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 에세이/자연철학

민속 심리학과 집단정신

착한왕 이상하 2010. 11. 2. 04:23

* 다음 글은 절판된 <상황윤리: 현실세계 속의 공학 담론> 부록 A9을 수정한 것임을 밝혀둔다.

 

민속 심리학과 집단정신

 

 

1.

현대 문화 심리학 및 비교심리학은 19세기 중엽에 형성된 민속 심리학(Völkerpsychologie)과 역사적 관련을 맺고 있다. 19세기 민속 심리학에 담긴 문화 개념은 지금 우리가 이해하는 방식과는 다르다. 문화의 현대적 이해에는 목적론적 진보 개념이 빠져있다. 인간 정신 현상에 나타나는 집단적 측면이 어떤 정해진 발달 구조를 따른다는 관점은 더 이상 통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에 그러한 관점은 19세기 역사관을 지배했다. 따라서 민속 심리학의 문화 개념은 ‘야만에 대비된 문명(civilization)’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또한 그 개념은 민속 혹은 민족정신(Volksgeist), 곧 특정 집단의 정신적 특징을 전제하는 개념이기도 했다.

 

문화는 자연과 정신의 통합을 추구하는 노력 속에서 자연에 대비된 것으로 여겨져 왔다. 심리학을 보편 법칙에서 구체적 현상을 예측하고 실험적으로 예증하는 과학의 범주로 귀속시켜 보려는 시도가 있었다. 헤르만 파울(H. Paul, 1846~1921)은 자연에 대비된 것을 더 이상 정신이 아니라 문화로 봐야 한다고 선언했다. 심리학을 개인 심리학(individual psychology)에만 국한시키려는 몇몇 인물들은 파울의 그 선언을 따랐다. 그들은 과학적 지식 체계는 본질적으로 비역사적이어야 한다고 여겼다. 개인 심리학만이 과학화 가능하다고 주장한 이들은 집단정신을 연구하는 민속 심리학의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그들은 역사적 측면을 띨 수밖에 없는 집단적 속성은 비역사적인 개인의 심리적 측면에 의해 설명 가능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반면에 유기체론을 옹호하는 이들의 입장에 따르면, 개별적인 것들의 관계에 근거한 전체의 속성은 그 개별적인 것들로만은 설명 불가능하다. 이러한 개인 관점 대 집단 관점의 갈등은 유기체적 사고의 태동과 함께 나타난 19세기의 양상 중 하나였다.

 

유기체론에서 정신은 하나의 전체(whole)로 파악된다. 정신은 몸을 구성하는 부분들의 상호 작용에 의존하고, 그 부분들은 전체에 의존한다. 이러한 전체와 부분의 상호 의존성은 정신과 신체의 통일성(unity)을 보여주며, 영혼(soul)은 그 통일성의 근원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부분이 전체에 의존하는 방식은 기계론적 사고방식 속에 쉽게 통합될 수 없었다. 그 의존 방식은 어떤 목적성을 함축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기계론적 세계 이해에 따르면, 통일성의 문제는 신의 영역이거나, 아니면 우연에 의한 결과일 뿐이다. 기계론적 세계 이해 방식에서 과학적 지식 체계는 ‘왜’가 아닌 ‘어떻게’라는 질문과 관련된 작용인만을 다루어야 한다. 원인과 결과는 동일한 인과 범주로 간주되며, 양화 가능한 것은 단지 물질의 연장(extension) 및 운동(motion)과 관련된 1차적 속성에 국한된다.

 

고대 전통의 양적 속성과 질적 속성을 기계론 전통의 1차 속성과 2차 속성에 대비시킬 때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고대 전통에서 질(quality)은 양(quantity)과는 다른 방식으로 양화 가능한 활력, 능력, 성향, 관계 등까지 포함한 개념이었다. 반면에, 기계론 전통에서 질은 단순히 양화 불가능한 정신적 속성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겨졌다. 이 점은 정신과 몸을 이분하는 실체적 이원론(substantial dualism)에 함축된 관점이다. 기계론적 사고방식을 개인과 집단에 적용시킬 때, 관계에 근거한 집단적 속성은 개인적 속성에 의해 설명되어야 한다. 반면에, 집단정신을 연구하는 민속 심리학은 개인들로 구성된 사회 또한 하나의 ‘초유기체(super organism)’로 본다. 개인들의 상호 작용에 의해 나타나는 속성은 민속 심리학에서는 ‘집단정신’에 유비되기 때문이다.

 

 

 

2.

생물의 성장과 발생을 다룰 때와 마찬가지로, 정신 현상의 연구는 전체가 보여주는 목적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인식이 싹텄다. 이러한 인식 아래, 인과가 오로지 작용인에만 귀속될 수 없다는 생각이 퍼졌다. 목적인을 단지 도구적 혹은 방법론적 관점에서만 잠정적으로 인정하고 생물학을 발달시켜 나가면, 언젠가는 ‘생물학의 기계론화’가 가능하다는 생각과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대립했다. 전자의 생각은 칸트에게서 엿볼 수 있고, 후자의 생각은 동시대 많은 생리학자 및 발생학자에게서 엿볼 수 있다. 칸트는 정신 현상은 방법론적 차원에서도 과학적 지식 체계를 갖출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다. 즉, 칸트는 심리학의 과학화는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다.

 

원거리 작용(action at a distance)과 물질의 활성을 부정하는 기계론적 세계관에서 그렇지 않은 동력학적 세계관으로의 관심의 이동, 그리고 이와 함께 유기체론에 대한 관심의 부활은 19세기 사상계의 풍부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원동력이었다. 그럼에도, 이상화된 과학적 지식 체계의 이념은 쉽게 식지 않았다. 그 이념이 실제 과학의 작업과 다르다는 사실은 단지 느낌 정도로만 간주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심리학을 ‘이상화된 예증적 과학’으로 만들어 보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그러한 시도 중 하나는 페히너(G.T. Fechner)의 심리 물리학(psychophysics)이다. 심리 물리학을 지금의 실험 심리학의 모태로 잡는 것은 큰 문제가 없지만, 둘을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당시 낭만주의와 관념론의 득세 아래 ‘물질론자(materialist)’는 독일에서 경멸의 단어였다. 페히너의 시도는 심신 평행론을 바탕으로 심리 현상의 물질적 기반을 규명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페히너와 다른 방식으로 심리학을 과학의 분야로 만들려는 노력이 있었는데, 바로 쾨니히스베르그 대학의 칸트 자리를 계승한 요한 프리드리히 헤르바르트(J.F. Herbart, 1776~1841)의 작업이었다. 심리학의 역사를 논할 때 헤르바르트를 빠트릴 수 없고, 또 독일, 오스트리아 과학 및 철학에 끼친 그의 영향력은 매우 크다. 헤르바르트는 칸트에 입장에 대항해 개인 차원의 심리학도 고전역학처럼 예증적 지식 체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영국 경험론에 뿌리를 둔 ‘관념 조합설(associationism of ideas)’ 대신, 헤르바르트는 환경 제약 속에서 일정한 방식으로 관념을 생성시키는 ‘힘에 관한 법칙’에 관심을 가졌다. 그 힘은 실험적으로 직접 증명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은 언어활동, 집단 역사의 연구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파악 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다.

 

헤르바르트는 근대의 개인주의 이성 관점에 충실하려고 애썼다. 그는 헤겔과 달리 민속 혹은 민족정신, 곧 헤겔이 ‘세계정신(Weltgeist)’의 발달 과정에서 특정 국가와 결부된 ‘객관적 정신’으로 불렀던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헤르바르트는 집단 및 관계의 속성이 개체의 속성에 의해 설명 가능하다는 입장을 취했다. 그는 개인의 심리적 구조가 개인들의 상호 작용에 의해 집단 속에 구현된다고 믿었다. 이러한 생각은 민속 심리학의 초기 형성 과정에 영향을 미쳤다.

 

대학의 독립 학문 분야로서 심리학이 시작된 곳은 베른(Bern) 대학이며, 베른 대학의 최초 심리학 교수좌는 ‘민속 심리학’에 배치되었다. 그 자리를 차지한 인물은 모릿츠 라자루스(M. Lazarus, 1824~1903)였다. 라자루스의 정신적 지주는 헤르바르트였다. 민속 심리학의 이론과 방법론은 그와 헤이만 스타인탈(H. Steinthal, 1798~1892)과의 만남을 통해 구체적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스타인탈의 정신적 지주는 언어학자 빌헬름 폰 훔볼트(W. von Humboldt, 1767~1835)였다. 19세기 언어학은 역사, 문화 및 제반 자연과학과의 교류 관계 속에서 발달했다. 훔볼트는 전 우주를 관통하는 원초적 힘을 가정했으며, 인간의 언어 능력도 그러한 힘의 구현으로 보았다. 훔볼트 언어학의 학문적 위상은 그의 형이상학에서 찾을 수 없다. 하지만 그의 형이상학은 훔볼트가 다른 민족 언어에 관심을 갖도록 만든 하나의 원인이었다. 또한 원초적 힘에 대한 관심은 헤르바르트와 훔볼트 모두에게 공통된 것이다. 이 점은 서로 다른 지적 배경을 가진 라자루스와 스타인탈을 묶어주는 끈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훔볼트는 헤르바르트와 달리 집단을 개인의 심리를 반영하는 일종의 창으로 보지 않았다. 훔볼트는 언어가 심리의 집단적 측면을 구성하는 핵심 요인으로 보았다. 언어를 통해 집단적 정신 현상의 다양성과 차이, 그리고 공통점을 추적할 수 있다는 것이 훔볼트 사상의 핵심이다. 언어는 집단의 세계 이해를 산출하기 때문에, 훔볼트가 추구한 언어 연구는 언어 자체의 분석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광범위한 영역들을 가로지른다.

 

라자루스와 스타인탈에 의해 그 토대가 마련된 민속 심리학의 두 정신적 축은 헤르바르트와 훔볼트였다. 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개인과 집단, 부분과 전체에 대한 더욱 정교한 개념적 구성과 새로운 연구 방법론이었다. 사회, 집단, 민속 혹은 민족정신이라는 전체는 개인이라는 부분들의 상호 작용에 의한 합이다. 전체는 부분들의 상호 작용에 의존하고, 부분들은 전체에 의존하기 때문에, 민족정신은 개인에게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전체가 부분에 의존하는 방식과 부분이 전체에 의존하는 방식 사이에서 나타나는 차이는 지금도 여전히 규명되지 않은 상태이다. 아주 짧게나마 개인적 입장을 밝히면, 전체가 부분에 의존하는 방식은 상호 작용에 의한 인과성을 갖지만, 부분이 전체에 의존하는 방식은 수동적 제한이다. 실레로 심적 상태의 일종인 의도는 특정 행위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인과적 힘을 갖고 있지 않지만, 그러한 행위는 의도 없이는 근거를 가질 수 없다. 이러한 전체에 의한 제한은 원인과 결과의 인과적 기제를 갖지 않는다. 전체와 부분의 관계를 고찰하는 것은 새로운 개념 체계를 요구하기 때문에, 그 관계에 관한 더 이상의 언급은 하지 않겠다.

 

라자루스와 스타인탈에게 민족정신은 집단적 심리 현상의 통일성과 조화의 원천으로 여겨졌다. 민족정신은 직접적 측정 대상이 될 수는 없지만, 언어, 신화 및 예술에 대한 역사적 연구를 통해 파악 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라자루스와 스타인탈에게 민족정신은 또한 모든 개인들에게 공통된 ‘내적 활동’을 뜻하는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여기에서 헤르바르트의 영향력이 그들에게 여전히 남아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들에게 민족정신 혹은 헤겔의 객관적 정신은 한편으로는 개인의 사고와 성향에 내재하는 원초적인 것을 뜻한다. 민족정신은 또 한편으로는 책, 전쟁, 운송 수단, 물물 거래 및 교육과 각종 제도 등 개인의 상호 관계를 규정하는 물질적, 제도 속에서도 나타난다.

 

 

 

3.

라자루스와 스타인탈의 민족정신은 집단적 심리 현상을 개인적 심리 현상에 유추한 것에 근거한다. 결국 ‘특정 민족’에 대해 추상적인 ‘특정 개인성’을 논리적으로 전제할 수밖에 없었다. 민족의 위계질서는 개인성의 위계질서로 나타난다. 그 결과, 이상적인 민족 안에서는 모든 개인들이 동질화되고, 또 민족 및 개인의 위계질서에 따른 비교가 중요해진다. 독일적인 것 혹은 아리안족의 것이 다른 민족보다 우월하다는 이념, 곧 국가사회주의(Nazi)의 이념은 민속 심리학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개인주의 관점의 이성 개념이 근대 이후 득세했기 때문에, 정치적 혼란을 그러한 이성 개념의 탓으로 돌린 철학자들은 국가사회주의를 새로운 대안으로 여겼다. 대표적으로 하이데거를 들 수 있다. 나치의 몰락 이후에도 그가 나치의 실패 원인을 히틀러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시대적 계기로 돌렸다는 점을 잊지 말자. 개인주의에 대한 환멸은 획일적인 집단주의에 대한 동경으로 이어졌고, 역으로 집단주의에 대한 환멸은 개인주의에 대한 동경으로 이어진 경향을 서양 지성사에서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개인 차원의 심리와 집단 차원의 심리를 서로 유추시키는 사고방식은 그 후 여러 측면에서 비판되었다. 그런 비판을 이끈 인물을 거론할 때, 분트(Wilhelm Wundt, 1832~1920)를 빼먹을 수 없다. 분트는 개인 심리학의 법칙이 인과율에 근거한 물리학의 보편법칙과 다르다는 입장을 취했다. 환경 속에서 작용하는 개인의 심리 기제는 목적성을 결여한 물질적 인과 기제와 질적으로 다르지만, 물질적 인과 기제와 마찬가지로 비역사적인 것이다. 반면에, 민속 심리는 ‘역사적 인과 기제’에 바탕을 둔 집단적 심리 형태이다. 그러한 형태는 집단 역사의 과거에 기인한 것으로서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개연적인 것이다. 이러한 분트의 관점에는 민속 심리학과 자연 과학의 경계를 명확하게 하려는 동기가 깔려 있다. 분트의 최종 입장은 민속 심리학이 인문학, 엄밀히 말하면 정신학에 속한다는 것이었다. 반면에, 라자루스와 스타인탈은 민속 심리학 및 심리학을 과학과 인문학을 연결시켜주는 중간 지대로 여겼다. 결국, 개인 차원의 심리와 집단 차원의 심리를 유추 관계 또는 인과 관계 속에서 파악하는가에 따라 라자루스와 스타인탈의 접근 방식과 분트의 접근 방식이 갈린다. 이러한 차이는 글쓰기 목적과 관련해 확대시킬 수도, 좁힐 수도 있는 그러한 것이다.

 

 

 

4.

문화적이라는 개념은 역사적으로 우열 비교의 잣대로 기능했다. 이 점은 서양뿐만 아니라 동양에도 해당한다. 어디든 과거의 문화 개념 속에는 문명 개념이 함축되어 있었다. 지역들의 공간적 분포를 ‘문명 대 야만으로 파악하는 사고방식’은 문화라는 것이 결코 평등한 관점에서 여겨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문화 개념이 우열 비교의 잣대를 벗어나기 시작한 것은 인류사에서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벗어남은 여전히 이론적으로만 그러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