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 에세이/자연철학

밤하늘의 과학과 축소된 모형 속의 과학

착한왕 이상하 2012. 9. 7. 22:33

* 다음은 옛날 글을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수정한 것이다. 세세히 수정하지는 않았다.

 

밤하늘의 과학과 축소된 모형 속의 과학

- Science in a Dark Sky and Science in a Miniature

 

 

이런 생각을 해보자. 지구와 소행성의 급작스런 충돌로 지금까지 쌓아왔던 인류 문명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게 되었다. 만약 이런 사건이 일어난다면, 현재 사람들이 2000년 전 과거 사람들보다 생존할 가능성은 높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자연의 대재앙이 도래해도 현재 인간들의 과학기술이 완전히 사라진다는 가정은 그럴듯하지 않다. 억지를 부려 그런 가정이 그럴듯하다고 한다면, 과연 우리들 중 몇 명이 마른 나무를 이용해 불을 만들 수 있을까? 우리들 중 몇 명이 병 치료에 필요한 약초를 식별하고 그 이용법을 알고 있는가? 아마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소행성과의 충돌로 인류 문명이 사라지게 된다는 가상의 상황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경우, 희열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현재의 구속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 희열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문명에 대한 반감으로 희열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후자의 사람들은 현대 문명의 기반이 과학과 기술이라고 믿고 있으며, 인간 본성이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인해 점차 자연으로부터 멀어졌다고 강조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자연의 포근함’을 강조한다. 자연은 인간 본성의 기원이요 자연 속에서만 인간은 인간다울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강조는 자연에 대한 실제 경험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어릴 때 시골에서 본 밤하늘의 은하수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곤 한다. 그 때만해도 산간벽지에는 전기가 없었고, 불을 밝힐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호롱불이었다. 검푸른 밤하늘에 떠있는 수많은 별들은 묘한 경외감, 신비감만을 자아낸 것은 아니다. 공포감도 자아냈다. 이러한 개인의 경험을 일반화하는 것을 허락한다면, 고대인들에게 밤하늘은 단순히 과학적 탐구 대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종교적 대상이었다. 특정 종교의 제의로 사람들의 행위를 격식화할 수 있으려면, 경외 및 신비의 대상뿐만 아니라 공포의 대상도 담고 있는 종교의 교리가 분명히 효과적이다. 현대 도시의 인공적인 불빛으로 인해 공포심마저 자아낼 수 있는 칠 흙 같은 밤하늘을 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도시의 밤하늘은 더 이상 경외의 대상도, 상상력의 원천일 수도 없다. 오히려 우주에 관한 티브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사람들은 지구 바깥에 대해 동경한다. 밤하늘에 대한 고대인의 경험과 현대인의 경험은 다르다. 따라서 고대인과 현대인이 생각하는 자연도 다르다고 말해야 한다. 그런데 고대인들은 자연과 친숙한 사람들이며 자연 속에서 포근함을 느낀 사람들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고대인들이 경험한 은하수가 어릴 때 경험한 은하수와 별 차이가 없다면, 나는 그 어릴 때 경험에서 포근함보다는 공포감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주변에 야행성 육식 동물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환경이었다면, 그 공포감은 더욱 컸을 것이다. 고대인과 현대인이 자연에 대해 접근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비단 과학과 기술 자체에만 종속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활 세계뿐만 아니라 자연에 대한 우리의 이해방도 변화시킨다. 자연에 대한 고대인의 이해는 하늘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었다. 7만 년 전 원시인들에게는 더욱 그럴 것이다. 생존 투쟁으로 얼룩진 낮 동안에는 원시인들은 하늘을 대해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밤하늘에서 그 감흥을 느꼈을 것이다. 밤과 낮의 경험적 구분은 그들에게 주기성의 개념을 심어주었고, 태양의 위력은 오로지 밤하늘에 대비되어 나타난다. 공포감과 경외감을 주는 밤하늘과의 대비 속에 태양은 ‘성장’을 상징한다. 현대인에게는 어떤 의미에서 ‘고대인의 하늘’이 없다. 반면에 고대인에게는 티브이라는 도구에 등장하는 우주가 없다.

 

과학이라는 것이 반드시 현재의 관점에서 이해될 이유는 없다. 재확인 가능한 관찰 사실 및 재생산 가능한 측정량과 연결되는 다양한 가설들을 찾는 것이 과학적 작업이라고 할 때, 고대인의 과학은 주로 밤하늘의 관측에 근거했을 것이다. 태양이 이글거리는 낮보다는 밤 동안에 더 많은 주기적 현상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이 밤하늘에서 고정된 별들만 바라보았다면, 과학자라 불릴 수 있는 고대인은 별들의 주기적 운행에 관심을 가졌다. 그들 나름대로 월식과 일식을 예측할 수 있는 계산법을 만들었고, 다음 달에 나타날 별들의 배치를 예측과 맞추어 보았다. 이러한 고대의 ‘밤하늘의 과학’에는 예측과 관련된 가설뿐만 아니라 고대인의 종교성이 배어있었다. 서양의 경우, 이러한 상황은 근대까지 지속되었다. 근대 이후 점차 과학은 종교와 무관한 것으로 그 고유성을 확보해 나갔다.

 

현대의 과학은 ‘축소된 모형’ 속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 어떤 실험실이든 거대한 밤하늘과 비교할 때 일종의 ‘축소된 모형’에 불과하다. 천문학도 더 이상 밤하늘을 직접적으로 관측하는 것이 아니라 전파망원경으로 얻어진 데이터를 실험실에서 다룬다. 우주선을 타고 대기권 바깥으로 나가서 낮과 밤의 구분이 사라진 천체를 관측할 기회는 단지 극소수에게 주어질 뿐이다. 그리고 그 극소수는 반드시 과학자일 필요가 없다.

 

현대 과학을 ‘축소된 모형 속의 과학’으로 부를 때, ‘축소된 모형 속의 과학’은 자연에 대한 접근 방식이 과거에 비해 달라졌음을 상징한다. 밤하늘의 관측이 오래 지속되면 될수록, 고대인은 자신들의 관측에 대한 신빙성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주기적인 궤도를 보여주는 별들도 있지만, 그 운행이 예측불허인 행성들도 있다. 이러한 사실은 밤하늘에서 발견한 고대인들의 종교적 신념과 마찰하기도 했다. 별과 행성은 자르고 부수는 등의 조작 대상이 아니다. 고대인의 ‘밤하늘의 과학’에는 ‘조작이라는 인간의 개입(intervention)’이 빠져 있다. 관측에 동원되는 도구는 별과 행성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이 때문에 그런 도구를 가지고 밤하늘을 조작할 수는 없다. 관측에서 출발해 관측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밤하늘의 과학’은 새로운 사고방식을 요청했다. 보이는 대로 믿을 것인가? 아니면 보이는 것을 초월해 탐구해야 할까? 소위 배운 자들이 말하는 직관과 이성의 갈등은 ‘보이는 것을 그대로 믿어야 한다는 생각’과 ‘보이는 것을 초월해야 한다는 생각’ 사이의 갈등을 뜻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러한 갈등을 통해 근대 학자들 중 일부는 이렇게 확신했다. 보이는 것은 주어진 자료일 뿐, 밤하늘의 숨겨진 질서는 관측 자료에 이성이 개입함으로써 얻어진다.

 

물리학은 직관에 대한 이성의 우위 관점에서 태어난 과학의 분과다. 이 점은 근대 물리학의 형성 과정을 알면 명백해진다. 물질의 보편적인 운동 법칙에 근거해 천체 현상을 설명하려는 동기가 그 형성 과정에 배어 있다. 그러한 운동 법칙은 경험에 따라 다르게 관측되는 현상을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현상 속에 숨겨진 불변의 패턴에 관한 것이다. 밤하늘에서 시작한 고대의 과학은 근대에 들어와 ‘보이는 그대로의 자연을 믿지 말지어다’라는 논제로 변형되었다. ‘자연에 대한 심미적 이해 방식’은 여전히 종교성을 대표하기는 했지만, 과학에서는 질서에 대한 탐구에 의해 밀려나게 되었다. 과학의 가설들이 종교적 해석과 함께 해야 한다는 신념이 일종의 강박 관념으로 취급될 수 있는 분위기가 마련되었다.

 

기술의 발달이 반드시 과학에 근거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 보여주는 사례는 과거에나 현재에나 비일비재하다. 현미경의 초기 발명이 기하 광학에 의존했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 고배율의 현미경은 과학과 기술의 결합을 요구하지만, 그러한 결합이 초기 현미경의 발명에도 필요했다고 단정짓기는 힘들다. 어쨌거나 현미경을 통해 세포를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세포학이 현미경을 통한 관찰에만 의존했다면 발전할 수 없었다. 작은 렌즈 속에 확대된 미시 세계는 신비감과 놀라움을 자아냈지만 밤하늘만큼 강력한 종교적 경외심까지 자아내기는 힘들었다. 왜냐하면 그러한 미시 세계는 인간의 조작이 개입할 수 있는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현미경의 발명은 분명히 ‘축소된 모형 속 과학’의 길을 연 사건 중 하나였으며, ‘축소된 모형 속의 과학’은 인간의 조작이라는 개입을 허락한다. 렌즈 속에 갇힌 미시 세계의 대상은 인간에 의해 염색되고 잘려지고 이리저리로 이동된다. 조작이 개입하는 과학에서 관찰은 이성적 사고의 출발이 아니라 조작의 출발이다. 가설의 결과는 단순히 이성적 사고의 예측으로만 여겨질 수 없다. 그것의 수용 여부는 조작에 의해 최종적으로 판가름 나기 때문이다.

 

과학이 더욱 발달하자 물리학도 점차 ‘축소된 모형 속 과학’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축소된 모형 속에서 여러 과학의 분과들이 만나는 시대가 도래 했다. 물질의 운동에 관한 보편적인 이상이 물리학 속에 남아있다고 해도, 물리학에 담긴 태고의 밤하늘에 대한 동경은 사라졌다. 이제는 태양의 빛이 아니라 인공의 형광등 빛이 밤의 세계를 지배한다. 밤하늘의 관측은 일종의 취미 생활로 전락했다. ‘축소된 모형 속 과학’의 분과들이 부정적으로 평가될 필연적 이유는 아무 데도 없다. ‘축소된 모형 속 과학’은 지구상에서 진행된 역사의 결과일 뿐이기 때문이다.

 

먼 훗날 우리 모두가 달나라에 신혼여행을 갈 수 있다면, 우리의 자연의 이해는 또 다시 바뀔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시대를 꿈꾸기에 앞서 반드시 생각해볼 문제가 있다. ‘축소된 모형 속의 과학’, 즉 조작에 의한 인간의 개입을 허락하는 과학이 일방적으로 정치적 권력의 노예가 될 때, 예상할 수 있는 결과는 무엇일까? 그 과학에는 자연에 대한 원초적 경외심이 자리 잡기 힘들다면, 이때 남는 것은 무엇일까? 조작이라는 인간의 개입을 허락하는 과학은 어쩌면 손쉬운 경제적 결과를 강요하는 권력에 종속되기 쉬울 수도 있다. 인간의 조작을 허락하지 않는 ‘고대의 밤하늘의 과학’과 달리 ‘축소된 모형 속의 과학’은 조작자로서 탐구자를 탐구 대상보다는 조작에 의한 외적 결과에만 관심을 돌리도록 유도하기 쉽기 때문이다. 조작의 외적 결과만 권력에 의해 추앙되고 과학자들이 권력에 종속될 때, 어쩌면 축소된 모형 속에 갇힌 과학의 분과들은 영원히 그 모형 속에서 탈출하지 못한 채 과학의 종말을 불러올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