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 에세이/진보의 시작

세속화(Secularization)

착한왕 이상하 2010. 3. 31. 02:29

세속화

 

 

1.

‘세속화(secularization)’는 유럽의 사회가 ‘교회 세력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된 역사적 과정’을 뜻한다. 세속화의 이러한 일반적 의미를 받아들일 때, 세속화의 규정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 첫째, 사회 체계의 어떤 계층 및 분야가 특정 종교의 권위 혹은 이념에서 해방되어 그 자체의 고유성을 갖게 된 경우, 그 분야는 세속화된 것으로 간주된다.

 

• 둘째, 세속화는 종교의 종말 혹은 종교적인 것의 종말을 향해 나아가는 역사적 단계를 뜻한다.

 

세속화의 첫 번째 규정 방식은 실제 유럽의 세속화 과정에 바탕을 둔 것이라면, 두 번째 규정 방식은 그러한 역사적 과정을 빌미로 ‘특정 시대의 독자성’을 정당화하려는 입장에 바탕을 둔 것이다. 첫 번째 규정 방식에 따르면, 세속화의 대상은 특정 시대가 아니라 계층 및 분야이다. 각 계층 및 분야가 특정 종교의 권위 혹은 이념에서 해방된 경우, 그것은 사회에서 해당 종교와 대등한 위치를 갖게 된다. 이때 종교도 그러한 계층 및 분야와 관계를 맺는 사회의 기능 단위로 여겨지게 된다. 세속화된 계층 및 분야들의 관계망에 근거한 사회 체계의 변화는 새로운 계층 및 분야가 탄생하는 데 밑거름이 된다. 이러한 이유로 계층 분화에 따른 가치 체계의 다원화가 ‘세속화된 사회’의 특징으로 거론되게 된 것이다.

 

세속화의 첫 번째 규정 방식을 ‘세속화의 역사적 규정 방식’으로 부르자. 세속화의 역사적 규정 방식과 달리, 세속화의 두 번째 규정 방식에서 ‘세속화의 대상’은 특정 시대가 된다. 그 시대는 종교의 기능이 사라진 시대가 도래하는 데 필요한 역사적 단계로 여겨진다. 이때 ‘세속화된 사회 상태’는 종교의 기능이 사라진 미래 시대에 대비된 과거를 암흑기로 규정하는 데 필요조건이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세속화된 시대는 종교의 기능이 사라진 미래의 유토피아가 도래하기 위한 전 단계로서의 독자성을 확보하게 된다. 이 경우, 세속화 과정은 단순히 역사적으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다가올 미래에 대한 특정 철학적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다. 따라서 세속화의 두 번째 규정 방식은 ‘세속화의 철학적 규정 방식’으로 불릴 수 있다.

 

 

 

2.

세속화의 역사적 규정 방식과 철학적 규정 방식의 논리적 관계는 무엇일까? 세속화의 역사적 규정 방식은 실제 유럽의 세속화 과정에 바탕을 두고 계층 분화에 따른 사회 구조 변동을 설명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반면에 세속화의 철학적 규정 방식은 종교의 사회적 기능이 축소된 사회를 정당화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이때 전자의 목적은 후자의 목적을 전제하지 않지만, 이에 대한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따라서 세속화의 역사적 규정 방식과 철학적 규정 방식의 논리적 관계는 다음과 같다.

 

• 세속화의 역사적 규정 방식은 세속화의 철학적 규정 방식을 전제하지 않지만, 세속화의 철학적 규정 방식은 세속화의 역사적 규정 방식을 전제한다.

 

위 관계에 따르면, 세속화의 철학적 규정 방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여 세속화의 역사적 규정 방식도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다. 즉, 세속화의 철학적 규정 방식은 세속화 과정에 대한 지적 반응 혹은 지식인들의 한 입장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입장에 대한 비판이 세속화의 역사적 규정 방식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질 수 없으며, 또한 ‘세속화의 부정론’으로도 이어질 수 없다.

 

‘세속화의 부정론’은 세속화 과정이 실제로는 없었다거나, 세속화 개념이 현실적 문제의 진단에 무의미하다는 입장이다. 세속화의 부정론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비판 대상은 실제로는 세속화의 역사적 규정 방식이 아니라 세속화의 철학적 규정 방식이다. 따라서 세속화의 부정론을 옹호하는 입장이 세속화의 역사적 규정 방식을 부정할 수 없다. 또한 그러한 규정 방식에 따른 세속화 과정에 대한 긍정적 평가 방식도 부정할 수 없다. 세속화의 역사적 규정 방식은 그 철학적 규정 방식을 전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학적 담론을 바다에 비유할 때 세속화의 부정론이 수면 위로 떠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세속화 과정에 대한 하나의 지적 반응에 불과한 세속화의 철학적 규정 방식이 마치 실제 19세기 세속화 운동의 정신적 지주였던 것처럼 과대 포장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속화의 부정론에 대한 반박은 그렇게 과대 포장된 장막을 걷어낼 때 가능해진다.

 

종교가 시회의 지배적 이념으로 작동하는 경우, 종교는 사회 분화의 걸림돌이 된다. 세속화의 첫 번째 규정 방식은 이러한 역사적 교훈에 따른 것이다. 세속화의 철학적 규정 방식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세속화가 ‘종교의 무용지물론’을 전제하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이때 세속화에 대한 부정론은 역으로 강화될 수 있다. 유럽에서 벌어졌던 세속화 논쟁은 60년대 미국으로 건너가 본격화되었다. 자본주의 사회 체제 속에서 종교는 일종의 상품에, 그리고 종교 간 경쟁은 ‘종교 시장(religious market)’에 비유된다. 일부는 세속화의 부정론에 대한 증거로 종교 시장이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거론한다. 세속화 과정을 거친 이후 종교는 사라질 기색을 보이는커녕 오히려 하나의 시장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종교 시장의 팽창은 세속화의 철학적 규정 방식에 근거한 종교 종말론에 대한 비판의 논거로만 사용될 수 있다. 왜냐하면 세속화의 역사적 규정 방식은 세속화의 철학적 규정 방식을 전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종교 시장의 팽창은 종교가 사회의 지배적 이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종교 시장의 팽창은 단지 세속화의 철학적 규정 방식에 함축된 ‘지적 독단(intellectual dogma)’에 대한 비판 논거로 사용될 수 있다. 그 지적 독단이란 역사적 발달 과정의 보편적 유형을 가정하고. 종교 종말론을 정당화하기 위해 세속화를 그러한 유형에 가둬 버리는 관점이다.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세속화는 철학자들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무종교인들의 피맺힌 투쟁의 결과였다. 세속화의 철학적 규정 방식은 단지 세속화 과정에 대한 가능한 여러 지적 반응 중 하나였을 뿐이다.

 

 

 

3.

동일한 용어가 정치적 변동과 함께 시대별로 전혀 다른 의미를 획득하기도 한다. ‘세속화’라는 용어는 그 실례로서 손색이 없다. 세속화 'secularization'의 라틴어 어원인 ‘saeculum’은 ‘시기’ 혹은 ‘시대’를 뜻했다.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로 승인된 후, ‘세속화’는 한편으로는 ‘시대정신’, 또 한편으로는 ‘끝없는 세계’ 혹은 ‘영원함(saecula saeculorum)’을 뜻했다. 그러한 영원함을 뜻하는 ‘세속화’는 그레고리 찬가 곳곳에 등장한다. 이후, ‘세속화’는 ‘속세를 등진 삶’ 혹은 ‘금욕적인 생활’을 뜻했다. 성직자들의 수도원 생활은 그러한 ‘세속적 삶’을 대표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는 중세 초기까지만 하더라도, ‘세속적’이라는 것이 지금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해되고 있었음을 반영한다.

 

모든 이들이 진리와 종교성을 추구하는 삶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양상은 중세 교회 지도자들에게는 하나의 골칫거리였다. 모두에게 세속적인 삶을 강요하는 것은 교세 확장에 득이 되지 않는다. 교세 확장을 위해서라도 교회 지도자들에게는 어떤 특단이 필요했다. 그 결과, 종교적인 것은 ‘세속적인 것’과 ‘엄숙한 것’으로 나뉘게 된다. 일반인들에게 요구되는 종교적 귀의는 간략한 절차에 바탕을 둔 ‘단순한 서약(simple vows)’이라면, 성직자에게 요구되는 종교적 귀의는 ‘엄숙한 서약(solemn vows)’이었다. 일반인의 사소한 잘못은 고해성사만으로도 용서가 된다면, 이 점은 성직자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 종교적인 것이 세속적인 것과 엄숙한 것으로 분리되면서, ‘세속적인 것’은 ‘엄숙한 것’에 대비되어 이해되기 시작했다. ‘세속적 삶’은 더 이상 ‘속세를 등진 삶’ 혹은 ‘금욕적 삶’을 뜻하지 않게 된 것이다.

 

‘세속적 삶’은 중세를 거치면서 일반인에게 요구되는 ‘종교적 삶’을 뜻하게 되었다. ‘종교적인 것’이 ‘일반을 위한 세속적인 측면’과 ‘성직자를 위한 엄숙한 측면’으로 나뉘는 양상은 기독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러한 양상의 이면에는 종교 교리의 내용과는 별도로 교세 확장 및 유지라는 정치적 전략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특히 종교가 지배층의 권력 유지를 위한 이념적 토대로 작동할 때 일반인에게 요구되는 종교적 삶과 성직자에게 요구되는 엄숙한 삶의 구분은 정치적 차원에서 필요하다. ‘관세음보살’이라는 주문 하나만으로도 일반인이 해탈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는 원효(元曉, 617~686)의 주장 또한 그러한 정치적 차원에서 재음미해볼 수 있다.

 

‘세속화라는 것’을 ‘종교적이라는 것’에 대비하여 이해하기 시작한 출발점은 시민법(civil law)과 교회법(ecclesiastical law)이 분리된 시점이다. 시민법과 교회법의 분리는 교황의 절대 권력을 붕괴시킨 종교 개혁기 이후의 산물이다. 교황의 절대 권력이 붕괴되면서, 종교는 지역 군주의 권력을 옹호하기 위한 토대로 작동했다. 이는 교황의 세력이 유럽 각 지역 군주들과의 전쟁에서 패한 후 맺어진 웨스트팔리아 조약(Treaty of Westphalia)에 잘 나타나 있다. 그 조약의 핵심은 ‘통치자의 종교가 곧 국가의 종교다(cuis regio, eius regio)’라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종교는 당연히 기독교의 여러 분파 중 하나가 될 수박에 없었다. 교황의 권력이 각 지역의 군주들에게 분배됨으로써 지역 간 자유 무역이 확대되었고, 이로 인해 시민 계급, 곧 엄밀한 의미에서 그 당시 이동의 자유를 갖고 있는 계급이 확산되었다. 시민법과 교회법의 분리 시점은 시민 계급의 확산과 함께 군주의 권력이 약화되는 시점과 맞물려 있다. 따라서 세속화를 종교적인 것에 대비해 이해하는 방식은 17세기 이후의 양상으로 보는 것이 정당하다.

 

계몽주의는 18세기 유럽 전역을 휩쓴 사장이다. 개인의 개선과 교육 통해 사회를 개선시킬 수 있다는 계몽주의의 확산으로 인해 종교적 권위에 대한 도전하는 지식인들이 나타났다. 이들의 물음은 다음과 같다. 과연 종교가 도덕의 토대가 될 수 있는가? 개인의 합리적 능력만으로도 자연의 법칙을 알 수 있다면, 신을 가정하는 것이 필요한가? 이러한 물음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취했던 철학자들은 ‘세속적이라는 것’을 ‘종교적인 것’에 대비된 것이 아니라 반대된 것으로 여겼다. 급기야 ‘종교의 종말(end of religion)’을 선포하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영국의 자유사상가 토머스 울스톤(T. Woolston)은 종교의 종말 시점을 1900년으로 계산했다. 데카르트의 철학에서 종교적 색채를 탈색시킨 볼테르(Voltaire 1694∼1778)는 울스톤의 계산이 잘못되었음을 선포했다. 볼테르의 계산에 따르면, 유럽의 사회는 19세기 중반쯤에 이르러 완전히 세속화된다. 이때 볼테르의 세속화 개념은 단순히 ‘유신론 대한 무신론의 승리’가 아니라 ‘종교의 사회적 기능 상실’ 혹은 ‘종교적 권위의 사장’을 뜻한다. 이러한 사회의 세속화는 ‘사회의 지성화’ 혹은 ‘사회의 합리화’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그 의미의 현대적 규정 방식은 막스 베버(M. Weber)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20세기 세속화 논쟁의 상당 부분은 막스 베버의 관점을 둘러싸고 벌어졌다. 20세기 세속화 논쟁의 또 다른 축으로서 유대계 프랑스인 듀르크하임(E. Durkheim), 사회 체계론(system theory of society)의 대부인 미국의 탈콧 파슨스(T. Parsons)를 빼먹을 수 없다. 베버에게서 18세기적 계몽주의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면, 듀르크하임과 파슨스에게서는 19세기 사회 진화론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사회 진화론의 축은 ‘합리적 개인’이 아니라 ‘개인의 속성으로 환원 불가능한 집단’이다. 개별적인 대상 및 개인이 기능을 산출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들에 근거한 기능이 개별적인 대상 및 개인을 산출한다. 대상 및 개인의 관계에 근거한 집단의 성격을 파악할 수 없다면. 사회적 개선도 불가능하다. 듀르크하임과 파슨스에 따르면, 대상 및 개인의 관계 속에 내재한 기능은 대상 및 개인의 속성 차원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사회 진화론은 미래 지향적이며 목적론적인 진보 개념을 전제하고 있었다. 그러한 진보 개념은 세속화의 저항 속에서 종교를 지켜내려고 했던 낭만주의 및 관념론 계열의 학자들, 특히 셸링과 헤겔에서도 나타난다. 그들이 사회의 진보 혹은 집단적 계몽의 역사를 ‘생산적 자연’에 내재한 ‘신의 구현’으로 정당화하려고 시도했다면, 듀르크하임과 탈콧 파슨스는 그러한 시도에 반기를 들었던 인물들이다. 듀르크하임과 탈콧 파슨스는 진보의 정점은 종교의 종말과 함께 완성된다고 여겼다. 종교는 집단 결속력을 강화하기 위한 효과적인 수단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사회의 분화를 가로막아 결국 진보도 가로막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생각은 굳이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19세기 많은 자유사상가들에게서 발견된다.

 

 

 

4.

볼테르에서 파슨스에 이르기까지 세속화 개념은 세속화의 철학적 규정 방식에 근거한 것이다. 종교 종말론에 대한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 그들의 학문적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종교 종말론은 사회에서 종교의 권위 혹은 세력을 제어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이기도 했다. 따라서 그 누구도 세속화 과정이 미친 그들의 기여와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이를 인정한다고 하여 그들이 19세기 세속화 운동을 이끈 중심 세력이었다고는 주장할 수 없다. 어디까지나 그 중심 세력은 노동자 계층과 중산층으로 구성된 다수의 무종교인들이었기 때문이다. 무종교인들의 ‘세속화’ 개념은 종교 종말론을 전제하지 않는다. 무종교인들에 필요했던 것은 자신들의 의견이 사회에 반영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사회를 종교의 지배에서 해방시켜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종교적 교리의 진위 여부에 무관심한 무종교인들이 원하는 사회는 단순히 종교의 기능이 완전히 사라진 사회를 뜻하지 않는다. 그 사회에서는 종교도 하나의 기능 단위일 뿐이며, 무종교인들의 의견이 반영되고 권리가 보장받을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 과학의 분과 다양성의 뿌리는 19세기에 그 토대가 닦였다. 19세기에 이르러 과학과 기술의 결합에 바탕을 둔 산업의 사회적 확장이 가능해졌다. 이는 노동자 계층의 확산을 가져왔다.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종교 종말론에 대한 철학적 정당화와 무관하게 노동자 계층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실천가들이 나타났다. 그 중 한명으로 홀리오에크(G.J. Holyoake, 1817-1906)를 빼먹을 수 없다. 버밍햄 출신인 그를 놓고 어떤 학자들은 그에게서 19세기적 실증주의, 곧 초자연적인 상징체계를 실재에 투영시키는 종교적 이해 방식을 경멸하는 태도를 찾고 싶어 한다. 하지만 실제 그의 본모습은 ‘운동가 혹은 선동가 홀리오에크’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홀리오에크의 눈에는 제아무리 시민법과 교회법이 제도적으로 분리되었다고 하더라도 기독교는 여전히 귀족층의 유산이었다. 종교가 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노동자 계층의 해방, 곧 당시의 노동자 계층의 시민 계급화를 가로막는 걸림돌이었다. 노동자들과 연대한 그는 영국 기독교에 대한 비판 운동을 이끈 인물 중 하나였다. 그러한 비판 운동은 대학에서 성직자와 의무적인 종교 교육을 몰아내는 데 발판이 되었다. 홀리오에크는 종교가 사회의 지배적 이념으로 작동하는 것에 대해 저항하는 정신을 ‘세속주의(secularism)’로 명명했다. 그가 종교에 대항한 괘씸죄로 감옥을 들락거리면서 잡지 ‘The Reasoner’를 편집했다. 그가 편집한 잡지는 주당 5,000부의 평균 판매 기록을 세울 만큼 여러 계층의 주목을 받았다. 그 계층은 피지배층인 노동자에서 지식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이 사실은 종교 종말론의 철학적 혹은 이론적 토대와 무관하게 세속화에 대한 인식, 곧 종교가 사회 속에 기능하는 다양한 분야의 머리 위에 군림할 수 없다는 인식이 19세기 유럽 사회에 어느 정도 정착되었음을 보여준다. 종교 종말론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러한 인식을 가능하게 만든 시대의 독자성을 철학적으로 정당화하려는 이론적 노력에 불과하다.

 

홀리오에크는 그 자신을 사상가 혹은 이론가로 여기지 않았다. 그의 마지막 <한 운동가의 60여 년의 생애(Sixty Years of an Agitator's Life)>의 제목에서 보듯이, 그는 그 자신을 ‘현실의 문제를 대중에게 환기시키는 선동가’로 표현하고 있다. 노동자의 시민 계급화를 위해 당시 기독교를 비판하는 것은 그에게 절실했다. 그러한 비판이 선동적인 것일지라도 그에게는 목적 달성을 위한 의미있는 수단이었다. 하지만 홀리오에크는 종교의 권위에 대항한 운동을 ‘무신론 운동’이 아니라 ‘세속화 운동’으로 표현했다. 그의 목적은 기존의 종교를 무신론으로 대체시키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다수의 무종교인들로 구성된 사회 계층의 시민 계급화를 위해 사회를 종교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 덧글:

 

이 글은 이 땅의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이 글은 현재 완성 단계에 있는 약 500 쪽 분량의 원고 <세속화: 무종교인의 관점>의 마지막 부분을 쓰기 위해 유럽의 세속화 여정을 정리한 것이다. 따라서 이 글로 지금 개한민국의 현실을 바라보는 사람은 없었으면 한다.

 

원고가 완성되어도 출판사를 잡기는 힘들 것이다. 어차피 나의 글을 원하는 대중도, 개한민국의 출판사도 없다는 것은 스스로 잘 알고 있다. 또 책으로 내봤자 재야의, 학계의 뛰어난(?????????????) 분들의 그림자에 가릴 것이 뻔하다. 다만, 이런 작업을 했엇다는 흔적만 남긴다.

 

인문학, 인문학, 말들이 많다. 한 가지 명백한 것은 인문학은 자기 글로 자기가 속한 현실의 문제를 통찰력 있게 짚어낼 때에만 빛을 발하며, 결국 그 빛에 서쪽도 북쪽도 고개를 숙이게 되는 법이다. 지금의 현실을 볼 때 아무개가 제아무리 한류, 일류 국가를 외쳐봤자, 절대 개한민국은 빛을 발할 수 없다. 이곳은 학풍이라는 것이 없는 곳이다. 그나마 지금은 내가 가르치는 어린아이들에게서 약간의 희망을 본다. 적어도 이 아이들만큼은 대치동의 치맛바람 부모들의 아이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사고 능력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갖도록 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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