 상호작용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의 부활은 신 개입 없이는 설명 불가능한 사건이다. 따라서 예수의 부활은 물질의 활성과 관련된 인과적 힘만으로는 설명 불가능한 기적으로 규정된다. 이러한 규정 방식에 따를 때, 경험 가능한 기적이 자연 법칙을 위반할 필요는 없다. 이러한 까닭에, 프리스틀리는 기적에 관한 흄의 입장을 크게 개의치 않았다.

 

흄은 자신을 비기독교인이거나 무신론자라고 천명한 적이 없다. 인간의 합리적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더라도, 그래서 신 존재가 증명 대상이 될 수 없더라도, 이로부터 신 존재 자체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흄의 말기 글들을 보면, 창조주로서의 신 존재를 전제한 상태에서 신의 속성을 논하는 방식이 주를 이룬다. 그러한 논증 방식에서 흄은 이 세상에서 악을 없앨 수 없는 이유신의 무능력으로 돌리는 과감한 시도를 한다. 신은 전지전능함에서 완벽하지 않다는 것이다. 다만 신의 능력은 인간의 능력에 비해 전지전능할 뿐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흄이 그러한 논증 방식에서 유일한 신 존재를 전제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전제가 그의 진의라고 장담할 수 없다. 흄은 유일신 개념을 전제한 종교가 다신교보다 관용성이 약한 종교라고 언급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또한 원자론의 에피쿠로스, 스토아 사상가들, 플라톤(Plato), 고대 냉소주의자들 및 회의론자들의 입장을 비교하면서 직접적으로 어느 편도 지지하지 않는다. 흄 서술 방식의 이러한 다양한 측면은 흄 철학에 대한 다양한 해석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어떤 이는 흄을 전지전능함에서 완벽하지 않은 신을 믿은 유신론자로 규정한다. 어떤 이는 흄을 도덕 자체를 인간의 문제로 간주한 유신론자로 규정한다. 창조주로서의 신이 도덕성의 기원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무엇에 대한 회의무엇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흄을 종교적 진리를 신앙의 영역에 국한시키는 신앙주의(fideism)의 옹호자로 규정하는 이도 있다. 흄의 철학을 종교 다원론으로 규정하거나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방식은 하나의 학적 유행이 되었다. 어쩌면 흄은 인간의 경험과 합리적 능력의 한계를 인식하고, 이를 보이기 위해 다양한 철학적 이론들을 끌어 들였을 수도 있다. 그러한 한계를 인정한다면, 인간의 경험과 합리적 능력을 정합적으로 통합할 수 있는 그 어떤 이론도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각 이론은 인간의 경험과 능력의 특정 측면만을 일반화한 형태에 불과하며, 이론들의 마찰 관계는 인간의 한계를 반영해 준다.

 

프리스틀리는 흄에 대한 다양한 해석 중 그 어느 것도 수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신학적 유물론에 따르면, 우리가 믿어야 만하는 유신론은 철학, 신학, 역사학의 공조 관계 속에서 파악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자신의 신학적 유물론에 대한 확고한 신념은 결국 기독교와 다른 종교를 비교할 때 경직된 사고방식으로 표출될 수밖에 없었다. 이를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의 형성 과정에서 불거진 그와 다른 인물들 사이의 논쟁을 통해 살펴보자.

 

 

(3) 흐려진 판단

돌바크의 저술이 무신론을 철학적으로 정당화하는 영역에만 종속된 것은 아니다. 저술의 지역적, 문화적 파장력은 논증의 엄밀성만으로 결정되는 것도 아니다. 무신론을 정당화하려고 돌바크가 끌어들인 연구 방법, 곧 고대 신화들을 비교하는 연구 방법은 전문 역사학자들뿐만 아니라 아마추어 역사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집트. 인도, 그리스 신화에 대한 관심의 증폭은 이교도 전통의 역사를 진지한 연구 대상으로 승격시켰다. 이러한 18세기 말 세태는 비록 유럽 중심적이기는 하지만 일명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연구 분과를 탄생시키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프리스틀리가 터너와 격렬한 논쟁을 벌이고 있던 사이, 로마의 흥망성쇠를 다룬 기번(E. Gibbon)의 저서들이 나왔다. 지금까지도 가장 체계적인 로마사 연구서로 손꼽히는 기번의 저서는 종교 문제도 다루고 있다. 그는 이교도인 다신론자들이 기독교인들보다 훨씬 남의 것에 대해 너그럽고 개방적이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다신론자들의 너그러움 속에 맹목적인 기독교인들은 조직적으로 결속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세력을 얻게 된 기독교인들은 다신론자들을 적으로 규정하고 몰아냈다는 것이 기번의 지적이었다. 터너와의 논쟁에서 프리스틀리가 냉정한 태도로 일관했다면, 기번의 지적에 대해 도전장을 내민 프리스틀리는 자제력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사실 기번은 프리스틀리와 논쟁할 생각이 아예 없었다. 역사적 진위 여부가 핵심인 논쟁에서 기적과 구원의 가능성이 중심축이 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기번은 반기독교인도, 무신론자도 아니었다. 그는 로마 시대 기독교의 교세 확장에 대한 자신의 서술 방식이 틀릴 수 있고, 당시 기독교인들의 폐쇄성이 기독교 교리 자체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증거도 충분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프리스틀리는 기번의 이러한 주장이 무신론자임을 감추는 기회주의적인 것이라고 간주했다. 두 사람 사이의 논박은 급기야 감정싸움으로 치달았다. 기번은 만인교의 정신적 지주이자 폐동맥 순환을 발견한 세르베투스(M. Servetus)가 종교 개혁 시절 칼뱅(J. Calvin)에 의해 화형을 당한 사실을 강조하면서 프리스틀리에게 실험실로 돌아가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프리스틀리는 물러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는 급기야 둘 사이의 논박 편지를 출판하여 대중에게 공개 심사를 받자고 요청했다. 기번은 프리스틀리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평행선을 달릴 것이 분명한 논쟁만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프리스틀리는 단독으로 기번과의 논쟁을 출판해 버렸다.

 

무신론 진영은 고대 신화나 다른 문명권의 종교에서 기독교의 개념적 뿌리를 찾으려고 시도했다. 그 시도는 지금처럼 신화 속에 담긴 문화적 특성을 비교 연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랑과 자비의 개념이 기독교와는 다른 종교에 함축되어 있더라도, 그 개념이 형성되고 사회 속에서 기능한 방식은 서로 동일하지 않다. 하지만 문화적 다양성과 종교를 결부시키는 것은 무신론 진영의 고대 신화 연구가들에게는 아직은 낯선 것이었다. 그들 중 일부는 특정 개념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표면적 유사성에만 주목했다. 여러 고대 신화에서 발견되는 남근 숭배 사상을 기독교의 역사적 뿌리로 규정하기도 했다. 물론 기독교가 주변 문화에 영향을 받아 형성된 종교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기독교가 주변 문화를 단순히 모방하거나 각색한 결과로 탄생한 종교는 아니다. 무신론 진영의 역사학자들에 반발해 고대 신화와 무관한 기독교의 독자성을 주장하는 것에 그치지고 않고, 다른 종교에 대한 기독교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고대 신화나 다른 종교에서 기독교의 뿌리를 찾아보려는 작업 중 볼니(C. de Volney)의 저서만큼 프리스틀리를 격분시킨 것은 없다. 그 저서에서 성경의 요셉과 마리아에 대한 구절은 점성술의 염소좌와 처녀좌 신화를 모방한 것이고, 예수(Jesu Christ)의 이름은 술의 신 바커스(Bacchus)의 애칭 'Yes-us'와 힌두교의 신인 크리쉬나(Krischna)를 합성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아시아의 고대 종교와 신화를 연구하는 이들 중 일부는 기독교가 힌두교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이러한 물음을 다룬 문헌에서 표면적인 유사성과 차이성을 찾기란 쉬울뿐더러, 자의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다수 세력에 대항하여 새로운 관점을 확장하려고 하는 사람은 그러한 자의적인 것도 확실한 사실에 근거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프리스틀리는 기독교의 정신없이는 인간의 도덕성은 타락할 수밖에 없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는 프랑스 혁명 후에도, 그리고 미국으로 건너간 후에도 집요하게 무신론자들에 대한 반박을 이어갔다. 그러한 반박에는 다른 종교에 대한 그의 불쾌감이 드러나 있다. 프리스틀리는 채식주의와 금주가 권장되고, 성행위를 통해 순간적인 열반에 돌입할 수 있다는 힌두교의 교리를 비합리적인 것이라고 공격했다. 실험적 증거를 합리적 판단의 근거로 삼았던 프리스틀리의 옛 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이다.

 

 

 

 

* 이어지는 내용은 생략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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