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 에세이/진보의 시작

진보의 시작: 그 목적과 성격

착한왕 이상하 2010. 8. 10. 07:54

진보의 시작

- 그 목적과 성격 -

 

 

현재 논의되는 정치적 이념들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논쟁의 산물들이다. 당시에는 ‘정치가 특정 상태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관점이 지배한 시대였다. 그 관점은 당시에 논쟁된 공산주의, 민주주의, 아나키즘 등에 공통된 신념과 같은 것이었다. 정보화 시대가 도래한 이후, 정치적 이념들을 사회에 대한 평가 기준이 아니라 평가 대상으로 삼는 학적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여기에는 정치 또한 과학, 기술, 교육 등과 함께 사회를 구성하는 하부 분야라는 관점이 깔려 있다.

 

경제 위기, 빈부 격차, 세계화 등을 둘러싼 논쟁에는 ‘정치가 특정 상태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과거의 관점과 ‘정치 또한 사회의 하부 분야에 불과하다’는 관점이 뒤섞여 있다. 각 정치적 이념이 제아무리 새로운 환경에 맞추어 진화했다고 해도, 전자의 관점을 일방적으로 옹호하기는 힘들어졌다. 지금 상황은 그러한 이념들이 생성된 시대의 상황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후자의 관점은 정치와 다른 분야의 관계, 그리고 그 관계를 바탕으로 한 사회의 역동성을 다루는 데에는 효과적이지만, 현실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장기적 대안을 제시하기에는 무기력하다. 왜냐하면 정치는 여전히 사회를 유지하고 특정 상태로 변화시키기 위한 중요한 동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 또한 사회의 하부 분야라는 관점 아래 현실 문제들을 냉철하게 진단하되, 이를 바탕으로 문제 해결을 위한 정치론을 구성해 볼 필요가 있다.

 

새로운 정치론이 필요한 이유는 과거 정치적 이념들에 함축된 ‘이상적인 인간형’이 지금의 현실에 부합한지를 따져볼 때 분명해진다. 과거 정치적 이념들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 각 정치적 이념에 함축된 ‘이상적인 인간형’은 자유, 정의, 평등이라는 사회적 목적이 구현된 상태를 정당화하기 위한 이론적 수단이자, 동시에 그러한 상태가 지향하는 인문적 목적이기도 하다.

 

위 구성 방식에서 ‘이상적인 인간형’, 실례로 ‘자율적 인간형’이 단순히 비현실적이라는 이유에서가 아니라, 현실 문제를 진단하는 데 명백한 한계를 보인다면, 이것은 그러한 인간형을 함축한 정치적 이념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동시에 구현되기 힘든 자유, 정의, 평등 중 무엇을 우선시하는가에 따라, 정치적 이념들에 대한 평가는 달라진다. 왜냐하면 그에 따라 각 정치적 이념이 전제하는 ‘이상적인 인간형’도 다르기 때문이다.

 

과거 정치적 이념들에 공통된 구성 방식에 주목할 때 자유, 정의, 평등이라는 사회적 목적도 일상적 공감대에 바탕을 둔 합의점이라기보다는 이론적 구성물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자유, 정의, 평등에 대해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규정 방식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것들이 합의 불가능할 정도로 이론적인 개념들은 아니다.

 

자유, 정의, 평등에 대한 일상적 욕구는 누구나 갖고 있는 것이라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그것들을 규정해 볼 필요가 있다. 발상의 전환은 ‘이상적인 인간형’을 전제하지 않고, 자유, 정의, 평등이 실현된 사회 상태를 짐작해 보는 것이다. 자유, 정의, 평등 모두 동시에 실현된 사회 상태는 갈등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사회 상태이기 때문에, 비현실적이다. 즉, 그러한 사회 상태는 인간 사회의 종말을 뜻한다. 하지만 그러한 사회 상태로부터 우리가 원하는 ‘이상적인 인간형’을 이끌어낼 수 있다.

 

• 우리가 원하는 ‘이상적인 인간형’은 무엇인가?

• 그러한 인간형을 인문적 목적으로 삼을 수 있는 정치론은 무엇인가?

• 그러한 정치론을 바탕으로 현재의 정치 체제를 진단하고 잠정적 대안을 찾아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위 물음들을 다루는 과업을 ‘진보의 시작’이라 부르자. 공부로 먹고 살 팔자는 아닌지라, ‘진보의 시작’이라는 과업을 실행에 옮길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하지만 그 과업을 언급한 이유는 블로그의 ‘진보의 시작’이라는 카테고리의 성격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이다.

 

첫째, 카테고리의 각 글은 과거 정치적 이념들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중요한 개념들을 정리한 것에 불과하다. 즉, 각 글은 가급적 나의 생각을 섞지 않고 사회 현상을 논하는 데 필요한 개념들을 소개하는 성격을 갖는다. 둘째 ‘진보의 시작’이라는 과업을 실행에 옮기는 경우, 실례로 원고로 구체화하는 경우, 논의에 필요한 개념들을 설명하는 데 본문을 할애하고 싶지 않다. 그러한 개념들에 대한 설명은 부록으로 덧붙일 것이며, 이를 위해 해당 카테고리에 논의를 위한 개념들을 정리하여 올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