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 에세이/자연철학

자연이라는 책 3. 생각보다 순수하지 않은 책

착한왕 이상하 2010. 7. 18. 03:25

생각보다 순수하지 않은 책

 

 

3.

신학과 양립 가능한 자연 철학을 구성해야 한다는 시대적 과업은 지동설이 정착하면서 본격화되었다. 신이 ‘자연이라는 책’의 저자라면, 인간은 그 책을 읽어낼 수 있는 능력, 즉 이성을 가진 존재이다. 이때 ‘자연 철학’은 ‘자연이라는 책의 구성 방식에 대한 어떤 관점’을 뜻한다. 과학의 초기 모습을 탄생시킨 기계론의 세계 이해를 살펴보자.

 

기계론의 세계 이해에 따르면, 자연 현상은 물질의 운동 변화로만 설명 가능한 것으로 가정된다. 그러한 운동 변화는 무작위적인 것이 아니라 합법칙적이다. 운동 변화와 관련된 보편 법칙은 신에 원천을 두고 있으며, 인간은 경험과 이성을 바탕으로 그러한 법칙을 발견하여 미래를 예측하고 자연을 이용할 수 있는 존재로 규정된다. 따라서 기계론에 함축된 ‘자연이라는 책’의 첫 장은 물질의 운동 변화와 관련된 법칙들로, 그리고 나머지 장들은 법칙에 따라 항성, 지구, 육체가 형성되는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계론의 세계 이해에 함축된 신 개념은 ‘설계자’로 대표된다. ‘기독교의 세속화’ 관점에 따르면, 과학은 그러한 신 개념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설계자로서의 신 개념만이 기독교의 유일한 신 개념은 아니다. 더욱이 법칙에 따른 자연의 질서 개념도 기독교에만 뿌리를 둔 것이 아니다. 기계론에 함축된 ‘자연이라는 책’의 저자로 가정된 신 개념은 중세의 신 개념과는 다르다. 중세에는 ‘자연은 신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이 때문에, 중세의 이성 개념도 17세기와는 달랐다. 중세 시절 ‘이성’은 ‘자연에서 신의 설계 방식을 읽어내는 능력’이 아니라, ‘상황에 합당한 판단 능력’을 뜻했다. 물론 자연의 질서와 신의 섭리를 연관시키고, 그 섭리를 읽어낼 수 있는 존재로 인간을 가정한 경우도 있었지만, 그러한 경우는 대세는 아니었다. 따라서 기계론의 신 개념은 신학과 양립 가능한 새로운 자연 철학을 찾는 과정에서 재구성된 것, 즉 새로운 담론 주제에 맞추어 구성된 것이다.

 

‘자연이라는 책’을 읽어낼 수 있는 능력으로 가정된 이성 개념도 오로지 기독교에 뿌리를 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기계론이라는 전체 맥락 속에서 물질 등 다른 개념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기계론의 물질 개념은 물질의 기본 단위이자 운동의 기본 단위가 있다는 원자론에 빚지고 있다. 원자론 전통에 따르면, 운동은 무작위적이다. 원자론은 자연과 인간 모두에게 공통된 규범으로 가정된 자연의 질서, 즉 ‘코스모스(cosmos)’를 부정하는 입장이다. 기계론은 원자론에서 부정된 코스모스 개념을 다시 도입하되, 물질의 기본 단위가 있다는 원자론의 입장을 수용한 세계 이해의 방식이다. 자연 현상을 설명하는 데 원자의 모양과 크기는 불필요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 결과 자연 현상은 오로지 물질의 운동 변화만으로 설명 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때 신의 섭리를 반영하는 코스모스는 인간 행위나 도덕의 규범으로 규정되지 않았다. 그렇게 여기는 것은 자연 법칙을 찾고 자연을 이용할 수 있는 인간 개념과는 어울릴 수 없기 때문이다. 행위나 도덕의 규범은 자연 법칙을 찾고 자연을 이용할 수 있는 ‘인간만의 특별함’에 있다. 그러한 특별함을 정당화하려면, 물질과는 또 다른 실체로서 마음을 규정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기계론의 세계 이해는 기독교에만 뿌리를 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그것은 신학과 양립 가능한 자연 철학을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생성된 것이며, 이때 신 개념도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기계론의 세계 이해를 가능하도록 만든 정치적, 물질적 조건들을 고려하는 경우, 그 세계 이해 방식에 대한 평가는 달라진다. 기계론의 세계 이해를 생성시킨 계기는 결코 신학과 양립 가능한 새로운 자연 철학이 필요하다는 시대적 인식에 그치지 않는다. 그 세계 이해는 속도, 무게, 크기 등의 ‘선형적 양화’만을 실험적으로 다룰 수 있었던 시대의 독자성을 정당화해주는 수단이기도 했다. 이 덕에 17세기 과학은 오히려 자체 설명 영역과 방식을 어느 정도 명확히 할 수 있었다.

 

근대 과학의 형성기로 회자되는 17세기는 기계론의 세계 이해 방식이 대세가 되는 시기였다. 그 시기에만 국한하는 경우에도, 기계론의 세계 이해 방식이 기독교에만 뿌리를 두고 있다는 주장은 성립할 수 없다. 그 세계 이해 방식은 기독교, 그리고 기독교와는 다른 전통이 시대적 조류에 맞추어 재구성 혹은 합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선형적 양화만을 실험적으로 다룰 수 있었던 시대의 한계를 정당화해주는 수단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를 받아들일 때 과학이 ‘기독교의 세속화’ 과정이라는 단선적 경로를 따라 그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는 입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한 입장은 과학의 뿌리가 기독교적일 때 성립하기 때문이다.

 

근대 과학의 형성 과정에서 기독교의 영향을 배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로부터 기독교가 과학의 필연적 기원이라는 결론은 이끌어낼 수 없다. 또한 근대 과학의 형성에 영향을 미친 ‘자연과 신의 관계’, ‘인간과 신의 관계’에 대한 관점은 기독교 전통에만 기인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기독교를 중심으로 근대 과학의 형성 과정을 논하는 경우에도, 기계론에 함축된 ‘자연이라는 책’은 순수한 의미에서의 기독교적이라 할 수 없다.

 

만약 기계론의 세계 이해에서 기독교적인 것이라고 거론되는 것들을 제거한다고 해보자. 설계자로서의 신 개념, 그 설계도 혹은 법칙에 따른 운동의 변화, 그리고 ‘자연이라는 책’을 읽어낼 수 있는 이성 개념을 제거한다면, 남는 것은 원자들의 운동밖에 없다. 기독교적인 것이라고 거론되는 것들은 그러한 운동을 우연적인 것 혹은 무작위적인 것으로 간주할 수 없도록 해주는 개념적 장치들이다. 기계론의 세계 이해에서 기독교적인 것이라고 거론되는 것들을 제거하는 경우, ‘자연이라는 책’은 원자들의 무작위적인 운동으로 구성되며, 인간의 눈에 나타나는 질서는 실재가 아니라 우연에 의한 현상일 뿐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의 결과가 과학은 아니다. 더욱이 그 사고방식은 반기독교적이라고 여겨진 것이었다. 이는 근대 과학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던 세계 이해를 일방적으로 어떤 종교나 고대 전통과 연관시킬 수 없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