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 에세이/진보의 시작

민주주의에 대한 불만의 시선들 2. 처칠의 민주주의

착한왕 이상하 2020. 3. 14. 00:00

처칠은 1874년에 태어나 미국에서 흑인 투표권이 보장된 1965년에 생을 마감했다. 처칠과 함께 따라다니는 수식어들로는 토리 민주주의자(Tory democrat)’, ‘점진주의자’, ‘의회 민주주의 옹호자’, ‘자유주의자’, ‘민주주의와 군주제 양립 가능성 옹호자등을 들 수 있다. 지금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러한 수식어들은 현재 민주주의 시각에서 처칠을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자유주의자또는 전통을 중시하는 보수주의자로 규정하도록 만든다. 개인 간 거래 활성화 장소로 시장을 가정하고 정부의 시장 개입 정도를 기준으로 자유 민주주의와 사회 민주주의를 구분하는 경우, 개인의 소유권을 사회적 분배보다 중요하게 여긴 처칠은 자유 민주주의자로 분류된다. 또 부의 불평등 해소에서 경제적 성장을 통한 재분배를 강조하는 진영을 우파, 사회적 분배를 강조하는 진영을 좌파로 구분할 때, 처칠은 일반적으로 우파 진영의 정치인으로 분류된다. 그런데 좌파에 진보를, 우파에 보수를 대응시키는 사고방식은 현시점의 관점일 뿐이다. 그것으로만 처칠의 정치적 성향을 평가하는 경우, 민주주의 발달 경로는 왜곡된다.

 

민주주의에 대한 처칠을 입장을 그의 시대에 초점을 맟추어 평가하는 경우, 그는 진보주의자, 보수주의자 양면성을 갖고 있으며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는 상황적 판단을 중시한 실용주의자 성격도 보였다(Quinault 2001). 민주주의에 대한 세 가지 불만의 시선들을 처칠의 일대기에 비추어 평가해 보려 할 때, 이 점을 먼저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정치가로서 처칠의 역할 모델은 아버지 랜돌프 처칠(R. Churchill)이었다. 입헌 군주제 틀 내에서 민주주의의 기능 가성을 모색한 토리 보수주의자 랜돌프 처칠은 당시 남성 위주의 문화적 전통을 중시했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처칠도 원래는 여성 투표권에 찬성하지 않았다. 그랬던 처칠은 1904년 자유주의의 열렬한 옹호자가 된다. 자유당에 입당한 처칠은 여성의 투표권을 지지했다. 자유주의는 신분 차이나 성별 차이로 인한 권리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입장이기 때문에 19세기 이후 20세기 초까지 영국에서 진보적 운동의 이념적 근거로 기능했다. 자유주의의 열렬한 옹호자로서 처칠은 또한 민주주의의 사회적 확산을 가로막는 원흉으로 상원의 세습제를 지적했다. 처칠은 민주주의 정치 체제란 자유주의에 대한 민중의 전폭적 지지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일정 나이 이상의 시민이라면 누구나 선거에서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는 민주제에서 모든 시민이 하나의 이념으로 동질화될 수 없다.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던 처칠은 전체주의를 막을 수 있는 민주제 형태로 의회 민주주의를 옹호했고, 의회 민주주의 틀 내에서 자유주의 수호자로 자청했다.

 

처칠은 1920년대 초 보수당으로 복귀했다. 1920년대에 들어서 보수당은 여성의 보편적 투표권을 인정하고 자유주의 이념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보수당의 이러한 변화로 인해 자유당의 입지는 대폭 축소되었다. 보편적 투표권의 정착이라는 자유주의의 역사적 임무가 어느 정도 완수되었다고 여긴 처칠은 보수당으로 복귀한 것이다(Rockow 1927). 당연히 자유당의 축소에 따른 그의 정치적 판단도 한몫을 했다. 처칠의 보수당 복귀를 통해 영국의 경우 1920년까지 자유주의는 진보를 상징했음을 알 수 있다. 보수를 자유 민주주의에, 그리고 진보를 사회 민주주의에 대응시키는 사고방식은 영국의 경우 보수당 대 노동당의 대립 구도가 굳어지기 시작한 1920년대 이후라고 평가할 수 있다. 정부가 시장에 적극 개입하여 부의 불평들을 해소해야 한다는 입장을 사회 민주주의가 대변한다면, 자유 민주주의는 시장에 대한 정부의 개입을 가급적 최소화함으로써 경제 성장이 가능하고 경제 성장을 통한 부의 재분배가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대변한다. 물론 자유 민주주의가 부의 불평들을 무조건 허용해야 한다는 입장은 아니다. 정부의 지나친 시장 개입은 오히려 경제 성장을 가로막아 장기적으로는 소유권을 비롯한 개인의 권리를 억압하게 될 것이라는 입장이다. 이러한 입장에는 어차피 개인들로 구성되는 정부의 한계를 인정하는 관점이 깔려 있다. 반면에 사회 민주주의 옹호 진영은 그러한 인정이 실제로는 부의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구실에 불과하다고 본다. 하지만 실제 정책 마련과 실행에서 어느 한쪽의 이념만 작동하기는 힘들며, 이념과 무관하게 해결 가능한 문제들도 많다. 특히 그런 문제들은 전문적 지식 활용과 관련되어 있는데, 종종 이념이 문제 해결을 가로막기도 한다. 더욱이 국가의 안전이 위협받는 위기 상황에서는 자유 민주주의나 사회 민주주의의 이념보다는 위기의 근본적 원인을 찾고 대처해 나가는 상황적 판단이 더 중요하다. 그러한 상황적 판단은 항상 국민 통합을 염두에 두기 마련인데, 전쟁이나 전염병 발발 등 안전을 최우선시 하는 경우 정부는 개인의 자유를 제한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2차 대전 중 수상으로서 처칠은 표면적으로는 자유 민주주의의 수호를, 특히 히틀러와 스탈린의 독재에 대항한 자유 민주주의의 수호를 전면에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국민 통합을 염두에 둔 상황적 판단을 우선시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첫 번째 불만의 시선인 <비교의 시선>과 과련하여 처칠은 민주주의를 전체주의와 비교한다. 1947년 의회 연설에서 처칠은 민주제 정부란 지금까지 시도된 모든 다른 것들을 제외한 가장 나쁜 형태(the worst form of Government except all those others that have been tried)’로 규정했다. 민주제 정부 외의 모든 다른 것들은 군주제나 권위주의적 독재 외에도 공산주의, 사회주의, 심지어 무국가주의(anarchism)를 망라한다. 공산주의, 사회주의, 무국가주의는 이념적으로는 민주주의와 마찬가지로 정치적 권력의 평등한 분배를 표방하고 있다. 의회 민주제를 진정한 민주주의의 정치 형태로 간주하는 처칠에게, 그것들은 정치 세력들 간 공정한 경쟁을 다수의 심판에 맞기지 않기 때문에 민주주의와 비교해 언제든지 쉽게 전체주의로 귀결될 수 있다. 처칠의 이러한 생각은 히틀러의 국가 사회주의의 득세와 함께 사회주의의 모든 형태에 대한 반감으로 굳어졌다. 당시 독일은 영국이나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민주제 정부 형태를 갖고 있었다. 히틀러의 집권으로 독일은 전체주의 국가로 후퇴했다. 이 때문에, 처칠은 영국에서 노동당의 득세를 경계했다. 하지만 노동당은 의회 민주제 정부 틀 내에서 사회적 분배를 좀 더 강조하는 소위 새로운 사회주의를 표방했기 때문에 히틀러의 국가 사회주의와는 다르다. 더욱이 다른 정치적 이념들과 아무런 거래 관계를 맺지 않는 순수한 의미에서의 민주주의란 현실 세계에서는 없다. 민주주의 정치 체제의 실험 과정에서 민주주의도 다른 정치적 이념들의 여러 요소들을 변형하고 수용하는 과정을 밟았다. 처칠 역시 이 점을 잘 알고 있었으며, 2차 대전 중 노동당 정치가들의 협력을 이끌어 내는 데 탁월했다.

 

2차 대전이 발발하자 노동당 정치가들이 당시 집권당인 보수당에서 대화가 가능한 인물로 처칠을 내세웠고, 이러한 노동당의 입장이 없었다면 처칠은 수상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처칠은 집권 동안 반대 세력에게도 권력 나누어 주는 것을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했다. 그 반대 세력은 그가 속한 보수당에도 해당한다. 처칠은 보수당의 결정에 무조건 따르는 식의 당파적 판단과 거리가 멀었던 인물이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보수당이 아니라 의회 민주주의 틀 내에서 자유주의를 수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두 번째 불만의 시선 <위에서의 시선>과 관련해 처칠 자신이 거리에 나가 유권자들과 5분만 얘기해 보면 민주주의가 정상적으로 기능하기 어려운 이유를 알 수 있다와 같은 표현을 사용한 증거는 없다. 처칠도 유권자의 표를 의식할 수밖에 없는 정치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에서의 시선>에 함축된 정치가들의 엘리트 의식은 처칠의 여러 의회 연설문에 등장한다. 처칠은 유권자들이 실질적인 정책 공약과 현실성 없는 인기 영합주의 정책 공약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고 한탄한다. 정책 구상과 실현의 측면에서 민주주의의 한계를 정치가들보다는 국민 수준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여기에는 처칠의 편향적인 시각이 깔려 있는데, 정책 구상과 실현, 위기시 대응에서 실효성 있는 지도력을 가진 정치가들이 항상 있지만 유권자들에게 외면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 정상적 기능은 그에 합당한 지도력을 가진 정치가들이 권력을 가질 때 가능하며, 그 가능성은 전적으로 국민 수준에 의존적이다. 처칠의 이러한 생각을 잘 보여 주는 사례는 아마도 인도의 독립과 민주화 역량에 대한 입장일 것이다. 1936년 미국의 루스벨트(F.D. Roosevelt)는 처칠에게 인도의 독립을 제안했지만, 처칠은 그 제안을 거부했다. 평균 교육, 경제력, 정치가들의 역량 등을 고려할 때 인도 국민은 아직 민주제를 시행할 수준이 아니라는 것이 그의 이유였다. 물론 여기에는 영국의 식민지들을 지키겠다는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다. 또 인도의 독립을 보장하면, 영국 내에서 정치적 역풍을 받았을 것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세 번째 불만의 시선 <아래에서의 시선>을 보면, 그것은 정치가 집단들의 정책적 무능만 질타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말만 공익을 내세울 뿐 그들은 당파적 관심에 따라 선택하고 행위하는 집단들에 불과하다는 불만도 깔려 있다. 복잡한 사회적 문제 해결에 필요한 지식들의 거래 관계를 무시하고 그런 문제마저 당파적 관심에 따라 정치적 이용 수단으로 삼는 경우, 자칫하면 권력에 관심을 가진 집단만 남고 실질적 정부는 없는 상황도 발생할 수 있다. <아래에서의 시선>에 대한 처칠의 구체적 입장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그 시선과 연관지어 볼 수 있는 것은 있다. 처칠은 경영인과 과학 기술인들로 구성된 하부 정부의 제도화를 제안했다(Churchill 1942). 세계 경제 대공황기를 겪은 그는 장기적 발전을 도모하는 경제 정책에는 경영인과 과학 기술인들의 의견 수렴과 도움이 필수적이라고 여겼다. 민주제의 한 정부는 선거에 기반을 둔 만큼 일정 기간을 지나면 다른 정부로 교체될 수밖에 없다. 제아무리 행정의 지속성이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다고 한들, 현실 정치에서 경제를 담당하는 행정부는 정부 권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장기적 경제 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하려면, 경영인과 과학 기술인들로 구성된 별도의 하부 정부가 필요하다는 것이 처칠의 입장이다. 실현되지 않은 처칠의 이러한 입장은 정치가들의 정책적 무능과 연관시켜 볼 수 있지만, 그 입장의 진의는 <아래에서의 시선>과는 거리가 있다. 처칠은 장기적 경제 정책 추진이 어려운 이유로 인기 영합주의에 편승한 저질 정치가들의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가는 국민 수준 탓을 들기 때문이다.

 

처칠 이후 <아래에서의 시선>을 솔직하게 수용하고 정치적 활동에 녹여낸 정치가가 있을까?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정치가들 중에는 내 눈에는 없다. 어떤 정책적 오류가 발생하면, 권력을 가진 대부분 정치가들은 <아래에서의 시선>의 민중적 불만을 분산시키거나 증오 대상을 만들어 세력 유지에 전력을 다한다. 이러한 현상은 21세기 현재 세계 각지에서 나타나고 있는 일반적 현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참고 문헌

Churchill(1942). “Parliamentary Government and Economic Problem” in Thoughts and Adventure. Macmillan.

Quinault, R.(2001). “Churchill and Democracy”. Transactions of the Royal Historical Society, Vol.11, pp.201-220.

Rockow, L.(1927). “The Political Ideas of Contemporary Tory Democracy”. The American Political Science Review, Vol.21, No.1, pp.1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