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 에세이/자연철학

자연이라는 책 4~7. Book or Magazine

착한왕 이상하 2010. 7. 18. 03:25

하나의 정합적인 형식의 책 또는 잡지 형식의 책

 

 

 

4.

과학이 기독교의 세속화라는 단선적 경로를 따라 형성되고 발달했다면, 과학의 중요 개념들은 기독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전제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전제는 통용될 수 없다. 단지 과학이 형성되는 과정에 미친 기독교의 역할은 고려해야 할 대상이다. 이때 그 역할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다. 과학이 기독교의 세속화라는 단선적 경로를 따라 형성되고 발달했다면, 다음과 같은 상반된 결론을 받아들여야 한다.

 

• 첫째, 과학이 신학적 해석에서 자유로워진 경우, 즉 세속화된 경우, 과학은 ‘종교성의 사장’을 상징할 수 있다. 종교성의 사장을 도덕적 가치의 상실로 여기는 사람에게 과학은 종교에 바탕을 두지 않고서는 건전하게 사회적으로 기능할 수 없다.

 

• 둘째, 과학이 신학적 해석에서 자유로워진 경우, 자유, 진리, 사랑 등으로 대표되는 기독교의 가치 체계는 과학으로 전이된다. 즉, 과학은 일종의 ‘세속화된 종교’이다. 과학자의 인격은 발견 과정에서 수양되며, 과학을 하는 것은 기독교에 뿌리를 둔 가치 체계를 체득하는 것이다.

 

모든 가치 체계가 인간관계에 근거한 공동체의 기능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때 첫 번째 결론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과학 공동체에 소속된 사람은 그 공동체가 기능하기 위해 지켜야 할 권고 사항을 체득해야 한다. 그러한 권고 사항들에 배어 있는 의미 체계를 가치 체계가 아니라고 한다면, 이 세상에 가치 체계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과학을 기독교의 세속화 과정의 결과로 보고 세속화된 종교로 규정한 두 번째 결론은 버터필드의 과학 혁명에 대한 서술 방식에 숨겨져 있다. 과학이 기독교의 세속화라는 단선적 경로를 따라 발달했다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 두 번째 결론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럼에도 두 번째 결론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있다. 그 교훈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과학을 기독교의 세속화 과정의 결과로 규정하는 방식의 문제점을 좀 더 파헤쳐볼 필요가 잇다. 왜냐하면 과학의 개념적 뿌리가 기독교에만 두고 있다는 입장만 반박했기 때문이다.

 

 

 

5.

과학의 발달로 인해 신학과 자연 철학의 양립 가능성은 위협을 받게 된다. 자연 철학의 탐구 대상, 즉 ‘자연이라는 책’은 과학과 신학을 매개해주는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과학이 더욱 발달하면서, 과학은 자연철학적 해석에서 해방된다. 이러한 ‘계몽주의적 역사 서술 방식’에 따르면, ‘자연이라는 책’에서 과학과 신학을 매개하는 기능을 박탈하게 만든 핵심은 ‘이성’ 개념이다. 자율적인 개인 개념이 확대되면서 이성과 경험만으로 자연을 탐구할 수 있다는 관점이, 그리고 자연 법칙을 신의 섭리보다는 신뢰할만한 지식의 가능성에 대한 조건과 연관시키는 관점이 정착했다. 과학의 형성과 발달 과정을 기독교의 세속화로 규정하는 것은 ‘계몽주의적 역사 서술 방식’에 따른 것이다. 과학의 형성과 발달 과정을 기독교의 세속화로 규정하는 경우, ‘자연이라는 책’, ‘이성’, ‘자연 법칙’이라는 개념들 모두 기독교에 뿌리를 둔 것으로, 그 개념들은 점차 신학적 해석 대상에서 해방된 것으로 간주된다.

 

이성을 심리적인 것 혹은 사변적인 것에 대립된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 과학적 발견 과정은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신비한 것’이 되어야 한다. 오로지 이성과 경험만으로 자연을 탐구할 수 있다는 주장은 실제 발견 과정보다는 발견의 결과물, 즉 특정 형식의 지식 체계인 이론들만 가지고 말한 것에 불과하다. 발견 과정에 다양한 세계 이해, 은유, 상상, 건너뛰기 방식의 사고의 모험이 개입한다는 사실은 과학의 고유성에 아무런 타격을 가하지 않는다. 그 고유성은 이론이라는 지식 체계의 논리적 구조에 종속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재확인 및 재생산 가능한 특정 측정량과 연결된 과학적 가설은 결코 그 측정량 자체에 함축된 사실이 아니다. 이 점은 해당 가설이 나중에 사실로 밝혀지는 경우에도 유효하다. 혈액이 순환한다는 사실은 한때 가설의 지위를 갖고 있었다. 그 가설의 설명 대상은 혈류, 맥박 수, 음식물의 섭취량 등의 측정량에 함축된 것이었다. 실례로 혈액의 주 기능을 더 이상 영양 공급으로 볼 수 없다는 단서들을 들 수 있다. 그러한 단서들을 설명할 목적으로 혈액 순환 가설이 생성된 과정에는 온갖 사고의 모험이 개입되어 있다. 하지만 측정량과 연결성을 갖는 것은 혈액 순환 가설이지, 결코 가설 생성에 개입된 은유나 세계 이해와 같은 것이 아니다. 따라서 발견 과정에 다양한 사고의 모험이 개입한다는 것, 그리고 발견의 결과인 가설 중심의 이론 체계가 다양한 해석에 열려 있다는 것 때문에, 특정 측정량과 경험적 가설 사이의 연결성을 추구하는 ‘과학적 생활양식’이 붕괴되거나 위협을 받는 것은 아니다.

 

과학적 발견의 결과물이 아니라 그 과정에 주목할 때 과학이 형성되고 발달한 경로는 ‘기독교적’이라는 그 근거가 애매모호한 중심축에서 멀어져온 것이 아니다. 과학적 발견 과정에 주목할 때 과학과 자연 철학 혹은 ‘자연이라는 책’, ‘자연이라는 책’과 신학 사이의 복잡하고 중축적인 상호 거래 관계의 역사에도 주목해야 한다. 이때 과학의 형성과 발달 경로를 관통하는 것은 기독교 교리도, 특정 ‘자연이라는 책’도 아닌 다음의 ‘측정 정신’이다.

 

• 측정 가능한 모든 것을 측정하라. 지금까지 측정할 수 없었던 것들을 측정 가능하도록 만들라.

 

위 측정 정신은 갈릴레이를 비롯한 16, 17세기 과학자와 자연 철학자들의 글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측정 정신은 15세기 독일의 성직자이자 철학자인 쿠사(N. Cusa)에게서 이미 엿볼 수 있다. 쿠사가 활동하던 15세기에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신학의 양립 가능성에 대한 의심이 확대된 시기였다. 신학과 양립 가능한 새로운 자연 철학은 경험적으로 신뢰할만한 지식에 근거해 건설되어야 한다. 쿠사를 비롯한 중세 말기 유명론자들은 이러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6.

측정은 양화(quantification)에 의존적이다. 도구와 실험 방법론의 발달로 인한 양화 가능한 영역이 확대되면서, 측정 대상의 영역도 확대되었다. 측정 대상의 영역이 확대되는 실천의 역사 속에서 새로운 발견들은 단지 특정 자연 철학을, 그리고 그러한 자연 철학에 함축된 ‘자연이라는 책’을 매개로 신 존재를 정당화해주는 수단으로 여겨질 수 없게 되었다. 새로운 발견들 자체가 과거 전통을 바탕으로 재구성된 새로운 자연철학들을 생성시킨 기반이었다. 이에 따라 다양한 ‘자연이라는 책’들이 나타났고, 또한 그 책들의 저자로 가정된 신 개념도 재해석되어야 했다. 이러한 까닭에, 창조주로 가정된 기독교의 신 개념도 다양할 수밖에 없었다. 창조와 창조주를 동일시하는 신 개념, 매순간마다 혹은 적절한 순간에 우주에 개입하는 신 개념, 모든 것이 본성에 따라 구현되도록 우주를 창조한 신 개념, 지적 설계자로서의 신 개념, 우주 스스로 진화하고 발달할 수 있는 가능성만 창조한 신 개념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과학은 신이 아닌 자연 자체가 ‘자연이라는 책’의 저자로 가정되는 문화 속에서도 무리 없이 작동한다.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측정에 근거해 경험적으로 신뢰할만한 지식 체계를 건설하려는 과학의 목적은 신학적 해석뿐만 아니라, 그 어떤 자연 철학 혹은 그 자연 철학에 함축된 ‘자연이라는 책’을 전제하지 않는다. 이 점은 신앙심이 깊은 맥스웰(J.C. Maxwell)을 비롯한 19세기 중엽 이후의 과학자들이 도달한 결론이었다.

 

맥스웰이 활동하던 시기는 17세기와는 많이 달랐다. 과학의 분과 다양성이 축적되었고, 이로 인해 생각해볼 수 있는 ‘자연이라는 책’의 종류도 늘어났다. 기계론에 함축된 ‘자연이라는 책’에 따르면, 과학의 측정 대상은 오로지 선형적으로 양화 가능한 속도, 시간, 크기, 무게 등이다. 이러한 것들을 측정한 것에 운동 변화의 법칙을 적용시켜 힘과 질량값을 구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누구의 과학적 지식 체계도 기계론과 완전히 정합적인 관계를 맺을 수는 없으며, 또한 힘과 질량의 의미를 논하는 경우에는 기계론 안에서도 여러 입장 차이가 나타난다. 만약 과학이 기계론에 함축된 ‘자연이라는 책’을, 그리고 그 책의 저자인 신의 섭리를 밝혀야 하는 분야라면, 모든 자연 현상은 운동 변화의 필연적 법칙만으로 설명 가능해야 한다. 하지만 이때에도 기계론이 반드시 신학과 양립 가능할 필요는 없다는 반론이 가능하다. 기계론의 세계 이해에 따른 과학은 단지 ‘어떻게’라는 물음에 국한된 운동 변화만을 다루므로, 운동의 초기 조건이 설정되는 방식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그러한 조건을 신의 섭리와 연관시키지 않는 경우, 기계론이 반드시 신 존재를 전제해야 하는 근거는 약화된다.

 

 

 

기계론에 과학을 종속시킨다면, 반응, 유기체의 발생과 성장과 같은 현상은 오로지 운동 변화로만 설명되어야 한다. 이때 물질의 활성은 없는 것이며, 질적 상태 변화의 비순환적 과정, 즉 자연의 역사는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된다. 이에 대한 의심은 기계론의 득세로 묻혀 있었던 목적론, 유기체론, 전일론, 상호작용론 등을 부활시켰다. 하지만 기계론은 선형적 양화 대상만을 다룰 수 있었던 시대를 정당화해주는 수단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반응을 다룰 수 있는 방법이 개발되면서, 물질의 활성을 양화할 수 있게 되면서, 그리고 집단의 평균 속성을 다룰 수 있게 되면서, 다양한 ‘자연이라는 책’들이 나타났다. 각 책마다 과학의 특정 이론과 연관될 수 있는 까닭에, 다양한 ‘자연이라는 책’들은 서로를 배제하는 관계를 맺지 않는다. 이를 잘 알고 있는 맥스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연이라는 책’으로 불린 것은 아마도 규칙적으로 구성되었을지 모른다. 정말 그렇다면, 의심의 여지없이 도입부는 이어질 전체 내용을 설명하는 부분일 것이다. 첫 번째 장에 명시된 방법들은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며, 진행될 부분들에서 예증의 목적으로 사용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자연이라는 책’이 (그러한 정합적인) 책이 아니라 잡지와 같은 것이라면, 단 한 부분이 나머지 모든 부분들을 밝혀준다고 기정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도 없다.”

 

맥스웰은 물질 없이는 활성도 존재할 수 없다는 ‘자연이라는 책’을 믿었다. 반면에 헬름홀츠(H. von Helmholtz)를 비롯한 독일의 실험가들은 에너지가 물질보다 우선한다는 ‘자연이라는 책’을 믿었다. 이들 중 누구의 책이 올바른 것인가? 측정을 근거로 얻어진 신뢰할만한 지식 체계인 과학에서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이끌어낼 수 없다. 그렇다고 ‘자연이라는 책’을 ‘알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한 칸트의 설명 방식이 문제의 해결책은 될 수 없다. 그 설명 방식에 따르면, 과학적 지식 체계는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마음의 조건으로부터 구성된 것이다. 과학적 지식 체계가 그렇게 구성되는 것이라면, 각각 그 고유한 설명 영역을 갖는 과학의 분과 다양성은 수수께끼로 남게 된다.

 

‘자연이라는 책’이 만약 하나의 정합적인 형식의 책이라면, 과학의 다양한 분과들 사이에는 위계질서가 성립해야 한다. 아니면 모든 분과들을 통합해주는 별도의 방법론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통합에 대한 열망은 독일과 오스트리아 지역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으며, 이에 대한 이유 중 하나로 당시의 정치적 분열 상황을 극복하려는 시대적 분위기가 거론되기도 한다. 그러나 과학의 모든 분과들이 하나로 통합된 적은 없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그들 사이의 관계였다. 서로 모순적인 관계를 맺는 두 분과들의 경우에도 하나로 통합된 적은 거의 없다. 모순의 해소가 통합으로 이어질 논리적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과학 공동체에서 통용되는 대부분의 분과들은 서로 양립 가능하다. 물리학의 보편 법칙들이 생물학이나 화학에서 사용된다고 해서, 유기체의 내부와 외부 환경을 구분해주는 방법, 진화의 역사와 원소들 사이의 반응성 등이 그러한 법칙들에 종속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자연이라는 책’은 ‘알 수 없는 것’이고, 과학의 목적이 경험을 구제하는 것이라면, 인간 경험을 다루는 분과가 통합의 기반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실례로 마흐(E. Mach)는 에너지와 같은 활성의 존재를 받아들였지만, 통합의 기반은 물리학이 아니라 생리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과학이 더욱 발달한다면’이라는 가정 아래 통합을 주장하는 것은 과학의 분과 다양성으로 인해 부정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실제 과학의 발달 과정은 그러한 오랜 통합의 꿈에 반하는 역사적 경로를 밟아 왔다.

 

 

 

 

7.

어떤 이는 과학의 특정 이론을 가지고 이러이러한 ‘자연이라는 책’이 옳다고 주장한다. 어떤 이는 동일한 이론을 가지고 전혀 다른 ‘자연이라는 책’이 옳다고 주장한다. 어떤 이는 과학이 경험을 통합적으로 설명하려는 지식 체계에 불과하기 때문에 ‘자연이라는 책’은 ‘알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떤 이는 그렇기 때문에 ‘자연이라는 책’은 불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떤 이는 ‘자연이라는 책’은 하나의 정합적인 형식의 책이라고 주장한다. 어떤 이는 ‘자연이라는 책’은 잡지 형식의 책이라고 주장한다.

 

위 입장들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과학이란 경험적 증거를 바탕으로 얻어진 신뢰할만한 지식 체계라는 점에 대해서는 모두가 동의할 수 있다. 가설을 생성하는 과정에 다양한 은유, 세계 이해, 자연철학적 입장 등이 개입한다고 해서, 그 가설을 지탱해주는 재확인 및 재생산 가능한 측정량이 그러한 은유, 세계 이해, 자연철학적 입장에 대한 증거는 아니다. 특정 측정량에 함축된 사실을 설명해주는 과학적 가설은 그 측정량을 산출시키는 조건들이 가능한 이류를 밝혀주는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서로 상이한 ‘자연이라는 책’을 가진 두 사람이 특정 측정량을 근거로 동일한 가설을 발견한 사례는 많다. 심지어 ‘자연이라는 책’을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도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자연이라는 책’에서 발견의 영감을 얻는다. 과학은 더 이상 ‘자연이라는 책’을 얻기 위한 도구로 여겨질 수 없으며, 따라서 ‘자연이라는 책’을 매개로 그 책의 저자가 무엇인지를 규명해주는 ‘신학의 노예’로 여겨질 수 없다. 이 점은 맥스웰을 비롯한 19세기 중엽 이후 다수 과학자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줄 수 있는 구심점이었다. 과학 공동체를 구성하는 인물의 종교적 성향이나 세계 이해와 같은 것은 더 이상 과학의 기능을 구심점이 될 수 없다. 이러한 과학의 성격은 종교가 문화 통합의 원리가 될 수 없게 된 세속화 과정의 산물이며, 그 세속화 과정을 ‘기독교의 세속화’로 규정하는 것은 과학이 형성되고 발달한 복잡한 경로를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오류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과학의 형성과 발달 과정을 ‘기독교의 세속화’로 규정한 버터필드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바로 과학자는 과학을 하는 것에서 인격 수양이 가능하다는 관점이다. 이를 확대 해석한다면, 자신의 분야에 열정적인 인물은 해당 분야의 역사에 관심을 갖고 행위하는 가운데 도덕적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분야의 가치 체계는 그가 아니라 역사라는 여과기를 통해 걸러진 것인 만큼, 그 가치 체계에는 우리에게 필요한 미덕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과학자는 과학을 하는 것에서 인격 수양이 가능하다는 교훈은 과학을 ‘세속화된 종교’의 일종으로 보는 입장과 무관하게 성립한다. 하지만 대중 매체가 발전하고, 정치적 압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교육 기관에 지식이 종속되게 된 20세기 이후에 들어와 그 교훈은 ‘망각의 강’에 빠질 위기에 처했다. 특히 과학 발달 과정의 직접적 연장선에 서있지 않은 이 땅의 경우, 검증되지 않은 온갖 대중서의 남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사대주의에 길들여진 사고방식, 과학에 기생하는 온갖 이념 세력들로 인해 대부분 사람들은 그 교훈이 있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이러한 세태에서 우리 현실을 둘러싼 문제의 원인을 제대로 진단하고 상황에 합당한 해결책을 찾는 것은 어렵다.

 

다른 지역 사람들이 이 땅을 진정으로 존중하고, 이 땅에서 무엇인가 얻기를 바라는가? 이 물음에 동의하는 사람은 ‘역사의 현명한 사용’이라는 관점에서 현실 문제를 진단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그러한 사람을 위해, 지금까지 논의를 통해 부정한 입장, 즉 과학의 형성과 발달 과정을 기독교의 세속화로 규정한 입장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을 분석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