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 에세이/자연철학

생리학사: 왜 부르하베인가?

착한왕 이상하 2015. 1. 15. 23:56

 

 

왜 부르하베인가?

 

생리학(physiology)의 전성기는 19세기로 거론된다. 그 기간 동안 생리학은 요하네스 뮐러(Johannes Mueller), 카를 루드비히(Carl Ludwig, 1816~1859) 등의 노력으로 해부학에서 독립해 유기체 기능들의 물리화학적 연구 분야로 정착했다. ‘유기체의 기능들을 물리 화학적으로 규명한다는 것에 대한 명확한 의미 해석은 결코 쉽지 않다. 왜냐하면 그러한 해석 작업은 살아 있는 것들의 영역과 살아 있지 않은 것들의 영역 사이의 구분을 인정하면서도 두 영역 각각에 해당하는 별도의 법칙성과 같은 것을 부정하는 입장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해야 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해석 작업은 이 짧은 글의 주제가 될 수 없다. 이 짧은 글의 핵심 물음은 다음과 같다.

 

왜 부르하베(Herman Boerhaave, 1668~1738)인가?

 

위 물음이 생리학사에서 의미 있는 이유는 부르하베를 빼먹고 생리학사를 논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 물리화학적 발견을 기초로 기능의 관점에서 생리학을 접근했다. 그러한 접근 방식은 생리학을 어느 정도 해부학에서 독립된 분야로 인식하는 연구 분위기를 형성했다. 부르하베 이 전까지의 생리학사는 생리학적 연구를 살아 있는 유기체에 국한시키는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부르하베 이 전까지의 생리학은 19세기 중엽 이후에 굳어진 생리학과는 거리가 멀다. 부르하베 이 전의 생리학은 해부학 등 다른 분야와 독립된 분야로 취급되지 않았다. 더욱이 물리화학을 바탕으로 한 생리학 고유의 실험 방법론도 갖고 있지 않았다. 부르하베 이후에야 해부학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기능의 관점에서 생리학을 접근하는 연구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그러한 연구 분위기는 19세기 생리학이 개별 과학 분야로 정착할 수 있었던 밑거름과 같다. 이 때문에, 생리학사를 논할 때 부르하베를 기점으로 전후(前後)를 논할 수 있는 것이다.

 

생리학이라는 용어는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문헌에 등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폭넓은 의미에서 생리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에게 생리학자연에 관한 지식들을 뜻한다. 이때 용어 생리학자연을 뜻하는 그리스어 퓌지스(physis)’에 어원을 둔 것이다. 히포크라테스는 퓌지스자연의 치유력이라는 의미를 부여해 의술에 사용했다. 생리학의 탐구 영역을 인체라는 유기체에 국한하려는 시도는 갈레노스에게서 엿볼 수 있다(Introductio seu medicus, cap. VII). 갈레노스는 생리학을 의학의 하부 분과로 간주했다. 그는 의학을 생리학, 병인학(etiology), 병리학, 위생학, 증후학(semeiology), 치료학 등으로 분류했기 때문이다. 그의 생리학유기체에 국한된 자연을 뜻한다. 여기서 전통적 퓌지스의 개념을 유기체에 좁히려는 관점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갈레노스의 생리학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 수 없다. 생리학에 대한 그의 언급은 너무나 빈약하고 애매모호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의 문헌에서 생리학이라는 용어는 단 한 번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가 생리학을 의학의 하부 분과로 분류한 데에는 인체 기관들의 유용성에 대한 그의 관심이 도사리고 있다.

 

그리스인들의 인체에 대한 관심은 전통적으로 우주의 질서 속에서 인간의 위치를 알아보겠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갈레노스에 이르러 인체에 대한 관심은 인체 기관들의 유용성에 대한 관심으로 구체화되어 실험적 탐구 영역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생물학사가들이 갈레노스를 논할 때 종종 놓치는 것이 이것이다. 갈레노스 이후 생리학(Physiologos)’라는 제목의 책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 책은 고대부터 내려오는 동물들에 관한 우화들을 모아 놓은 것이었다.

 

생리학을 유기체에 국한시키려는 입장은 16세기가 되어서야 본격화된다. 실례로 의사이자 수학자 페르넬(Jean F. Fernel, 1497~1558)의 작업들을 들 수 있다(Universa Medicina, 1554). 스위스 바젤의 의사이자 해부학자 츠빙거(Theodore Zwinger, 1533~1588)는 생리학을 의학의 하부 분과로 규정하고, 그 탐구 대상을 유기체의 살아 있는 활동을 연구하는 것에 국한시켰다(Physiologia Medica, 1610). 케플러는 근시와 원시를 다룬 64개 명제들을 열거한 자신의 작업이 물리학보다는 생리학에 속하는 것으로 규정했다(Dioptrice, 1610). 17세기에 접어들면서 생리학이라는 용어는 여러 강연 제목이나 책에 등장했지만, 생리학은 여전히 독립된 과학 분야로 대우받지 못했다. 심지어 생리학을 의학이 아니라 물리학의 하부 분과로 보는 입장도 있었다. 그러한 입장을 펼친 인물로 이탈리아 수학자이자 물리학자 보렐리(Giovanni A. Borelli, 1608~1677)를 들 수 있다(De Motu Animalium, 1680~1).

 

네덜란드의 의사이자 화학자 부르하베는 생리학을 유기체의 활동에 국한시키는 전통을 기능의 관점에서 확대시켰다. 부르하베는 생리학을 해부학과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둔 분야로 파악했다. 단순히 해부학에 귀속될 수 없는 생리적 현상들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혈액 순환, 림프액 확산 현상, 근육의 수축 현상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부르하베는 유기체 기관들의 기능을 화학적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그러한 시도는 체액을 화학적으로 분류하기 시작할 수 있게 된 당시 화학의 발전에 기인한 것이다. 부르하베의 <의학론(Institutione Medicae, 1708)>은 그의 제자들에 의해 번역되고 편집되어 유럽 각국으로 퍼져나갔다. 스위스의 생리학자 할러(Albercht von Haller, 1708~1777)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할러는 생리학의 기능을 유기체의 해부학적 구조에서 발생하는 과정으로 간주했다(Elementa Physiologiae, 1757~1766). 여기서 부르하베 이후에도 생리학을 해부학과 연관시키는 전통은 18세기 전반에 걸쳐 남아 있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19세기 이후에야 생리학은 그 자체로 독립된 과학 분야로 인식되게 된다. 그러한 인식이 형성되는 과정을 논할 때 부르하베를 빼먹을 수 없는 이유는 이 짧은 글을 통해서 분명해졌을 것이다.

 

 

* 흥미로운 물음

 

1.생리학은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초를 장식한 생물학의 화려한 꽃에 비유될 수 있다. 그러나 20세기 중엽 이후 현재에 이르러 생리학이 개별 분야로 남아 있는 대학이나 연구소의 수는 극소수가 되어버렸다. 그 수는 비슷한 시기에 발달한 발생학이 개별 분야로 남아 있는 대학이나 연구소의 수보다도 적을 것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2. 그렇다고 생리학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생리학은 현재 어떤 방식으로 그 고유성을 유지한 채 기능하고 있는 것일까?

 

 

                                                              -  부르하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