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테오리치의 중국 선교사
‘우리 유럽인’(nos Europai)라는 표현은 1623년 프란시스 베이컨의 글에 등장한다. 베이컨이 그러한 표현을 사용하게 된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16~17세기 사이에 유렵 대륙에서 일어난 변화에 주목해야 한다.
• 첫째, 중세 시절만 해도, 자연은 인간이 아니라 신 자체를 위해 존재한다는 관점이 지배적이었다. 자연법은 자연 및 사회 양자에 관통하는 것으로 여겨졌고, 다만 문제 해결의 실천 맥락에서 자연과 사회를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신에 의해 설계된 자연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이 싹튼다. 인간은 천상에 깃든 신성을 찬양해야 하는 존재에서 자연에 담긴 신의 설계를 읽어낼 수 있는 존재로 그 가치가 급상하게 된 것이다. 자연에 해당하는 별도의 법칙, 곧 자연법칙이 가정되어야만 했다. 인간이 자연법칙을 발견하고 이용하는 존재가 되려면, 다른 동물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인간 고유의 속성이 가정되어야만 했다.
• 둘째, 교황의 정치 세력은 다양한 관습을 지닌 지역들을 인솔해야만 했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 인간은 모두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행위에 대한 처벌은 그 동기가 얼마나 덜 악한가에 따라 결정되었다. 양심에 따른 행위는 그 결과가 부정적일지라도 예외적인 것으로 규정되기도 했으며, 중세 시절 ‘양심’(conscience)은 ‘함께 알아가기’를 의미했다. 교황을 악마의 화신으로 모는 종교 개혁기의 분위기 속에서 중세의 법 체제에 남아 있던 모든 불확실성은 권위주의의 상징으로 전락하게 된다. 오로지 확실한 것만이 지식으로 여겨지는 ‘확실성 추구’의 시대정신이 싹트게 된 것이다. 개연적인 것은 단지 무지의 소산일 뿐, 결코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인간 속성의 핵심일 수는 없다. 결국 심리적인 것과 합리적인 것의 이분법이 정착할 수밖에 없었다. 또 교황의 입지가 좁아지면서 각 지역을 관할하는 군주들에게 새로운 정치 제도와 법 체제가 필요했다.
베이컨이 이 두 가지 변화에 적극적으로 동조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심리적인 것과 합리적인 것의 이분법과 같은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더욱이 이 두 가지 변화는 한 순간에 발생한 것도 아니며, 또 그러한 변화에 대한 반동 세력은 항상 있게 마련이다. 서양의 과거 역사에서 기독교 교리에 대한 해석의 변화는 세계 이해의 급진적 변동을 수반했고, 이 수반 과정에는 정치적 혼란 양상이 나타나기 마련이었다. 베이컨이 주목한 것은 바로 종교 개혁기의 극심한 유럽의 분열 양상이었다. 그 분열 양상은 상대방에 대한 관용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보기 힘든 교파 간의 세력 다툼에 기인한 것이었다. 정치적 권력을 얻기 위해 각 교파는 군주와 결탁해 교황 세력에 대항했으며, 심판의 날을 가장한 종말론으로 민중의 마음속에 파고들려고 했다. 종교적 갈등은 비단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개신교의 여러 교파들 또한 군주의 종교, 곧 국교가 되기 위해 몸부림치는 가운데 경쟁 관계를 맺었고, 전쟁은 피할 수 없었다.
베이컨의 ‘우리 유럽인’은 지금의 유럽 공동체의 소속원과 대등한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민족과 국가를 초월한 문화 공동체의 의미로 해석될 수 없기 때문이다. 베이컨의 ‘우리 유럽인’은 평화를 위해 당시 유럽의 지배층, 곧 귀족층 지성인들의 단결을 호소한 것이었다. 또한 그것은 다른 문명권에 대항한 ‘유럽’을 함축하는 것도 아니었다. 17세기에도 T-O 지도가 민중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유럽은 여전히 세계 역사의 중심축이 아니었다. 베이컨의 ‘우리 유럽인’은 유럽 중심사관에서 유럽 문명권과 다른 문명권을 구분하는 데 명백한 한계를 갖고 있었다. 그 한계는 베이컨의 사상에 기인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문명권이 유럽을 세계의 중심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인한 것이다. 이에 대한 증거로 예수회 소속 마테오리치(M. Ricci)의 중국 선교사를 들 수 있다.
<17세기 중엽까지도 민간인 사이에 유행한 T-O 지도>
가톨릭의 한 교파인 예수회는 1534년 스페인의 귀족 이그나티우스(Ignatius of Loyola)에 의해 설립되었다. 16~17세기 종교 개혁기의 혼란 속에서 예수회는 붕괴 위기에 선 교황 세력과 다른 집단 사이의 중재자로 나섰다. 선악의 보편적 기준을 마련하기보다는 원죄설에 근거해 덜 악한 것을 논함으로써 예외 사례의 규정을 중요시하는 예수회의 중재 방식은 파스칼(B. Pascal) 등 17세기 철학자들의 비판 대상이 되었다. 그런 비판의 대상이 되기 이전부터 예수회는 세력 유지의 전략으로 선교사들을 중국에 파견했는데, 그 중 한 명이 마테오리치였다. 마테오리치에 의해 중국 지식인들 일부가 서양 과학에 심취했다거나, 서양 천문지리에는 관심을 갖되 기독교는 거부했다거나, 혹은 중국 지식인들 사이에 서양 과학을 둘러싼 큰 논쟁이 있었다는 식의 통설은 일종의 과정에 불과하다. 예수회는 중국인의 기독교화에 성공할 수도 없었으며, 또 중국인들에게 별다른 감동도 주지 못했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중국을 기독교화해 보려는 야심찬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 ‘기억술’, ‘연금술’, ‘2차원 지도 제작법’, ‘천문학’, ‘유클리드 기하학’을 무기로 삼았다. 이들 무기는 중국에서 위력을 떨치지 못했다. 어려서부터 경전을 섭렵한 중국학자들에게 기억술은 아예 먹히지 않았다. 서양 연금술에 중국학자들 일부가 관심을 보였지만, 그 관심은 그저 호기심 정도에 불과했다. 물질 변형의 주기성을 중시하는 중국 연금술과 달리, 서양 연금술은 색 변화를 중시했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의 제철술과 도자기 기술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유럽을 압도한 만큼, 중국학자들은 예수회의 연금술을 우습게 봤다. 예수회의 지도 제작법은 좌표축을 바탕으로 거리와 위치를 정하는 수학적 방법에 근거하고 있었다. 그러한 수학적 방법 없이도 실천적 측면에서 대등하게 사용할 수 있는 여러 지도 제작법들이 중국에 이미 있었다. 서양의 지도 제작법 역시 중국인들의 심금을 전혀 울릴 수 없었다.
천문학은 어떠한가? 코페르니쿠스가 일식을 정확히 예측하여 황제를 놀라게 했고 벼슬도 했다는데, 이것을 확대 해석하면 안 된다. 역법의 끊임없는 개선은 농사뿐만 아니라 상제(上帝)의 화신으로 여겨지는 황제의 운명을 점치기 위해서도 항상 필요했다. 8세기 당나라 때에는 인도인들이 역법을 담당했다면, 13세기부터는 페르시아와 이슬람 천문학자들이 그 일을 담당했다. 중국의 역법 개선 사업은 꾸준히 진행되어 왔던 것이고, 그 사업은 원래부터 이방인들에게 활짝 열려 있었다. 막말로 돈이 있으니, 역법은 타국의 학자들을 불러와 쓰자는 식이었다. 마테오리치가 벼슬을 했다지만, 그가 속한 관청은 이슬람 학자들의 지휘 아래 있었다. 그가 중국에서 누린 권위는 페르시아나 이슬람 천문학자들에 비해 미미했던 것이다.
중국학자들은 서양 천문학에 담긴 세계 이해를 진부한 것으로 간주했다. 비록 황제가 상제의 화신으로 여겨졌어도, 우주와 인간을 창조한 동시에 사후 세계의 심판자이기도 한 신 개념은 중국인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었다. 여기서 마테오리치 등 예수회 선교사들은 큰 실수를 했다. 종교를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그나마 실천적 측면에서 중국인들이 서양 천문학을 수용할 여지마저도 약화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서양의 천문지리가 제아무리 쓸모 있다고 한들, 그것을 창조주로서의 신 개념과 연관시키는 것은 중국인들에게는 역겨운 것이었다. 게다가 유클리드 기하학의 법칙마저도 신 개념과 연관시키니, 이 또한 중국인들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과 유클리드 기하학의 결합은 17세기 이신론(deism)의 한 뿌리가 된다. 신은 우주를 합법칙적으로 창조했을 뿐 세상사에 직접 개입하지 않는다는 이신론의 전통 속에서 이성만으로도 자연과 도덕에 관한 확실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관점이 싹텄는데, 마테오리치는 이신론을 추종하지 않았다. 마테오리치가 16세기 예수회 소속의 인물이었던 만큼 중세의 신 개념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마테오리치가 어렵사리 북경에 입성하는 데까지 약 20여년에 걸친 선교사들의 활동이 있었다. 그는 북경에 입성했지만 과학을 이용해 중국을 기독교화해 보려는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대다수 중국학자들은 마테오리치가 가져온 것들에 감흥을 받을 수 없었다. 그것들이 지나치게 종교적 색채와 뒤섞이면서 중국학자들에게 혼란을 줬다는 식의 주장도 최근에 와서는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었다. 서양 과학이 혼란을 줄 만큼 당시 중국학자들의 관심거리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왜 18세기 말이 되어서야 서양 과학에 대한 관심이 중국에서 일어났고, 그 여파가 조선에까지 미쳤을까? 답은 간단하다. 18세기 중엽이 지나면서 유럽이 세계무대의 중심이 되었기 때문이다. 중국이 경제 및 기술의 측면에서 유럽을 압도했던 시절에 벌어진 예수회의 선교 활동은 아무런 성과도 낼 수 없었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중국에서 물러날 수박에 없었다. 예수회가 처한 열악한 상황도 그렇게 만든 원인 중 하나였다. 이단으로 몰리면서 역으로 그 세력을 외지에 확대시켜 보려고 했건만, 18세기에 파산한 예수회는 더 이상 중국에서 선교 활동을 벌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유럽이 세계무대의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된 이후, 중국 학자들은 반성의 분위기 속에서 서양 과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조선의 유생들은 탈 중국 이념의 정당화 수단으로 서양 과학을 바라보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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