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 에세이/인지와 경험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 개념: 철학적 물음들

착한왕 이상하 2016. 6. 6. 23:08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 개념

 

 

우주가 창조되기 전 오로지 신만이 존재했다면, 왜 하필이면 전지전능한 신은 특정 순간에 우주를 창조했을까? 신만이 존재했을 동안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신은 우주를 창조한 것일까?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의 시간 개념은 이러한 질문들에 답하는 것이 철학적으로 무의미함을 보이려는 동기에서 구성된 것이다. , 시간은 신의 피조물인 인간 마음의 산물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념론적 시간 개념(idealogical concept of time)의 주창자로 알려진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과거는 더 이상 없는 것이고 미래는 아직까지는 없는 것이라면, 시간의 세 가지 구분인 과거, 현재, 미래 중 어떻게 과거와 미래가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현재가 항상 존재했었고 결코 과거로 흘러가는 경우는 없다면, 그것은 시간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가 되어 버린다는 점에서 현재를 시간이라고 하자. 현재를 있다고 하는 이유가 곧 없게 될 것이라는 데 있다면, 어떻게 우리는 현재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위 인용문에서 ‘?’는 부정을 함축한 일종의 수사적 강조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때 다음과 같은 논증 형태로 위 인용문을 재구성해 볼 수 있다.

 

1. 과거와 미래는 지금 없다는 점에서 있다고 할 수 없다.

2. 현재가 항상 과거로 흘러가는 경우는 없다면, 현재는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시간이 아니다.

3. 과거가 되어 버린다는 점에서 현재가 시간이라면, 현재는 있다고 말할 수 없다.

4. 따라서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되는 시간이 정말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위 논증에서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전제 3]이다. [전제 3]의 일반적 해석을 따를 때, 그것은 다음과 같이 구체화된다.

 

하루에서 한 부분, 예를 들어 시계를 가지고 1시간으로 측정된 부분을 현재라고 하자. 1시간의 부분도 현재로 불릴 수 있으므로, 그 부분 이외의 것들은 지금 있다는 의미에서 실재한다고 할 수 없다. 그 한 시간의 부분을 1분이라도 하자. 1분의 부분도 현재로 불릴 수 있으므로, 그 부분 이외의 것들 역시 지금 있다는 의미에서 실재한다고 할 수 없다. 결국 현재라는 순간이 과거로 흘러가는 한, 그리고 그 순간이 정말 있다면, 그것은 기하학의 (point)’과 같은 존재다. 이 경우, 점과 같은 순간을 인식할 수 없을뿐더러, 또 그것이 과거로 흘러간다고도 할 수 없다. 따라서 과거가 되어 버린다는 점에서 현재가 시간이라면, 현재는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위 논증에 근거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결론은 무엇인가? 시간 개념은 단지 인간 마음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과거는 단지 지나간 것을 떠올리는 기억의 산물이며, 미래는 다가오거나 다가오기를 희망하는 기대의 대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시간은 전지전능하고 유일한 신의 속성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왜 하필이면 전지전능한 신은 특정 순간에 우주를 창조했을까?’와 같은 질문은 무의미하다.

 

지금까지의 논의에 따르면, 인간 마음의 산물로서의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 개념은 외부적 실재성을 결여한 것이다. 마음 바깥의 실재하는 것에서 시간의 측면은 없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시작과 종말의 방향성을 갖고 있는 기독교적 시간 개념을 모를 리 없다. 그의 <신의 도시(City of God)>에서 시간은 우주의 창조와 함께 시작된 것으로 나온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두 가지 시간 개념을 갖고 있었다고 말해야 한다. 하나는 마음 활동과 관련된 시간개념이고, 다른 하나는 신의 창조 행위와 관련된 시간개념이다.

 

우주가 창조되고 발달하는 과정의 측면으로서 시간은 신의 창조 행위와 관련되어 있다. 그 시간은 창조 시점이라는 출발과 종말로 이어지는 방향성을 갖고 있다. 신의 창조 행위와 관련된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은 시작과 끝이 있다는 점에서 유한하다. 따라서 신의 창조 행위와 관련된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 개념은 뉴턴의 것과 다르다. 뉴턴에 의하면, 절대적 시간은 공간과 함께 물질 이전부터 존재했고 물질이 사라진 후에도 존재한다. 물질 창조 이전부터 있던 무한한 시간은 신의 영원성이라는 속성과 관련되기 때문에, ‘시간이 우주에 있다는 것은 신이 우주를 서식처로 삼을 가능성을 배재하지 못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왜 세상에는 악이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을 약화시키기 때문에, 그래서 사후 구원의 문제를 약화시키기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다.

 

신의 창조 행위와 관련된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 개념은 신의 섭리가 방영된 우주 생성과 발달 과정의 측면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 시간 개념은 실재의 개관적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앞서 살펴본 관념론적 시간 개념, 즉 마음 활동과 관련된 시간 개념은 마음 바깥의 실재하는 것에서 시간의 측면은 없다에서 마음 바깥의 실재하는 것에서의 시간의 측면은 알 수 없는 것이다로 바뀌어야 한다. 실재하는 것으로서의 시간을 알 수 있는 것이 되면 될수록, ‘우주가 창조되기 전 오로지 신만이 존재했다면, 왜 하필이면 전지전능한 신은 특정 순간에 우주를 창조했을까?’와 같은 질문에 대해 답해야 하는 부담감이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점점 더 커지게 되기 때문이다. 사실 마음 활동과 관련된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 개념은 처음부터 그러한 질문을 피하려는 목적으로 고안된 것이다.

 

마음 혹은 마음의 힘이나 운반자로서의 영혼의 존재론적 위상을 논하는 것은 배재하자. 시간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논의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마음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우주적 마음이나 영혼을 다룰 필요가 없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마음 현상을 그저 의식적인 것으로 대체해 생각한다면, 마음 활동과 관련된 시간 개념에서 지금무엇에 주목하는 의식의 간격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상상 속의 대상이든 외부의 실재성을 가진 대상이든, ‘지금이라는 의식은 그것을 주목하는 동안에 지속되기 때문이다. 의식의 간격이 외부 상태의 변화를 감지하는 것과 관련되더라도, 그 간격에 대응하는 실제 변화의 간격도 있다고 단언할 수 없다. 그렇게 단언하는 경우, 신의 창조 행위와 관련된 객관적 시간의 측면이 인식되는 것이며, 이때 아우구스티누스가 피하려고 했던 물음들이 되살아날 여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또한 마음 활동과 관련된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 개념을 문헌적 연구에 근거해 관념론적으로 해석한 철학자들의 모든 작업은 허황된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는 의식의 간격에 기하학적 추리 및 추상화 작업을 적용시켜 마치 점처럼 취급 가능한 가상의 현재를 구성해 볼 수 있다. 또한 그러한 가상의 현재들로 구성된 선분을 구성해 볼 수 있다. 그 선분 상의 임의의 점도 지금이라는 의식 간격의 중앙이 될 수 있다.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다고 하자. 그 기억의 내용 전체 혹은 일부는 의식의 간격을 구성하며, 지금으로 인식된다. 이때 그 간격의 중앙은 가상의 현재로 취급된다. 이러한 사고 실험을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 개념에 더할 때, 과거를 기억한다는 것은 과거를 지금으로 현시화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지금으로 현시화된 과거의 내용들을 주목할 때, 그 내용이 어떻게 과거 사건을 표상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비가역적인 외부 상태 변화의 실재적 측면으로서의 시간은 마음 활동과 관련된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 개념에서는 직접적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지금으로 현시화된 과거 내용이 왜 과거 사건을 표상하는지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문헌을 제아무리 뒤져보아도 대답될 수 없는 문제이다. 따라서 마음 활동과 관련된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 개념이 과거, 현재, 미래라는 방향성을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도 없다.

 

지금이라는 의식의 간격 중앙들로 구성된 가상의 현재들로 구성된 선분을 가정해 보자. 그 선분 상의 어떤 점도 지금으로 현시화 가능하다면, 과거와 미래는 단지 그 점에 위치하지 않은 상대적 현재들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의식의 간격들에서 추상화된 기하학적 시간 개념은 잠재적 현재들로 구성된 선분들의 이어짐과 같은 것이며, 그러한 선분들의 이어짐은 신적인 영원성은 아니지만 천사적인 것에 가까운 영원성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어쩌면 그러한 영원성이야말로 사후 구원의 대상으로 여겨진 인간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천사적인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1. 실재로서의 시간, 즉 우주의 창조와 시작된 시간은 알 수 없는 것이다.

2. 마음 활동과 관련된 시간 개념은 신의 창조 행위와 관련된 시간을 반영할 수 없다.

3. 인간의 마음은 신의 창조 행위에 의존적이지만, 신의 창조 행위가 인간 마음에 의존적인 것은 아니다.

4. 신의 창조 행위와 관련된 시간이 처음과 끝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성서와 계시를 통해 알 수 있더라도, 그 처음과 끝의 구체적 전개 과정은 신의 창조 행위에 의존적이지만 이에 대한 역을 허용하지 않는인간 마음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위 논증은 성서의 창세기를 은유 체계로 간주해야지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강화시켜 준다. 또한 신의 섭리를 성서가 아닌 자연에서 찾아 볼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과연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러한 가능성을 적극 지지했을까? 이 물음에 대해 긍정하기는 힘들다. 신의 창조 행위에 따른 우주의 전개 과정이 인간의 지적 탐구 대상이라는 관점은 위 논증에 함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창세기를 은유 체계로 규정한 것은 교회 수장으로서 현명한 판단이었다. 그러한 규정 방식을 통해 창세기의 연대기를 둘러싼 논쟁을 잠재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덧글

어떤 문화든 방향성을 갖는 시간 개념과 순환성을 갖는 시간 개념 모두 포함한다. 어떤 문명 혹은 세계관은 이러이러한 시간 개념을 갖고 있었다고 할 때, 이것은 단지 그 시간 개념이 그 문명 혹은 세계관에서 대세였음을 뜻할 뿐이다. 기독교 문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고대 기독교나 유대교에서 종말은 새로운 출발로 해석되기도 했다는 점에서, 고대 기독교나 유대교에도 무한하거나 순환적 시간 개념이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Brettler, M.(1995), The Creation of History in Ancient Israel, Routledge.

 

 

<철학적 물음들>

(* 난이도 하, ** 난이도 중, *** 난이도 상)

 

물음 1(*). 빅뱅 가설에 따르면 우주의 역사는 아주 오래 되었다. 개인적으로 빅뱅 가설을 과학적으로 검증된 이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더욱이 우주의 역사가 반드시 빅뱅을 가정해야 가능한 것도 아니다. 빅뱅 가설의 진위 여부와 무관하게 지구의 역사가 인류의 역사보다 더 오래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때 왜 하필이면 신은 그렇게 뒤 늦게 인류가 나오도록 우주를 창조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러한 질문에 대해 의식하지 못했다. 이에 대한 이유를 설명해 본다면?

 

물음 2(*). 태초가 수백억 년 전이든 수천 년 전이든, 태초의 시기 문제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신학적으로 무의미한 것임을 논하고, 이때 그에게 성경은 진리를 담은 은유 체계이지 문자 그대로 해석할 대상이 아님을 설명하시오.

   

물음 3(**). 일상적 시간 개념은 과거, 현재 미래가 단절된 것이 아닌 방향성을 갖고 있음을 함축한다. 기억과 기대에 근거해 시간을 마음의 산물로 이끌어낸 아우구스티누스의 방식은 그러한 방향성을 설명하지 못한다. 왜 그런지를 논증해 본다면?

   

물음 4(***). 서양 철학사에서 관념론적 시간 개념을 주장한 또 다른 인물을 들라면, 칸트를 빼먹을 수 없다. 칸트는 시간의 방향성을 어떤 식으로 설명해 낼 수 있었을까? 이를 하나 둘, , 등의 셈(counting)’ 활동을 가지고 답해 보시오. (대학 강단이나 강연회에서 칸트로 밥벌이를 하는 사람일지라도 이 물음에 대해 정확히 답할 수 없다면, 그는 칸트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다. 이 물음을 답하는 데, ‘오성과 같은 용어가 등장할 필요도 없다. 사실 오성이라는 번역은 일제 강점기 시대의 산물이며, ‘이해력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낫다. ‘직관과 같은 용어도 이 물음에 대해 답하는 데 등장할 필요가 없다. 사실 그러한 용어들은 칸트 생각의 핵심을 거대한 이론 체계로 포장하기 위한 수단과 같다. <순수 이성 비판>과 관련해 칸트 생각의 핵심은 칸트 방식으로 ‘1+1=2’, ‘삼각형은 180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으로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래서 그 생각의 핵심은 사실 20쪽 분량으로 정리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 위 글은 2014년 12월 9일에 올린 것을 수정 보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