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우주가 천상계와 지상계로 이분되어 있다는 관점에 결정적 타격을 가한 사건으로 거론된다.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으로 묘사되는 이 사건은 과거 전통이 붕괴되고 갑작스럽게 생겨난 것이 아니다. 코페르니쿠스 천문학과 어울릴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 철학이 신학과 양립 가능하기 힘들다는 의심은 14세기에 본격화된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수정하거나, 신학과 양립 가능한 새로운 자연 철학을 찾는 시도에서 여러 신 개념이 나타났다. 이러한 과정에서 생겨난 여러 입장들은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이 기계론적 세계 이해 방식으로 이어지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그러한 입장 중 하나로 ‘임페투스 역학’을 들 수 있다. (임페투스 역학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http://blog.daum.net/goodking/224) 임페투스 역학이 그러한 입장 중 하나라는 것은 기계론적 세계 이해 방식의 생성 과정이 복잡하다는 사실을 반영해 준다. 기계론적 세계 이해 방식에서도 운동 변화의 원인, 변화 중 보존양 등의 구체적 주제들과 관련하여 여러 입장 차이가 나타난다. 따라서 그 세계 이해 방식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쉬운 작업이 아니다. 하지만 기계론적 세계 이해의 핵심만 알려고 하는 경우, ‘시계와 시계공의 은유’를 살펴보는 것만으로 족하다. 시계와 시계공의 은유를 확대 해석해서는 안 된다. 즉, 그 은유를 ‘과학을 탄생시킨 결정적 계기’처럼 확대 해석해서는 안 된다. 또한 시계와 시계공의 은유에 함축된 신 개념을 기독교 교리에 부합하는 유일한 신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다만 시계와 시계공의 은유가 서양 사상사의 한 줄기인 기계론을 상징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를 유념하고 다음 에세이를 읽어주길 바란다.
갈릴레오 갈릴레이
시계와 시계공의 은유
자연을 거대한 시계에, 그리고 신을 시계공에 유비시키는 사고방식이 ‘시계와 시계공의 은유’이다. 이러한 은유에 따르면, 인간 마음은 자연의 산물이 아니다. 시계는 시계공이 설계한 방식에 따라 오차 없이 움직인다. 자연을 그러한 시계에 유비시키는 경우, 스스로 삶을 결정하고 개척해 나가는 인간을 시계의 부속품처럼 취급하기 힘들어진다. 이때 인간은 거대한 시계와 같은 자연의 일부이지만 자연의 다른 부분들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는 ‘특별함’을 갖는다. 그 특별함은 인간만이 자연에 담긴 신의 섭리, 곧 자연 법칙을 알 수 있고, 자연을 이용하는 존재라는 데 있다. 따라서 시계와 시계공의 은유는 기계를 만들고 주변 환경을 개선시키는 인간의 모습을 신 개념에 투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글 보기 -> https://blog.naver.com/goodking_ct/222105326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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