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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빌의 마지막 위대한 질식 자위 행위(auto-erotic asphyxiation)

착한왕 이상하 2009. 11. 24. 08:06

'얼굴' 마지막에서 '네가 괴물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곱게 늙는 데 힘써라!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에 둔감해진 우리가 이 말에 무심할 때 '나는 누구일까?'라는 질문은 항상 나를 폭력적으로 만들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의 의미를 최근 사망한 헐리우드 배우 데이비드 캐러딘의 사례로 알아보자.

 

 

캐러딘은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 <킬 빌>에서 빌의 역할로 노년기에 다시 유명세를 탔다. 그 영화를 본 적은 없다. 캐러딘이 그의 이름을 대중에게 각인시킨 계기는 70년대 티브이 시리즈 <쿵푸>였다. 히피 운동과 반전 분위기가 지배히던 시절, 많은 미국인에게 동양은 미지의 땅, 개인의 궁극적인 자유를 발견한 곳 등으로 미화되었고, 선불교나 요가가 대중의 관심을 받았다. '쿵푸'는 싸움의 기술이 아니라 고요함 속에 중심 잡힌 선의의 해동 방식을 상징하게 되었다. 호아제의 사춘을 죽이고 소림사에서 미국으로 도망와 서부를 배회하는 캐러딘의 이미지는 그러한 상징성과 딱 맞아 떨어졌다.

 

캐러딘은 최근 태국 방콕 소재의 특급 호텔에서 목을 매단 채 나체로 발견되었다. 페티시에 종종 몰두한 경력은 그가 '질식 자위(auto-erotic asphyxiation)'를 시도하던 중 산소 부족으로 사망했을 것이라는 추측에 무게를 실어주었다. 이러한 추측은 현장 단서들, 실례로 목과 페니스에 받줄이 묶여 있었다는 점, 침대에 여자 속옷이 널려 있었다는 점, 그리고 방안에 아무도 들어온 흔적이 없었다는 점에 근거하고 있다. 즉, 그는 혼자 자신의 성적 판타지를 분출시키다가 목에 밧줄을 묶어 성적 흥분을 최고조로 올릴려다가 질식사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타살설도 만만치 않다. 캐러딘이 질식 자위를 시도하다가 질식사를 한 것인지, 아니면 제3자에 의해 타살된 것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72세로 생을 마감한 캐러딘이 질식 자위를 시도하가다 사망했다고 해보자. 이것이 도대체 앞서 말한 것, 즉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에 둔감해진 우리가 이 말에 무심할 때 '나는 누구일까?'라는 질문은 항상 나를 폭력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과 무슨 연관성이 있단 말인가? 어떤 이는 그의 비정상적인 행동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고 강조하면서, 결국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의 구분에 둔감해진 그는 그 자신을 죽이는 폭력을 저지른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그의 선입관만 드러낼 뿐 다수의 동의를 얻기 힘들다. 캐러딘이 정말 질식 자위를 시도하다가 사망했다면, 그가 죽기 전 느낀 쾌락은 그 자신에게는 지극히 얻을만한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이며, 또 그의 질식 자위 행동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결국 그의 사생활의 비밀 하나만 드러난 셈이다. 그래서 누가 그의 질식 자위 행위를 비정상으로 치부하더라도, 그것은 그의 비밀일 뿐, 혹은 단지 비밀스러운 괴물일 뿐, '폭력적인 괴물'은 아니다.


비밀, 그 여러 모습 중 하나는 쾌락을 자기 자신만의 소유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파트너가 필요한 키스나 정상적인 섹스는 완전한 개인의 비밀에 속할 수 없다. 인생사의 한 축은 쾌락적인 상태와 그렇지 않은 상태의 반복이다. 이때 누구나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스펙트럼을 남긴다.

 

        ... 쾌락적인 상태, 그렇지 않은 상태, 쾌락적인 상태, 그렇지 않은 상태 ...

 

이러한 감각의 스펙트럼에서 개인에게 쾌락적이지 않은 상태는 쾌락적인 상태를 위해 존재하는 일종의 노예가 된다. 왜냐하면 쾌락적인 상태를 더 가치 있게 평가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쾌락적이지 않은 상태는 개인에게 쾌락적인 상태를 위해 존재하는 괴물이 된다. 하지만, 그러한 괴물은 폭력적인 괴물은 아니다. 반면, 개인에게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쾌락적인 상태는 훨씬 쉽게 타인에게 폭력적인 괴물로 전환될 수 있다. 이는 질식 자위 행위와 강간을 비교할 때 쉽게 드러난다.

 

강간범이나 캐러딘이나 모두 감각의 스펙트럼이라는 생의 한 측면을 드러낸다. 하지만 둘의 쾌락 추구 방식은 다르다. 캐러딘이 정말 질식 자위 행위로 사망한 것이라면, 그 행위는 쾌락 그 자체를 추구한 것이다. 그 누구도 그의 쾌랙 상태를 위해 노예가 되지 않았다. 반면, 강간범은 쾌락을 얻기 위해 타인을 노예로 삼는다. 그래서 그가 얻은 쾌락은 그 자신에게는 가치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로 인해 타인이 희생된다. 그의 강간 행위는 폭력적인 괴물이다.

 

여기서 우리는 괴물에도 질적 차이가 있음을 보게 된다. 내눈에는 그저 개인의 비밀로 비춰지는 것이 타인에게는 괴물로, 즉 비정상적인 괴물로 비춰질 수도 있다. 그래서 캐러딘의 질식 자위 행위를 괴물로 취급하는 사람의 의견도 받아들이자. 이때 질식 자위 행위라는 괴물은 적어도 타인을 노예로 삼지 않는다. 그것은 어찌보면 나라는 존재를 완전한 쾌락 속에 묻어버림으로써 순간적인 평온을 찾는 행위이다. 그러한 행위는 해당 행위자에게는 나름대로의 가치를 갖는 것이며, 이로 인해 크게 손해를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반면에 강간범이 강간으로 얻은 쾌락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는 순간, 그를 위해 노예가 되는 사람이 발생한다. 따라서 캐러딘의 질식 자위 행위를 가지고 그를 괴물이라 부를 수 없지만, 강간범은 괴물이라 부를 수 있다. 그것도 그냥 비정상적으로 분류되어 정상적인 것을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불쌍한 괴물이 아니라 '폭력적 괴물'이라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제 감각의 스펙트럼을 좀 더 확대 시켜보자. 편의상 인생을 좋은 시기와 나쁜 시기의 반복이라 하자. 그리고 성공과 실패의 이면에 놓인 감각의 스펙트럼은 무시하자. 이때 누구나 죽기 전, 혹은 죽은 후 하나의 스펙트럼을 남긴다.

 

        ... 좋은 시기, 나쁜 시기, 좋은 시기, 나쁜 시기, 좋은 시기, ...


죽기 전, 내 인생은 그나마 멋졌어와 같은 개인의 인생 전체에 대한 평가는 잊어버리자. 나는 누구인가? 이 물음은 사실 좋은 시기와 나쁜 시기의 반복 속에서 끊임 없이 뛰쳐나온다. 누구나 좋은 시기가 오래 지속되고, 또 인생 전체에 걸쳐 자주 등장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좋은 시기를 위해 노력한다고 좋은 시기가 도래하는 것은 아니다. 좋은 시기와 나쁜 시기는 개인의 노력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 둘의 반복에는 설명 불가능한 엄청난 인과적 복잡성이 자리잡고 있다. 좋은 것이 나쁜 것의 원인이 되기도 하며, 또 나쁜 것이 좋은 것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한창 자신의 주가를 올릴 시점 큰 교통사고를 당한다면, 이것은 그에게 불운이다. 하지만 그가 입원한 병원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는 인연을 얻게 된다면, 불운이 행운의 원인이 된 셈이다. 이러한 불운과 행운의 복잡한 인과적 관계는 의지로 결정되지 않는 까닭에, 역시 인생사의 판단은 과정보다는 성공과 실패와 같은 결과에 집착하게 된다. 이때 인생이 가치가 있으려면, 나쁜 시기는 좋은 시기를 위해 존재하는 노예가 되어야 한다.

 

나는 누구일까? 내 인생은 왜 이래? 이러한 질문 모두는 어찌보면 어떻게 하면 내 인생도 가치가 있을까라고 묻는 것이며, 결국 어떻게 하면 좋은 시기를 쟁취하여 좋은 시기에 대비된 나쁜 시기를 추억거리로 만들 수 있는가라는 세속적인 형태로 귀환된다.

 

그러나 나에게 좋은 시기가 돌아온다는 것은 타인에게는 불행일 수도 있다. 내가 더 많이 버는 만큼 손해를 보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결국 강간범에게 좋은 시기, 즉 타인을 노예로 삼아 쾌락을 얻는 순간이 타인에게는 악이듯이, 나의 좋은 시기라는 것은 타인에게는 폭력적 괴물일 수도 있다. 그래서 진정으로 폭력적 괴물이 되기 싫은 사람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내가 바라는 좋은 시기, 곧 나에게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 남에게도 그러할까?

 

아이러니 하게도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들, 즉 마치 스스로 누구나 따라야 할 '삶의 지도(Life-Map)을 갖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 이들 중 상당수가 위 물음에 무감각한 경우가 많다. 누구나 폭력적 괴물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이 사람을 가리지 않는 까닭에, 폭력적 괴물이 불행한 것은 절대 아니다. 전두환 장군을 보라. 그의 늙은 모습을 보면, 평온하고, 인자하며, 마치 해탈한 노승 같기도 하다. 그가 잘못을 뉘우쳐 그런 모습을 띠는 것은 절대 아니다. 또 그가 구테타를 일으켰을 때에도 자신의 행동이 악한 것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도 나는 누구일까라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하지만 그는 정성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의 구분에 둔감했다. 그는 자신에게 정상적인 것이 남에게는 폭력적인 괴물에 불과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래, 비정상적인 것을 괴물이라 부르자. 하지만 괴물에도 두 종류가 있다. 정상적인 것을 돋보이게 하는 괴물이 있는가 하면, 폭력적인 괴물이 있다. 세상의 터무니 없음을 잘 보여주는 괴물은 '폭력적인 괴물'이다. 왜냐하먄 폭력적인 괴물은 대부분 스스로 정상적인 것이라 고집하는 것에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폭력적인 괴물을 탄생시킨 자들은 항상 불행한 죽음을 맏이할까? 아니다. 히틀러처럼 자신이 생각한 삶의 지도가 세상사의 지도가 되어야 한다고 믿은 자는 과업이 실패했을 때 자살이라도 하지만, 자신의 좋은 시기를 쟁취하기 위해 결단을 내렸던 자들 중 많은 수가 자손에게 부를 남기고 해탈의 경지에 이른듯 한 미소 속에 죽음을 맞이했다. 인간이 인간을 가릴 뿐, 세상은 사람을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이 인간을 가릴 뿐, 세상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당신들은 이 말을 이해할 수 있는가? 어쨌든 이 번 사건으로 캐러딘이 질식 자위 행위를 시도했다는 것은 밝혀졌다고 봐야 한다. 질식 자위 행위가 그의 사인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더라도, 이번 사건으로 그가 과거에 페티쉬에 심취했다는 사실이 지인들을 통해 폭로되었기 때문이다. 질식 자위 행위를 비정상적인 것으로 혹은 변태적인 것으로 보는 이들도 캐러딘을 폭력적 괴물로 부를 수 없다. 타인을 수단으로 삼지 않고 쾌락 자체를 위한 그 행동 방식은 그에게는 가치가 있는 것이다. 자신 외에는 그 누구도 수단으로 삼지 않은 완전한 쾌락 상태! 어쩌면 타인을 수단으로 삼지 않는 유일한 가치 추구 방식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