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 에세이/진보의 시작

민주주의에 대한 불만의 시선들 1. 세 가지 시선들

착한왕 이상하 2020. 2. 19. 21:41

SF 영화를 보거나 소설을 읽어 보면, 미래의 지구 정치 체제로 자주 등장하는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외계 종족의 침략에 대항하려고 지구 전체에 걸친 정치 연합이다. 그러한 정치 연합은 현재의 UN 체제의 확장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는 미래에도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마치 봉건제 시대를 연상시키는 귀족주의 정치 체제의 부활이다. 그러한 부활은 민주주의 정치 체제의 붕괴를 전제하고 있다. 그런데 미래 사회에서 민주주의 정치 체제가 붕괴되는 가상의 과정을 그럴듯하게 묘사한 SF 소설은 없다. 그러한 소설을 구상하는 경우, 민주주의 정치 체제 붕괴 과정의 첫 시발점은 아마도 투표의 비밀성 혹은 익명성과 평등성이 이런저런 이유로 위협받게 되는 가상의 상황일 것이다. 투표의 익명성과 평등성은 민주적 절차의 핵심이다. 만약 그것이 지켜지지 않거나, 다수가 그것에 무감각해지는 경우, 언제든지 전체주의의 망령이 되살아날 수 있다. 그러한 전체주의가 붕괴되는 가운데 과학과 기술로 무장한 신흥 귀족 세력들의 출현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익명성과 평등성으로 대표되는 투표의 공정한 절차는 민주제 사회에서는 진보 보수, 좌파 우파 등 이념보다 우선하는 것이다. 그 절차가 깨지면, 그러한 이념들 사이의 관계도 민주주의 틀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 절차는 정당 간 혹은 정치적 집단 간 경쟁을 다수의 선택을 통해 결정한다는 현재 간접 민주주의 핵심을 보장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특정 민주제 사회의 시민 수준을 평가하는 기준 하나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만약 특정 정치 집단이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선거에 개입한 정황이 있음에도 그 집단의 지지 세력과 반대 세력 사이의 이념적 갈등이 발생한다면, 해당 사회의 시민 수준은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데 역부족이다. 그러한 정황을 허용하지 않는 것은 특정 이념에 대한 지지 혹은 반대보다 우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투표의 공정한 절차는 지구적 차원에서 언제 정착했을까? 현대적 간접 민주주의를 가장 먼저 시작한 곳 중 한 곳이자 민주제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미국의 경우, 그 절차는 1965년에 마련되었다. 흑인들의 선거권이 그 해 86일 린든 존스 대통령 정부 주도 아래 법적으로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웃기는 것이 있는데, 아직도 흑인들은 선거권을 완전히 보장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2007년 흑인들의 선거권은 다시 25년 연장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현대적 민주주의 실험 역사가 고작해야 1세기 조금 넘고 투표의 공정한 절차를 기준으로 할 때 고작 반세기 정도 넘어섰음을 보여 준다. 그럼에도 민주주의가 맹목적 공교육을 통해 종교화된 곳의 경우, 다수는 마치 민주제가 자신들의 삶의 가치체계를 이미 형성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그들은 사회 설계 참여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다시 말해, 선거를 통해 차선의 악을 제거하는 것만으로도 민주주의의 진화가 가능하며 권력의 원천이 시민들에게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착각이 아니라면, 듀이(J. Dewey)민주주의 자체를 삶의 방식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은유적 표현을 사용해 권력이 점점 직업 정치가들에게 귀속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역설하지 않았을 것이다.

 

2차 대전의 종식과 함께 지구 전역으로 확산된 지금의 민주주의는 여전히 실험 중에 있으며, 현재 많은 문제와 부작용들이 발생하고 있다. 1980년대 이후 각국의 빈부 격차는 과거와 달리 심화되고 있으며, 이 점은 직업 정치가들의 기득권화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또 다양한 영역들의 전문 지식의 거래 관계 속에서만 해결 가능한 사회의 복잡한 문제들마저도 기존 정당 정치 세력들은 정치적 문제로 둔갑시켜 자신들의 세력 유지의 수단으로 삼는다. 대중은 이러한 속임수에 쉽게 넘어가고, 그 결과는 문제의 실질적 해결이 아니라 패싸움을 연상시키는 여론 분열이다. 그리고 직업 정치가들은 그러한 분열을 민심의 다양성과 연관시켜 사회의 성숙한 민주화 정도를 반영해 준다며 세치혀를 놀린다. 이런 세태가 지속되면 될수록 새로운 환경에 맞도록 개선되어야 할 사회 체계들은 오리혀 점점 더 고착화된다. 그 결과, 사회의 시민 영역은 정치 영역과 경제 영역의 결탁에 근거한 세력에게 놀아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지구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현재 나타나고 있는 이러한 거시적 현상에 대한 분석을 논외로 하더라도, 민주주의 정치 체제 실험의 초기 단계에서도 민주주의의 취약점들을 지적한 사람들은 많다. 그러한 취약점들을 불만의 시선과 연관시켜 다룰 때, 누구나 다음의 것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비교의 시선>

사회는 교육, 과학 기술, 경제, 정치 등 여러 영역들로 구성되며, 사회 형태는 다양한 계층들이 그러한 영역들에 분포되거나 넘나드는 방식으로 규정된다. 정치 영역에 별도의 정치가 계층을 직업적으로 혹은 신분으로 법적으로 허용하는 것은 결국 민중 위에 군림하는 권력층을 허용하는 것이다. 권력층은 항상 다수를 억압할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모든 정치 체제의 정부 권력은 다수에게 좋은 것이 아니다. 하지만 민주주의 정치 체제에 근거한 정부 형태가 그나마 가장 나은 것이다.

 

<위에서의 시선>

길거리에 나가서 현재 벌어지는 사안들을 놓고 일반 유권자들과 얘기해 보면, 사회의 개선이 어려운 이유를 금방 알 수 있다. 많은 유권자들은 정말 자신들의 삶에 필요한 정치가가 누구인지를 선별할 능력을 결여하고 있다. 이 때문에, 당선되지 말아야 할 정치인이, 사회 개선을 가로막는 정당이 권력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아래에서의 시선>

길거리에서 유세 중인 직업 정치가들과 얘기해 보면, 사회 개선이 어려운 이유를 금방 알 수 있다. 그들은 당장 풀어야 할 중요한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서도 구체적 해결책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에게 그러한 문제들은 단지 그들 자신들의 세력 유지 목적의 이용 수단일 뿐이다. 그들 주변에 모인 전문가들도 문제 해결과는 거리가 먼 인물들이다. 직업 정치가들은 정당의 성격과 상관없이 세력 유지와 확장을 위해 자신들을 지지하는 인물들을 사회 각 영역의 곳곳에 심는 짓을 정치적 부패의 원인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결과, 사회 개선에 더 이상 적응적이지 못한 각 체계들이 고착화된다.

 

<비교의 시선>에는 정치 영역에 별도의 정치가 계층을 허락하는 모든 정치 체제는 권력층이라는 기득권 계층을 법적으로 보장할 수밖에 없다는 불만의 시선이 깔려 있다. 물론 정치 영역에 별도의 청치가 계층을 허락하지 않는 정치 체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한 정치 체제를 가정하고 정치적 권력의 기득권화를 억제시킬 수 있는 방안을 놓고 정치적 상상력을 발휘해 볼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지구 상의 모든 정체 체제는 정치 영역에 별도의 정치가 계층을 허용하고 있는 까닭에, 그러한 정치적 상상력은 논외로 하자. 이때 <비교의 시선>에 깔려 있는 불만은 현대적 간접 민주주의 옹호론을 뒷받침한다. 투표의 익명성과 평등성이 보장된 공정한 절차를 통한 주기적 선거로 최악의 결과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최악의 결과란 권위주의적 독재나 전체주의의 등장이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 역시 다른 정치 체제와 마찬가지로 권력 불평등을 초래하는 정치 체제이지만 독재나 전체주의의 등장을 막는 데 가장 효과적 정치 체제라는 것이다.

 

<위에서의 시선><아래에서의 시선>은 민주제에 근거한 사회를 전제한 경우이다. <위에서의 시선>에는 민주주의의 집단적 실천에서 시민들의 역량에 대한 불만이 깔려 있다. 그 불만은 종종 한 사회의 민주주의 수준은 시민들의 수준에 의해 결정된다는 식으로 표현된다. <위에서의 시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마키아벨리적 시선이며, 두 번째는 당파적 시선이다. 르네상스 말기 이탈리아 피렌체의 부흥을 꿈꾸었던 마키아벨리(N. Machiavelli)의 여러 저술들을 살펴보면, 서로 어울릴 수 없는 극단적인 두 가지 형태의 정치 체제가 등장한다. 그 하나는 만인이 평등한 이상적 공화주의이며, 다른 하나는 독재를 허용하는 군주제이다. 마키아벨리는 공화주의 이상을 가졌던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이상적 공화주의는 당장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 이유는 사회 구성원들이 그 공화주의를 실천할 역량을 갖추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이상적 공화주의 정치 체제를 구축하려는 시도는 부작용만 낳을 것이라고 판단한 그는 현실적 공화주의를 채택했다. 마키아벨리의 현실적 공화주의란 일반 민중, 귀족들, 군주 세력 사이의 균형에 기반을 둔 것인데, 그는 당시 피렌체 사람들의 교육 수준을 고려할 때 현실적 공화주의가 실천 가능한 대안이라 판단했다. 사회 구성원들 다수의 수준을 고려해 이상적 상태에 다가가기 위한 현실적 대안을 택하는 것을 마키아벨리식 시선이라고 할 때, 그 시선은 오늘날 현실 정치라는 용어에 함축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실례로 동성 결혼에 원칙적으로 찬성하지만 지금의 사회적 통념에 비추어 볼 때 아직은 허용할 수 없다는 어느 정치가의 항변은 그러한 현실 정치를 반영한다. <위에서의 시선>의 두 번째는 당파적 시선이다. 특정 인물들로 구성된 정치가 집단이야말로 현 문제들을 해결하고 사회를 개선시킬 수 있는데, 유권자들은 상황 판단을 제대로 못한다. 그들의 투표 행위는 고치기 어려운 습관과 같다. 이러한 시각을 담은 당파적 시선은 실제 많은 직업 정치가들이 공유하고 있는 것이도 하다. 더 나아가 그들의 지지 세력의 연대감을 높여 주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위에서의 시선>이 정치 세력과 특정 시민들의 연대 속에서 기능하더라도, 그 시선은 우선적으로 직업 정치가들의 시선이다.

 

1960년대 중반 이후 정보기술의 발달과 함께 계층 간 정보 거래가 원활해지면서, 유권자들의 표를 의식할 수밖에 없는 직업 정치가들은 과거 정치가들과 달리 <위에서의 시선>을 표면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그 시선에 함축된 불만은 일반 시민들을 향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보화 사회에서는 특정 정치가에 대한 대중적 반감을 촉발시킬 수 있다. 대부분 직업 정치가들은 그러한 반감에 직접적으로 맞설 용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직업 정치가는 어떻게든 정치적 권력의 직접적 소유자가 되려고 하는 까닭에 <위에서의 시선>을 가질 수밖에 없다. 다만 그 시선의 불만을 표면화하지 않을 뿐이다. <위에서의 시선>에 함축된 불만은, 그것이 마키아벨리적이든 당파적이든, 엘리트적 시선에서 기인한 것이다. 특히 당파적 시선은 항상 민주주의 내에서 파시즘의 시각틀로 변질될 위험성을 안고 있다.

 

<아래에서의 시선>에 함축된 불만은 현 직업 정치가들의 지적 수순과 역량을 의심하는 태도에 근거한다. 현대 사회의 많은 문제들은 다양한 영역의 지식들의 거래 관계망에 근거해 해결 가능한 경우가 많은 반면, 그러한 거래 관계망을 고려한 정책을 실현 가능하도록 해 주는 체계를 구축한 곳은 사실상 없는 상황이다. 각종 정책의 실패는 일부 시민들로 하여금 직업 정치가들은 어떤 의미에서 엘리트들인가?’를 묻도록 만든다. 과연 현 정치가들은 문제 해결의 의지를 갖고나 있는 것일까? 과연 그들은 문제 해결에 필요한 전문 지식들이 무엇인지 알고나 있을까? 그들은 그러한 전문 지식들의 소유 집단과 자유롭게 소통할 태도를 갖고 있을까? 그들 주변의 전문가들, 실례로 폴리페서들은 오히려 문제 해결에 부적합한 인물들이 아닌가? 그들이 엘리트들이라면, 그 엘리트는 단지 정치적 권력 유지 및 확장에만 역량을 가진 그런 엘리트에 불과한 것 아닌가? 이러한 일련의 물음들은 <아래에서의 시선>이 현 직업 정치가 세력들에 대한 냉소주의 입장과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한 냉소주의 입장은 기존 정치가 집단들 혹은 정당들에 대한 불신임을 함축하기 때문에, 그 입장의 사회적 확장은 새로운 정치 세력의 출현이나 기존 정치 세력의 변화를 이끌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20세기 후반이 지나면서 <아래에서의 시선>의 불만을 가진 시민들이 여기에서나 저기에서나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직업 정치가들은 대부분 <위에서의 시선>에 함축된 불만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아래에서의 시선>에 함축된 불만에 대해서도 고민할까? 그 불만이 거리에서의 대규모 데모나 폭동 등으로 표출되는 경우에만 그들은 마지 못해 이러저러한 요구들을 수용하겠다고 말하곤 한다. 이는 <아래에서의 시선>과 관련된 불만들을 정치 영역의 공론장으로 흡수시킬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21세기 민주주의 정치 체제에 결여되어 있음을 반영해 준다. 다시 말해, 시민들의 불만을 정치적으로 공론화해 주는 제도적 체계가 21세기 민주제 사회에서도 없다는 것이다. 민주주의 역사를 살펴보면, <아래에서의 시선>을 말하고 정책 짜기에서 진지하게 고려한 직업 정치가는 사실상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까지 민주주의 역사에서 불만은 단지 직업 정치가들을 중심으로 한 권력층의 소유물이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세 가지 불만의 시선들 <비교의 시선>, <위에서의 시선>, <아래에서의 시선> <비교의 시선>, <위에서의 시선>을 명확히 언급한 직업 정치가들은 있다. 처칠(W. Churchill)은 그 중 한 명이다. 처칠이 생각한 민주주의는 무엇이었을까? 이 물음을 세 가지 불만의 시선들과 연관시켜 간략히 살펴보는 것은 지난 세기 민주주의의 흐름의 한 측면을 알게 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