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 에세이/역사의 단편들

J. 니덤의 딜레마

착한왕 이상하 2016. 11. 8. 18:36

J. 니덤의 딜레마

 

 

1.

니덤(J. Needham)은 <중국 과학과 문명(Science and Civilization in China, Cambridge University, 1954~)> 3448쪽에서 ‘17세기 과학 형성기를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의 근대적인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17세기 과학은 유럽적 과학혹은 서구적 과학을 뜻하지 않는다. 17세기의 과학 혁명기가 보편적인 세계 과학’, 고대와 중세 과학에 대비된 근대 과학을 태동시켰다는 사실은 명백하기 때문이다. 고대와 중세 과학에는 민족적 인상(image)’들이 배어 있다. 고대인과 중세인들의 이론은 특정 지역에 국한된 문화적 뿌리를 갖고 있었다. 그들의 이론에서 표상의 보편적인 방법이라는 것은 찾아 볼 수 없다. 발견 그 자체에 고유한 방법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과학의 이론들은 수학적 방법에 근거한 보편성을 가정하게 되었다. 과학의 이론에 대한 이러한 근대적 가정은 모든 인류를 밝혀주는 빛과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니덤의 문구를 볼 때마다 그가 다른 문화에 대해 진정한 관심을 가졌었는지 의심이 든다. 그 문구에서 과학의 보편성으로 치장된 유럽 중심적 사관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생물학자로서의 니덤은 수학적 과학을 과학의 표본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이론 물리학과 달리 생물학에서 수학의 쓰임새는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니덤은 문화와 무관한 보편성을 과학적인 것을 규정해 주는 이념으로 묘사하고 있다. 니덤은 그러한 이념이야말로 근대를 규정해주는 특징이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전근대적 과학근대적 과학을 나누는 기준은 과학적 지식의 보편성이라는 이념이었다. 더욱이 니덤은 그러한 보편성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과는 무관한 수학적 방법에 근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니덤은 더 나아가 근대 과학의 탄생이 유럽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 사건처럼 주장한다. 따라서 그는 과학이 인류 전체의 소유물이 되기 위한 필연적 사건으로서 17세기 과학 혁명기를 확대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과학은 인류 전체를 위한 것이라는 니덤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딜레마를 발생시킴을 보게 될 것이다.

 

인류 전체를 위한 과학은 보편성의 이념을 추구하는 유럽 근대의 산물이다. 결국 인류 전체를 위한 과학은 유럽의 근대적인 것을 전 세계로 확대시킨 것에 불과하다. 이때 니덤의 진의와 무관하게 과학은 서구적인 것서구적이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어버린다. 따라서 과학의 결과물은 인류 전체를 위한 것일 수 있어도, 과학의 담론만큼은 서구적인 것을 기준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2.

서양사를 면밀히 살펴보면, ‘17세기 과학 혁명개념은 근대의 독자성을 확보하기 위해, 즉 중세를 암흑기로 규정하려고 가공된 개념임을 알 수 있다. 17세기 과학 혁명의 출발점을 르네상스 말기로 끌고 올라갈 때 코페르니쿠스가 언급되곤 한다. 그의 <천구의 회전> 못지않게 당시에는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Andreas Vesalius)의 <인간 신체의 짜임새(On the Fabric of the Human Body)> 또한 유럽 지성사에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두 저서 모두 1543년에 출간되었다. 두 저서는 서로 다른 분야를 다루고 있지만, 그 서술 방식에서는 공통점을 보인다. 그 공통점은 첫 원리를 근거로 확실한 예측을 보증하는 이상화된 지식체계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르네상스 말기 이후 17세기 학자들이 과학적 지식의 보편성이라는 이념을 지향했다고 하여, 그 보편성이 니덤의 말대로 항상 수학적 방법론에 근거한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생물학의 배경이 된 세계 이해 방식은 17세기 물리학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이 아니었다. 기계론의 득세에 의해 물질의 운동 변화만으로 생리적 현상을 설명하려는 노력이 강세였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점은 기계론과는 다른 방식의 세계 이해 방식의 사장을 뜻하지 않는다.

 

보일(R. Boyle)은 생명을 담당하는 입자로 질소를 가정했다. 그에게 공기는 질소를 전달시키기 위한 탄성적인 매질에 불과했다. 그러나 보일 역시 외부에서 흘러들어온 질소 입자의 운동만으로 호흡 기제를 설명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잠정적 입장을 취했다. 당시 과학과 기술의 수준에서 호흡 기제를 설명하는 데에는 생체 해부가 필요했다. 동물들의 비명을 견디지 못한 보일은 생체 해부 실험을 그만둔다. 보일의 생체 해부 실험을 이어받은 과학자는 로어(R. Lower)였다. 로어는 정맥류과 동맥류의 색 차이가 폐에서 일어남을 실험적으로 규명할 수 있었다. 그 결과, 폐의 역할을 무시하고서 호흡 기제를 설명할 수 없음이 밝혀진 것이다. 로어는 공기 중에 영()이 있다는 갈레노스의 전통을 무시하지 않았다. 그는 유기체의 생명력이 질소에 담겨 있다고 주장했다.

 

보일이 생명 현상을 입자의 운동으로 설명하려는 기계론적 환원론의 입장을 취했다면, 로어는 갈레노스의 입장에서 생명 현상을 공기의 영으로 설명하려는 환원론의 입장을 취했던 것이다. 둘 다 현상을 설명하는 방식에서 환원론적 입장을 취했지만, 그 둘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은 달랐다. 생물학사에서 환원론에 대비된 입장은 유기체에 내재하는 어떤 원리 혹은 힘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대표적으로 혈액 순환설을 발견한 하비(W. Harvey)의 생기론을 들 수 있다. 이를 통해 생기론이 기계론의 득세와 함께 바로 사장된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과거 전통의 입장이 부활하게 되는 데자뷰 효과는 과학사에서 자주 발견된다. 대세에 밀렸던 입장이 기존 패러다임의 한계와 함께 다시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19세기 생기론의 부활을 그 대표적인 실례로 들 수 있다. 생기론은 알려진 법칙만으로도 유기체의 내부와 외부를 구분하고, 유기체의 고유성을 다룰 수 있게 된 20세기에 이르러 사장되게 된다. 과학 발달 과정은 여러 패러다임이 실타래처럼 뒤얽힌 관계의 역사를 보여 준다. 그것은 결코 각 시기를 지배한 패러다임 전환(conversion)’에 의해 충분히 설명될 수 없다.

 

우리가 생물학의 발달 역사에만 주목해도, 근대적 과학의 출현이 수학적 방법론에 근거한 보편성’, 수학적 보편성을 전제한다는 니덤의 주장은 통용될 수 없다. 과학의 발달 과정에서 17세기가 중요한 이유는 다른 데 있다. 그것은 특정 조건 아래 재생산 가능한 실험이라는 맥락 속에서 가설을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따라서 과학이 추구하는 보편성은 수학적 보편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 조건 아래 반복 가능한 과학적 지식의 성격에 있는 것이다. 그러한 지식을 얻기 위해 특정 과학자가 기대는 세계 이해 방식은 다양하다. 이는 보일과 로어의 비교만으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3.

이제 과학이 수학적 보편성에 근거한다는 니덤의 주장을 다음처럼 약화시키자.

 

특정 조건 아래 반복적으로 사용 가능한 과학적 지식 체계의 이상은 수학적 보편성을 추구한 근대의 산물이다.

    

니덤의 주장을 이렇게 약화시켜도, 여기에 대해 적어도 두 가지 비판을 할 수 있다. 첫 번째 비판은 과학의 발달에 대한 니덤의 결정론적 역사 관점과 관계된다. 니덤에 따르면, ‘보편성의 이념이 역사적으로 마련되지 않고서는 과학은 형성될 수 없다. 여기에는 모든 사람과 민족을 위한 과학이라는 그의 이상이 깔려 있다. ‘모든 사람과 민족을 위한 과학이라는 니덤의 이상에 대해서는 나 또한 동의한다. 하지만 과거 과학의 발달 여정을 결정론적 역사 관점에 종속시켜야만 하는 역사적 근거는 없다. 니덤이 생각하는 역사는 다음과 같다.

 

수학적 보편성을 추구하는 과학이 유럽 근대에 출현한 이후, 과학은 기술과 결합하여 자본주의를 촉진시켰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부작용 대한 반성과 함께 과학을 만인을 위한 것으로 이해하는 시대가 올 것이다.

 

이러한 시나리오를 필연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까지는 좋다. 그러한 필연성에 과학이 종속된다면, ‘모든 민족과 국가를 위한 과학이라는 니덤의 이상은 약화된다. 그가 서술한 방식의 역사적 시나리오를 밟지 않는 곳에서는 과학이 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학을 둘러싼 담론에서 니덤의 입장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되는가? 근대적 과학의 출현은 그의 진의와 무관하게 서구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작동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만든 빵을 너희들에게 나누어 주노라. 빵은 모두에게 이로운 것이기 때문이다.

 

과학을 빵에 비유할 때 위 주장을 부정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빵이 반드시 유럽 혹은 서구의 산물인가? 이 물음을 바꾸어 보면 다음과 같다.

 

유럽적인 것 혹은 서구적인 것을 대표하는 어떤 세계 이해 방식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과학은 탄생할 수 없었는가?

 

니덤에 대한 두 번째 비판은 위 물음과 관련된 것이다.

 

 

4.

니덤에 대한 두 번째 비판은 보편성 이념을 근대적 과학 출현의 필연적 전제로 여기는 것에 대한 역사적 반론에 근거한다. 니덤이 수학적 보편성을 언급할 때, 그의 동기는 코페르니쿠스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이 천구의 구조에 국한되어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코페르니쿠스는 천체 운동을 완벽한 원운동으로 여겼고, 그의 지동설은 지구를 천문학의 탐구 대상으로 만들었다. 여기에는 우주 시장(cosmic market)’에서 지구의 가치를 높여 보려는 그의 동기가 깔려 있다.

 

지구 중심설은 중심이라는 단어 때문에 마치 우주 시장에서 지구의 가치가 항성보다 높은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다. 지구 중심설은 지상계와 천상계의 이분법을 전제하고 있다. 천상계는 원운동으로 상징되는 신성(神聖)이 깃든 완벽한 곳이라면, 달 아래 지상계는 악과 괴물들의 거주지로서 불완전한 세계이다. 지상계와 천상계로 이분된 우주론에 대한 도전은 중세 유명론자들의 논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구 바깥에서 지구를 본다면, 불의 뜨는 성질로 인해 지구도 태양처럼 밝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는 동일한 법칙성에 근거한 우주론을 세워 보겠다는 동기가 깔려 있다. 또한 르네상스 이후 서양 인본주의는 자연을 이성적 탐구 대상으로 여기도록 만든 인간 중심주의(anthropocentricism)’의 기원이 된다. 인간 중심주의를 정당화하려면, 지구도 완전한 천체의 일원이 될 필요성이 있었다. 지구가 천체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지구의 가치가 우주 시장에서 높아지는 것을 뜻하며, 이는 인간의 가치도 높아짐을 함축한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과 인간 중심주의의 결합은 설계자 혹은 입법자로서의 신개념이 대세가 될 수 있었던 사건으로 거론된다.

 

니덤은 근대적 보편성 이념의 배후로 입법자로서의 신개념에 주목한다. 그는 근대적 과학과 같은 것이 중국에 형성될 수 없었던 이유로 그러한 신 개념의 결여를 든다. 이에 대한 반론을 접어두자. 보편성의 이념이 반드시 입법자로서의 신 개념을 전제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슬람 학자들의 천문학에서 그 경험적 증거를 확보할 수 있다.

 

창조주로서의 유일신 개념은 이슬람교, 유대교 및 기독교에 공통된 것이다. 전지전능한 창조주로서의 신 개념은 멀리는 바빌론 문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창조주로서의 신 개념을 대범주라 할 때, 각 민족이 처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나타난 다양한 신 개념들로 구성된 소범주들이 있게 마련이다. 또한 수학적 보편성의 이념과 같은 것이 반드시 입법자로서의 신 개념을 전제하는 것은 아니다.

 

이슬람 자연 철학자들은 신이 전지전능함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 신이 전지전능하다면, 우주에는 모순이라는 것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인간에게 나타나는 모순적인 현상이란 단지 인간의 무지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여겼다. 11세기 이슬람 자연 철학자들 다수는 입법자로서의 신 개념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우주의 정합적인 구조와 신의 전지전능함을 연결시켰다. 이 때문에, 이슬람 자연 철학자들은 천문학을 단순히 효과적인 예측을 위한 계산법으로 규정하는 방식에 만족할 수 없었다. 천문학의 수학은 우주의 객관적 구조와 연관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알파라비(al-Farabi)나 이븐 시나(Ibn Sina)와 같은 신비주의적 성향의 플라톤주의자를 제외한다면 많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 실례로 이븐 알바타니(Ibn al-Battani), 이븐 알헤이탐(Ibn al-Haytham), 알비루니(al-Biruni), 알우르디(al-Urdi), 알투시(al-Tusi), 이븐 알사티르(Ibn al-Shtir)들과 코페르니쿠스 모두에게 공통된 관심사를 발견할 수 있다. 지상계와 천상계의 구분으로 인한 자연의 이중적 측면을 의심해 보는 것이 그 공통된 관심사였다. 실제 코페르니쿠스는 수학적 방법론에서 알투시와 알우르디의 방법론을 차용했다. 13세기에 이르러, 전통적인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에 반하는 천구 구조론이 이슬람에서 등장했다. 이러한 역사적 흐름은 다마쿠스의 이븐 알사티르에게서 정점을 이룬다. 그의 우주론은 수학적으로는 코페르니쿠스와 대등하지만, 코페르니쿠스적이지 않고 동시에 플로레마이오스적이지도 않다.

 

 

5.

입법자로서의 신 개념이 보편성 이념의 출현에 전제가 되어야 하는 논리적 필연성은 없다. 이를 받아들이는 경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을 의무라고 여기는 사람이 많다.

 

그렇다면 왜 이슬람 천문학은 지동설로 이어지지 못했을까?

 

유럽에서 코페르니쿠스 이후 지동설이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고 해서, 이것을 기준으로 다른 문명을 함부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위 질문은 철저히 이슬람 문명의 전개 과정에서 우선적으로 대답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4세기 이후 오토만 제국의 번성, 몽골의 제국화로 인해 이슬람 문명은 유럽에서 그 위세를 잃어버리기 시작한다. 스페인을 거점으로 한 이슬람 문명으로부터 유럽 일부가 해방되는 과정을 논할 때, 오토만이나 몽골 제국의 번성은 빼먹을 수 없는 사건이다. 이슬람 문명이 쇠퇴하기 시작하면서, 이슬람 자연 철학자들의 지적 분위기도 종교적이고 신학적 색채를 갖는 성향에 밀려나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다수의 서양 학자들은 이슬람 관점에서 위 질문에 답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 과학을 출현시킨 어떤 고유한 유럽적인 것을 찾는다. 문명사적 교류 역사를 살펴보면, 17세기 과학 혁명도 유럽인들만의 산물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이슬람 문명, 중국의 기술, 유클리드 기하학 등 각 문명의 이점이 유럽이라는 곳에 응축되었고, 그 결과로 탄생한 것이 17세기 과학 혁명이라 해야 옳다. 그럼에도 다른 문명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유럽만의 어떤 특징 없이는 과학은 탄생할 수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한 주장은 문명 교류사를 가장한 유럽 중심적 역사관의 표출일 뿐이며, 여기에서 니덤을 구제하기는 힘들다. 그가 인류 전체를 위한 과학이라는 이상을 갖고 있었더라도, 그는 과학을 가능하게 만든 어떤 필연적 원인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강조는 실제로는 유럽적인 것의 세계화에 지나지 않는다.

 

이슬람 문명이 오토만 및 몽골 제국과의 오랜 갈등을 겪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이슬람 문명에서 수학적인 지동설이 먼저 나왔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추측을 과장해서는 안 된다. ‘이슬람 문명이 유럽에서 쇠퇴하지 않았더라면이라는 전제에 바탕을 둔 추측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서구에서 소위 근대적 과학을 생성시킬 수 있었던 여러 사건들 또한 필연적인 것으로 과장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과장은 강해진 문명이 올챙이 시절을 망각한 채 강해진 시점의 시대적 독자성을 정당화하려는 자기중심적 입장에 지나지 않는다.

 

 

6.

유럽에서 과학이 형성되던 시대에만 해도, 유럽은 세계의 중심 무대가 아니었다. 당시 중국은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 무대라고 여겼고, 또 그만한 경제력과 기술력을 갖고 있었다. 18세기 이후 과학과 기술의 결합을 바탕으로 유럽은 점차 세계의 중심 무대로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반면에 중국 문명은 쇠퇴기를 맞이한다. 이때부터 중국학자들은 유럽의 과학과 기술을 새롭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중국학자들은 어떤 유럽적 특징이 과학과 기술의 결합을 촉진시켰는지에 대해서는 심각한 고민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과학을 가지고 자신들의 과거 역사를 반성했을 뿐이다. 조선 시대 유생들도 서구 과학을 가지고 과학에 담긴 서양의 어떤 고유한 특징을 찾아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조선 유생들은 서양 과학을 탈중국 관점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했다. 이 역시 과학을 가지고 과거 역사를 반성해 본 사례 중 하나일 뿐이다. 홍대용이나 최한기의 글에서 과학적 발견의 결과물은 존경의 대상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그 배경을 이룬 서양의 세계 이해 방식에 대해서는 그 어떠한 열등감도 반영되어 있지 않다. 그들은 과학이 필연적으로 그러한 세계 이해 방식에서 나와야 한다고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덧글

과학의 출현은 설계자로서의 신 개념을 필요로 했다는 주장, 과학을 합리성의 기준으로 묘사하는 무서울 정도로 용감한 과장, 과학을 기준으로 이 땅의 역사를 전근대와 근대로 이분하는 짓거리, 그리고 과학적인 것을 근대적인 것으로 규정한 후 ‘개화기’라는 선조들의 용어를 ‘근대화’라는 용어로 대체시킨 일 등은 조선 말기가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다. 여기에는 이 땅의 특이한 선교 역사, 일제 강점기, 개발 독재,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그저 남의 것을 수입해 이 땅에서 권위를 내세우는 몰지각한 쓰레기 학자들의 태도와 같은 여러 요인들이 복잡하게 작용했다. 그러한 태도를 지닌 자들이 이 땅의 과학과 과학사에 대해 떠들고, 또한 홍대용과 최한기 등에 대해 논하는 세태가 이어지는 한, ‘우리에게 과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는 결코 건설적인 담론으로 승화되지 못하리라.

 

* 2010년에 작성한 에세이를 수정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