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 에세이/자연철학

자연이라는 책 1~2. 역사 서술

착한왕 이상하 2010. 7. 18. 03:24

자연이라는 책

- The Book of Nature -

  

 

1.

르네상스 말기에 이르러 이교도(pagan)의 자연 철학, 즉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신학의 양립 가능성은 의심의 대상이 된다. 신학과 양립 가능한 새로운 자연 철학을 구성해야 한다는 동기는 ‘자연이라는 책(book of nature)’의 은유를 부활시켰다. ‘자연이라는 은유’의 저자는 신(God)이며, 인간은 그 책을 읽어낼 수 있는 능력, 즉 이성(reason)을 가진 존재이다. 과학은 ‘자연이라는 책’을 이성과 경험만으로 읽어낼 수 있다는 신념의 결과이다. 이러한 과학의 기원은 13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8세기에 이르러 과학은 그 자체의 고유성을 확보하게 된다. ‘자연이라는 책’을 읽어내는 과정이 기독교적 해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서, 과학은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따라서 과학의 형성 과정은 ‘기독교의 세속화(secularization of christianity)’에 해당한다. 즉, 과학은 일종의 ‘세속화된 종교(secularized religion)’라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과학을 한다는 것은 도덕적인 행위이기도 하다.

 

 

위의 언급은 역사학자 버터필드(H. Butterfield)의 ‘과학 혁명(Scientific revolution)’에 대한 서술 방식이다. ‘과학 혁명’이라는 담론 주제를 학적으로 정착시킨 인물은 그였다. 그런데 무엇인가 이상하다. 우리 귀에 익숙한 20세기 과학사가들에 따르면, 과학의 형성 과정 혹은 과학 혁명기는 16~17세기 혹은 15~18세기로 좁혀진다. 반면에 버터필드는 그 형성 과정을 13~18세기로 길게 잡기 때문이다.

 

버터필드는 전문 과학사가는 아니었다. 그의 설명 방식에는 많은 역사적 오류가 함축되어 있다. 더욱이 과학을 ‘세속화된 종교’의 일종으로 보는 버터필드의 입장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럼에도, 그에게서 배울 점은 있다. 객관성 및 진리 추구, 협동심, 공정한 경쟁, 탐구의 자유 등으로 대표되는 과학의 가치들은 과학적 탐구와 기능 속에 내재한다는 입장이다. 이를 알기 위해, 다음을 차례대로 살펴보자.

 

• 버터필드의 역사 서술 방식

• ‘자연이라는 책’의 다양한 의미, 그리고 ‘세속화된 종교’로서 과학을 규정하는 방식의 문제점

• 과학의 기능과 가치 체계

 

 

 

2.

우리 귀에 익숙한 20세기 전문 과학사가들, 실례로 코이레(A. Koyré), 헐(R. Hull, 쿤(T. Kuhn) 등은 과학이 탄생한 역사적 경로를 충실히 추적했다기보다는, 과학이 형성되기 시작한 시기 및 그 특징을 주로 다루었다. 아니면 과학 발달의 구조가 있다고 가정하고, 그 구조를 역사를 통해 찾는 데 열중했다. 과거 자료에 바탕을 둔 실증적 방법은 과학이 형성되기 시작한 시기의 특징들을 규정하는 데 동원되었다. 역사 서술의 목적은 19세기와는 다른 방식, 측 목적론적 진보 개념을 전제하지 않고 과학 발달의 구조를 찾는 것이었다. 버터필드의 역사 서술 방식은 이러한 두 경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과학이 형성되기 시작한 시기의 특징들은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해당 시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과거 전통의 개념들을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경우가 많다. 실례로 인간의 특별함을 이성에서 찾는 17세기의 사고방식은 13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합리적 판단은 추리 및 추상화 능력에 근거한다. 그러한 능력을 초자연적인 것이 아닌 인간 마음의 속성으로 규정한 인물은 아퀴나스였다. 과학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물질 개념의 기원은 더욱더 멀리 거슬러 올라간다. 특히 17세기 과학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은 지동설의 발견이다. 지동설을 받아들이면, 기독교와 이교도가 공존하기 위한 장치, 즉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신학의 양립 가능성은 더 이상 성립할 수 없게 된다.

 

이교도의 자연 철학과 신학의 양립 가능성에 대한 의심은 코페르니쿠스 이후에 생겨난 것이 아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예측력에서 프톨레마우스의 천문학을 능가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지동설이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이유는 ‘신학과 양립 가능한 새로운 자연 철학’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어느 정도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에, 버터필드는 근대 과학의 기원을 1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추적했던 것이다.

 

버터필드의 역사 서술 방식은 과학 발달의 보편적 구조를 규정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과학의 분과 다양성을 인식한 사람에게 그러한 구조는 사실 그 근거가 애매모호한 것일 수밖에 없다. 역사가 모든 과학 분과에 공통된 과학 발달 구조를 보여줄 것이라는 믿음은 역사적 탐구에 의해 뒷받침되기는 힘들다. 만약 그러한 믿음을 전제하고 역사적 탐구를 진행한다면, 그 믿음에 부합하는 사례들만 역사가의 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한 결과는 무의식적인 역사적 왜곡이다. 그 왜곡은 어느 인물 혹은 사건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과학의 초기 모습이 형성되고 현재 모습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왜곡이다. 과거의 인물 혹은 사건에 대한 왜곡은 기록과 유물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역사적 탐구에서 피하기 힘든 것이다. 반면에 과학이 형성되고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왜곡은 우선적으로 피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왜곡은 우리가 처한 현실마저도 왜곡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버터필드가 발견의 결과만 가지고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프톨레마우스의 천문학보다 올바른 것으로 평가한 것은 잘못이다. 이러한 잘못은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를 진단하는 ‘현시점주의(presentism)’의 오류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버터필드의 진정한 동기는 근대 및 현대의 독자성, 즉 과거 전통과는 구별되는 특징들을 살리는 동시에,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는 과정을 고찰하겠다는 것이다. 이 점은 현재 과학사가들이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과학 혁명기에 대한 버터필드의 서술 방식은 여러 오류에도 불구하고 앞선 측면이 있다.

 

버터필드는 과거 기록을 ‘역사의 현명한 사용’ 관점에서 재구성한 인물이다. 그는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과 문제를 진단할 목적으로 각 시기별 특징들을 규정하고, 그 기원을 추적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물리학과 화학의 형성 과정이 다르다는 점을 명백히 인식했다. 17세기 물리학의 관심사는 운동의 변화였다. 화학적 반응에 대한 당시 물리학의 설명 방식은 불충분할 수밖에 없었다. 화학은 근본적으로 원소들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학문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화학의 발전에 필수적인 각 원소의 분리는 18세기에 들어 와서야 본격화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버터필드는 과학의 형성기를 18세기까지 늘린 것이다.

 

버터필드는 ‘역사의 현명한 사용’ 관점에서 역사적 지식이 과학자에게 필요한 소양을 길러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이러한 믿음을 실현할 목적으로 ‘올바른 판단을 한 과학자’와 ‘그렇지 못한 과학자’를 비교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러한 비교 방법이야말로 과학의 형성 과정을 잘 보여주는 수사적 장치로 여겼기 때문이다. 버터필드의 많은 역사적 오류는 그러한 비교 방법에 기인한 것이다. 실제 발견은 발견의 결과만 가지고 평가할 수 없는 까닭에, 발견의 결과에서 차이를 보이는 두 과학자가 발견의 전 과정에 걸쳐 대조적 혹은 대립적 관계를 맺는 것은 아니다. 또한 대범한 가설의 검증 또는 반증 과정이 역사적이기 때문에, 지금 올바른 것으로 평가받는 이론이 가설 설정 당시에도 올바른 것으로 평가받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무만 보고 산 전체를 판단하지 말자. 많은 사소한 오류 때문에, 버터필드의 역사 서술 방식에 담긴 동기마저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버터필드의 역사 서술 방식에서 문제 삼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가 과학을 ‘세속화된 종교’의 일종으로 여긴다는 점이다. ‘이성’, ‘자연이라는 책’과 같은 개념은 기독교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러한 개념에서 기독교의 색채가 탈색되는 과정이 과학을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이를 받아들이면, 과학이 초기 모습을 갖추고 발전해 온 역사는 ‘기독교의 세속화’라는 단선적 경로를 밟은 것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버터필드에게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여전히 남는다. 그 교훈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과학을 ‘세속화된 종교’로 여기는 관점이 갖는 문제점을 ‘자연이라는 책’의 다양한 의미에 비추어 진단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