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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행 우주의 히틀러

착한왕 이상하 2011. 11. 16. 02:05

<닥터 후>, <스타 트랙> 등 티브이 SF 시리즈를 보면 ‘평행 우주’를 소재로 한 단편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나와 똑 같이 생겼을 뿐만 아니라 유전적 구조도 동일한 또 다른 내가 다른 우주에 존재한다고 가정해 보라. 이러한 가정 아래 많은 흥미로운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평행 우주 가설은 과학적으로 검증된 가설이 아니다. 또 그 가설이 기대고 있는 물리학의 이론도 경험 세계를 설명하는 데 아직은 한계를 갖고 있다. 평행 우주 가설은 그러한 이론에 대한 여러 해석 중 하나인 ‘다우주 해석’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과학적 가설로 불릴 수 없다. 하지만 평행 우주가 존재한다고 가정하면, 흥미로운 여러 물음들을 만들어 볼 수 있다.

 

 

평행 우주의 히틀러

 

우리 우주에는 지구라는 행성이 있다. 이 행성에 사는 인간들의 역사에서 가장 사악한 인물을 한 명 들라면, 히틀러가 자주 거론된다. 그런데 평행 우주의 히틀러는 어떤 평가를 받는 사람일까?

 

평행 우주의 히틀러는 우리 우주의 히틀러와 똑 같이 생겼을 뿐만 아니라 유전적 구조도 동일하다. 또한 성격마저도 거의 유사하다. 하지만 평행 우주의 지구에서 히틀러는 인류를 구한 위대한 영웅으로 칭송받는 인물이다. 그가 그렇게 칭송 받게 된 과정을 영화로 만든다고 할 때, 그 과정은 다음과 같은 장면들로 구성된다.

 

장면 #1

화가가 되려고 했지만 실패한 청년 히틀러는 오늘도 고서점들이 꽉 차 있는 거리를 헤매고 있다. 그는 독학으로 여러 학문을 섭렵해 나갔다. 이를 기특히 여긴 고서점 주인과 친구가 된다. 그 고서점 주인은 유대인이었다. 당시 유대인은 여러 불이익을 받아 가며 살 수밖에 없었다.

 

장면 #2

유럽 국가들은 앞 다투어 식민지를 개척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후발 선진국인 독일은 아프리카 일부를 제외하곤 식민지를 갖고 있지 않았다. 히틀러는 고서점 주인의 도움을 받아 독일에 입국하여 정당 활동을 하게 된다. 그는 빼어난 웅변으로 곧 주목받는 정치인이 되었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도움으로 집권하게 된다.

 

장면 #3

히틀러는 독일 통치 하에 있던 아프리카 일부를 해방시키고, 다른 유럽 국가들의 식민지 팽창 정책에 대해 비판했다. 당시 독일의 제철 산업은 막강했다. 프랑스와 영국은 독일 경제를 고립시키는 동시에 식민지를 확장하기를 원했다. 프랑스와 영국은 폴란드를 침공했다. 폴란드를 철강 산업 기지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장면 #4

히틀러는 폴란드를 해방시키기 위해 프랑스와 영국과 전쟁을 벌였다. 전세가 독일 쪽으로 기울자, 미국이 프랑스와 영국과 연합해 히틀러를 압박해 들어갔다. 그러나 히틀러는 이들의 압박에 굴하지 않았다. 그는 소련과 연대해 프랑스, 영국, 미국 연합 세력에 대항했다.

 

장면 #5

전 세계 유대인들이 히틀러를 돕기 위해 전쟁에 자원했으며, 전쟁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했다. 결국 승리는 히틀러에게 돌아갔고,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나라들은 프랑스, 영국, 미국 등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를 찾게 된다.

 

평행 우주를 가정한다면, 위 시나리오는 평행 우주에서는 일어날 수 있는 사건들로 구성되어 있다. 흥미로운 물음 하나를 만들어 보기 전에 우리 우주의 히틀러와 평행 우주의 히틀러를 정말 ‘동일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지에 대해 따져 보자.

 

그 어떤 대상도 동시에 여러 장소에 존재할 수 없다. 이를 받아들이면, 우리 우주의 히틀러와 평행 우주의 히틀러는 동일한 것이 될 수 없다. 그런데 ‘두 사람에게 공통된 더욱 궁극적인 어떤 것’이 있다고 가정 해 보자. 그것을 ‘히틀러의 실체’라고 부르자. 이때, 우리 우주의 히틀러와 평행 우주의 히틀러는 단지 그러한 ‘실체의 양태’로 존재할 뿐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히틀러의 실체’를 가정하지 않는 경우, 평행 우주의 히틀러는 그저 우리 우주의 히틀러와 ‘닮은꼴(counterpart)’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우주와 평행 우주 중 무엇이 기준인지는 정할 수 없다. 따라서 ‘히틀러의 실체’와 같은 것을 가정하지 않는다면, {히틀러라 불리는 닮은꼴들}을 가정해야 한다. 이때 다음과 같은 딜레마가 발생한다.

 

• 우리 우주의 히틀러는 악한 사람이다. 평행 우주의 히틀러는 악한 사람이 아니다. 이 때문에, 선과 악은 히틀러의 실체에 내재한 속성도 아니며, 또한 {히틀러라 불리는 닮은꼴들}에 내재한 속성도 아니다.

 

위 딜레마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져 볼 수 있다.

 

[물음] 평행 우주를 가정하는 경우, 위와 같은 딜레마를 피할 수 있으려면 선과 악은 어떻게 규정되어야 할까?

 

개인적으로 위 물음은 평행 우주를 가정하지 않는 경우에도 의미 있는 물음으로 변환 가능하다고 여긴다. 그렇게 변형된 물음은 어떤 것일까? 이러한 물음에 도달하기까지 이 글을 읽으면서 불편한 심기가 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시나리오 작가들은 이를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평행 우주를 가정한 시나리오는 무척 많지만, 히틀러가 선한 인물로 등장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확인해 보지 않았지만,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악을 저지른 인물이나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여기는 사건에 대해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 보는 것은 일종의 금기처럼 작용한다. 어쨌거나 내가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상황에 처해 있다면, 우리 우주의 히틀러가 등장하는 장면을 흑백으로 처리하여 평행 우주의 히틀러가 등장하는 주 장면들에 삽입시키는 기법을 사용해 한 편의 영화를 만들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