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 에세이/잡세상 잡글

베스트셀러 작가 니체?

착한왕 이상하 2010. 1. 9. 10:43

 

  

간만에 문학적인 양식이 뒤섞인 철학책 하나를 봤다. 개인적으로 나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좀 의아하겠지만, 그 책은 프리드리히 니체의 [선과 악을 넘어서(BGE: Beyond Good and Evil)]이다.

 

1. 선천적 유전적 질병으로 평생 고생한 인간! (나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

2. 정신병자! (잘 모르겠다. 요새는 나에게도 해당한다는 느낌이 든다.)

3. 그 누구와도 원만한 관계를 지속할 수 없었던 인간! (나에게도 해당하는 것 같다. 요새는 월 통화료가 2만 원을 넘은 적이 없다.)

 

 

이러한 문구가 니체를 상징한다. 한 마디로 'Sick Boy'라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인간이다. 그러한 표현에 걸맞게 니체에 대한 평도 양분된다. 어떤 이들은 그를 19세기 사상사에서 독특하면서도 천재적인 철학자로 평가하지만, 다른 이들은 논증 체계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미친 철학자로 평가한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양분된 평가는 철학자라는 인간들의 멍청함을 상징한다고 본다. 도대체 논증 체계란 것이 뭔가? 그것이 무모순성을 전제로 사용할 수 없다는 아리스토텔레스 전통의 논증 체계인지 아니인지에 따라, 논증의 구성 방식은 달라지게 마련이다. 또 논증을 시작하기 위한 전제는 논증 자체로 얻어질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 어떤 철학적 사고 방식이 논증에 기대는 경우에도 글쓰기의 양식 속에서만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 논증적인 것과 양식을 이분하는 짓거리가 어쩌면, 니체에 대한 상반된 평가의 원인일지도 모른다.

 

니체에 대한 강단 철학자들의 평가와 무관하게, 분명히 그의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삶의 의미'라는 원초적인 문제를 둘러싼 개인의 고민이 펼쳐지는 방식이며, 이러한 방식 속에서 19세기 시대 상황을 진단해볼 수 있다.

 

누구에게나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어처피 잘 나가는 인간들에게 이 물음은 자신들의 가슴을 때릴 수 없다. 이 물음에 긍정하든 부정하든, 철저히 망가진 인간들만이 이 물음에 진지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다. 물론 부처와 같은 예외적인 인물도 있기는 하다. 어쨌든 내가 최근에 도달한 결론 중 하나는 동양이든 서양이든 윤리학은 사기극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전제로 시작한다. 그 전제를 부정하게 되면서 니체에 대해서도 약간이나마 관심을 갖게 되었다.

 

물론 나의 결론은 니체와 다르다. 어쨌거나 그는 삶을 카오스로 봤다. 이때 그 모든 가치 체계에 어떤 객관성을 부여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가치 체계가 없다면, 공동체의 삶은 불가능하다. 누군가는 삶의 카오스 속에서 새로운 가치 체계를 생성해내야 한다. 그 누군가는 바로 '진정한 철학자'들이다. 진정한 철학자들은 '밥은 먹고 다니냐?'라는 물음을 억압한 채 상대방을 젊잖게 대하는 대학의 교수들일 수 없다. 니체에게 진정한 철학자는 대세에 속하지 못했지만 '힘을 향한 의지(Will to Power)'의 속성을 지닌 인간이다. 그러한 의지를 가진 자만이 삶의 카오스에서 일시적이나마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어찌 보면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문구 속에는 자신을 예수화하는 동기도 숨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 자신을 진정한 철학자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힘을 향한 의지'가 도대체 뭘까? 여기에는 존재론적 입장, 해석학적 입장, 인식론적 입장, 심리학적 입장에 따른 다양한 해석이 있다. 니체 자신도 '힘을 향한 의지'를 구체적으로 논한 적이 없다. 그는 아마도 그 개념이 부분적인 논증 방식이 아니라 자신의 책에 녹여낸 개인적 삶의 전 과정을 파악할 때 알게 되는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나마 '힘을 향한 의지' 개념을 심리학적 측면에서 구체화시킨 작업이 BGE에 함축되어 있다.

 

BGE는 니체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한 번은 거치게 되는 책인 까닭에, 여러 판이 있다. 내가 본 것은 독일 훔볼트 대학의 호르스트만과 노만이 번역하고 편집한 것이다.

 

Nietzsche, F.(2002), Beyond Good and Evil, Prelude to a Philosophy of Future, edited by Rolf-Peter Horstmann & Judith Norman, Cambridge University.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하면서 니체를 소개한 부분은 이 책의 백미라 할 수 있다. 니체의 팬이라면 누구나 BGE를 한 번은 거치게 된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주장이 니체가 살아 있던 당시에도 해당하는 것일까? 당시에 그의 팬은 얼마나 되었을까? 호르스트만은 니체를 소개하면서 이러한 물음도 다루고 있다.

 

일명 니체의 대표작으로 거론되는 [짜라투스트라]의 세 파트는 1883년에 출간되었다. 출간된 이후 3년 동안 팔린 총 부수는 약 60권이었다. 비참한 판매 부수라고 할 수 있다.

 

물론 19세기 출판 시장을 지금과 비교할 수는 없다. 문맹률이 높았던 까닭에 아무나 책을 읽을 수 없었다. 또 책을 찾는 사람들의 지식 수준은 현재의 일반 대중보다 높았던 까닭에, 책의 질도 높았다. 하지만 19세기 말에 이르면, 백만부 이상의 판매 부수를 자랑하는 베스트셀러 작가들이 출현하게 된다. 산업의 확장도 이에 대한 원인으로 거론 될 수 있지만, 유럽의 언어와 국가의 분포도 한 몫을 한다. 많은 식자층이 다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니체가 요양 생활을 했던 스위스에서 출판된 책의 독자층은 스위스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 및 독일에 걸쳐 분포되어 있었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3년 동안 60권 정도가 팔렸다는 것은 지금의 니체의 명성에 비춰볼 때 최악의 판매 부수라 할 수 있다.

 

[짜라투스트라]의 네 번째 파트는 1885년에 출판되었으며, 1892년까지 약 40부가 팔렸다고 한다. 제아무리 유행이라는 것을 무시하는 작가라고 하더라도, 이쯤되면 새로운 시도를 할 수밖에 없다. 니체의 BGE를 보면 그러한 시도가 보인다. 어쩌면 그는 BGE를 쓰면서 '이 번에는 터지겠지'라는 꿈을 꿨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BGE는 출간된 후 1년 동안 114부만 팔렸을 뿐이다. 그럼에도 BGE는 니체가 죽기 전까지 가장 많이 팔린 책이었다.

 

BGE에 걸었던 기대가 물거품이 되자, 니체는 1887년 가스트(P. Gast)에게 다음의 문구를 담은 편지를 썼다.

 

"Instructive! Namely, they simply don't want my literature."

 

만약 니체가 지금 이 땅에 산다면 과연 출판이나 할 수 있었을까? 니체 전집을 출판한 곳에 의뢰를 하더라도 거절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출판 사업은 이윤을 남겨야 하는 것이며, 더욱이 신문과 방송, 권력 집단에 잘 길들여진 이 땅의 대중에게 '벗어남(deviation)'을 지향하는 스타일은 먹힐 수 없기 때문이다.

 

기록이나 하나 세워야 하겠다. 총 판매 부수 10권! 이 목적을 달성하기란 쉽다. 일단 자비로 출판 가능하다. 출판협회에 등록도 해야 하니 약 20부만 찍고, 10부만 팔고 끝내는 것이다. '논리란 세상이 우리에게 비춰지는 방식인가, 아니면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인가?' 이런 문구로 시작하는 글을 담은 공책이 있는데, 이것부터 총 판매부수 10권짜리로 기획할 예정이다. 총 판매 부수 10권짜리 10권만 내자. 지금 쓰고 있는 [세속화: 무종교인의 관점], [비판적 사고: 추론과 삶의 지도]를 끝내면, 총 판매 부수 10권짜리 10권 시리즈나 시작해야 겠다.

 

Thank you, 프리드리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