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 에세이/잡세상 잡글

허경영 논증

착한왕 이상하 2009. 11. 25. 21:51

최근 허경영이라는 자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즐거워한다. 그의 덕에 웃을 일이 자주 생기니, 한편 그에게 고마워해야 할 것이다. 허경영을 비웃든 말든, 최근 그가 말한 증언은 하나의 철학적 논증을 요구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고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팝아티스트 마이클 잭슨 등이 죽기 전 자신을 찾아와 이 나라의 안위와 인류의 평화를 책임져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이 허경영을 직접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허경영이 봤다는 것은 그들의 영혼이다. 이것이 만약 사실이라면, 우리는 영혼에 관해 무엇을 얘기할 수 있을까? 또 허경영을 둘러싼 사회적 잡음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 영혼 개념에 대해 먼저 살펴보자.

 

죽은 사람이 가족이나 친구 앞에 나타났다는 일화는 사방 도처에서 발견된다. 그렇게 산 사람 앞에 나타난 것을 ‘유령(幽靈)’이라 부른다. 유령이 정말 존재하기 위해 가정되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동양에서는 ‘혼()’이라는 것이, 그리고 서양에서는 ‘영혼(靈魂)’이라는 것이 가정된다. 이 둘의 미묘한 차이를 따지는 것에 비해 공통점을 논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다. 그 공통점이란 무엇인가?

 

• 영혼은 죽은 후에도 남게 되는 어떤 것이다.

 

개인적으로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하지만 영혼을 둘러싼 여러 얘기는 흥미롭다. 그런 얘기는 선과 악, 죽음과 공평성, 개인의 원한과 사회 등에 관한 특정 집단의 이해 방식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해 방식은 다양하지만, 영혼은 죽은 후에도 남게 되는 어떤 것이라는 생각은 여러 문화 집단에 거의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 영혼이 정말 있다면, 그것은 왜 죽은 후에도 소멸되지 않는 것일까?

 

책상은 분해되면 더 이상 책상의 기능을 할 수 없다. 책상의 잔해들을 계속 쪼개어 나간다고 가정해 보자. 만약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것이 발견된다면, 그것은 책상이 파괴 이후에도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영혼도 파괴 이후에 남게 되는 어떤 것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러나 책상이 파괴된 이후에 남게 되는 어떤 것이 책상의 기능을 가능케 해준 것은 아니다. 이는 영혼이 육체가 썩은 후 남게 되는 어떤 것은 아님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영혼은 생각과 경험을 가능케 해주는 어떤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영혼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다. 이 때문에 영혼을 그 스스로 존재 가능한 실체(substance)로 가정하는 철학적 전통이 있는 것이다. , 영혼의 존재는 육체에 의존적이지 않다. 다만, 영혼의 주요 기능으로 여겨지는 경험과 생각은 육체에 의존적이다. 눈과 귀가 없다면, 앞을 볼 수 없고 소리를 들을 수 없다. 따라서 영혼을 가정하는 경우에도, 영혼만으로 경험과 생각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또 영혼 없이 육체만으로 경험과 생각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영혼은 살아생전에는 육체에 구속된 정신적 실체이며, 죽은 후에도 남게 되는 것으로 가정된다.

 

죽은 자의 영혼은 살아생전의 경험을 이어갈 수 있는가? 아니면 죽은 후의 영혼은 영원히 파괴되지 않는 것, 즉 영원불멸한 것인가? 이러한 물음에 대답하는 방식은 종교별로, 지역별로 큰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차이를 살펴보는 것은 여기서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허경영의 증언에 함축된 영혼 개념이 기존의 영혼 개념에 반한다는 사실이다.

 

• 허경영의 증언에 따르면, 고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마이클 잭슨은 죽기 전 그를 찾아 왔다.

 

따라서 허경영은 그들의 유령을 본 것이 아니다. 유령에 관한 일화가 영혼의 존재에 대한 증거로 거론될 수 있다면, 허경영의 증언은 영혼의 존재에 대한 증거로 거론될 수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가 본 것은 무엇일까? 허경영은 김대중, 노무현, 마이클 잭슨이 그를 방문했다고 주장한다. 물론 정말 그들이 허경을 만난 것은 아닌 까닭에, 허경영은 그들의 영혼과 조우했다는 가정을 쉽게 포기 할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기존의 영혼 개념을 수정해야 한다.

 

• 죽은 후에도 남게 되는 영혼은 경우에 따라서는 죽기 전에도 떠돌아다닐 수 있다.

 

살아서도 영혼을 육체에서 이탈시켜 여러 세계를 돌아다닐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특정 문화 집단에서는 영혼을 육체에서 이탈시켜 여러 세계를 돌아다닐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가정된다. 바로 샤먼들이다. 그런데 김대중, 노무현, 마이클 잭슨이 샤먼은 아니었다. 그들이 사람을 선동하는 방식에서 굿판과 비슷한 측면을 발견할 수는 있지만, 이것이 그들을 샤먼으로 볼 수 있는 증거는 될 수 없다. 따라서 위 가정은 다음과 같이 수정되어야 한다.

 

• 죽은 후에도 남게 되는 영혼은 경우에 따라서는 죽기 직전에 자유롭게 떠돌아다닐 수도 있다.

 

죽기 직전에 육체가 영혼을 구속하는 힘이 약해진다고 하면, 영혼은 육체를 이탈하여 떠돌아다닐 수도 있다. 이때 김대중, 노무현, 마이클 잭슨의 영혼이 죽기 진적에 허경영을 만났다는 것은 일단 설명된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 같이 모종의 의무감으로 허경영을 만나고 이승을 하직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허경영에게 이 땅의 안위와 인류 평화를 부탁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대답해야 할 물음이 있다.

 

• 왜 하필이면 김대중, 노무현, 마이클 잭슨의 영혼은 죽기 전에 허경영을 만난 것일까? 그들이 정말 허경영이 인류 평화를 책임질 인물로 믿었다면 평소에 그를 만났어야 마땅하지 않는가?

 

이에 대한 답으로 육체의 구속이 약해졌을 때 영혼은 위대한 영혼을 감지해낼 수 있다는 가정을 세워볼 수 있다. 하지만 왜 하필이면 이 좁은 한반도를 시끄럽게 하는 뉴스의 인물들만 꼭 죽기 전에 허경영을 찾아 나서는가? 허경영이 조금의 진정성도 갖고 있지 않는 사기꾼이라면, 그의 증언은 죄다 거짓말이다. 하지만 이를 받아들이려면, 위 물음에 답해 줄 수 있는 또 다른 가정은 없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가정은 있다.

 

• 죽기 전 김대중. 노무현, 마이클 잭슨의 영혼을 움직인 제3의 힘이 있다.

 

그러한 제3의 힘은 무엇일까? 만약 그것이 전지전능(全知全能)한 신()이라면, 허경영은 예수와 같은 인물이 된다. 그런데 전지전능한 신이 김대중, 노무현, 마이클 잭슨의 영혼을 빌려 허경영에게 인류의 평화를 책임져야 한다는 의무감을 강조할 이유는 없다. 신의 자식이라 일컬어지는 예수가 허경영과 같은 증언을 했다는 기록이 있는가? 없다. 신의 자식이 아버지와의 대화를 굳이 다른 사람의 영혼을 빌려 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기 전 김대중, 노무현, 마이클 잭슨의 영혼을 움직인 제3의 힘은 신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 저승의 영혼들은 이승을 걱정하여 사람들을 관찰하고 있다. 영혼들은 이승의 사람들과 직접적으로 의사소통을 할 수 없다. 하지만 육체의 구속력이 약해진 사람들, 곧 죽기 전 사람들의 영혼을 메신저로 삼을 수 있다. 아직 저승에 도달하지 못한 이들 메신저 영혼은 이승을 책임질 현자들을 찾아 저승의 메시지를 전하는 역할을 한다.

 

위처럼 가정한다면, 허경영의 증언은 정합적으로 설명된다. 김대중, 노무현은 평소 허경영을 존경하지 않았다. 마이클 잭슨은 허경영이 누군지도 몰랐다. 하지만 죽기 전 그들은 저승으로부터 허경영에게 인류의 평화를 부탁한다는 저승의 메시지를 전달하라는 명령을 수행한 것이다.

 

허경영의 증언이 메신저 영혼 가설로 설명될 수 있다고 하여 받아들여 하는 것일까? 아니다. 설령 허경영이 진실로 고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팝아티스트 마이클 잭슨의 영혼이 자신을 찾아왔다고 믿는 경우에도, 그의 증언은 다른 이에게는 쉽게 사실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 허경영 증언의 허구성은 다음의 가정만으로도 쉽게 설명될 수 있다.

 

• 허경영은 과대망상증 환자이다.

 

허경영이 거짓말쟁이가 아니라고 할 때 위 가정만으로도 그의 증언은 허구가 된다. 과대망상증으로 인해 김대중, 노무현, 마이클 잭슨의 영혼을 만났다는 믿음이 그의 마음에 형성되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때 사람들이 허경영의 증언에 대해 즐거워하는 것은 과대망상증 환자에 대한 비웃음에 기인한 것이다. 하지만 허경영의 증언에서 배울 것도 있다. 그는 과대망상증에 부합하는 언행을 일관적으로 고수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진정성을 갖춘 사람이다. 허경영을 비웃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무릇 사람은 진정성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에게 그 진정성은 자신의 목적 달성에 집중되어 있다. 따라서 과대망상증에 진정으로 충실한 허경영을 비웃을 때 그 비웃음은 한 번쯤 우리 자신에 대한 비웃음이 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교훈을 얻는다.

 

• 누군가 그대에게 ‘진정성’을 강조하거든, 그 진정성이 그의 목적 달성에만 국한된 것인지, 아니면 그대에게도 해당하는 것인지를 신중하게 고려하라. 만약 그 진정성이 그의 목적 달성에만 국한된 것인지를 모르고 그의 말을 따를 때 그대의 삶은 파멸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이승에서의 삶의 파괴는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르는 영혼의 파괴보다도 무서운 것이다.

 

이 교훈만 마음에 새겨 둔다면, 호사스럽게 귀를 즐겁게 할 수는 없을지라도, 멋진 이성의 살을 탐닉할 수는 없을지라도, 나를 알아주고 인사하는 이가 없을지라도, 세상이 나를 원하지 않을 때 내가 세상을 버릴 수 있으며, 또 세상이 나를 원할 때 내가 세상을 취할 수 있을지어다. 행복이라는 것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한 세상 편하게 살고 싶은가? 그렇다면 위의 교훈을 한 번쯤 되새겨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