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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 충족 1. 어느 거지의 삶의 전략(수정)

착한왕 이상하 2016. 8. 1. 21:49

 

 

 

 

욕망 충족 

 

1.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를 추구하는 삶을 무조건 좋지 않은 삶혹은 비도덕적인 삶으로 규정할 수 없다.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쾌락 자체는 본래 선한 것이다라고 전제할 필요가 있을까? 쾌락 자체를 본래 선하다고 전제하는 것은 단지 쾌락에 따른 삶이 그 무엇보다 선한 것임을 주장하려는 사람에게만 필요한 것이다. 또한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은 행복을 최고의 가치로 가정한다. 만약 행복이 그저 다른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으로서 도구적 가치를 지닌다면, 이것은 그러한 가정과 부합할 수 없다.

 

최고의 가치로 가정된 것은 본래 선한 것이어야 한다. 에피쿠로스는 행복과 쾌락을 최고의 선으로서 일치시켜 자연스러운 쾌락에 따른 삶을 그 무엇보다 선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자체로 선한 것 혹은 다른 것과 무관하게 본래적으로 가치있는 것이 정말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해 긍정하는 어떤 사람이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를 삶의 전략으로 택했을 때, 그 쾌락주의를 추구하는 삶은 그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에 대해서도 가장 좋은 삶인 것이다. 이것은 내가 보이려고 했던 것이 아니다. 내가 보이려고 했던 것은 그저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를 추구하는 삶을 무조건 좋지 않은 삶 혹은 비도덕적인 삶으로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자연스러운 쾌락 추구를 삶의 목적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보이려고 했던 것은 결코 누구나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를 추구하는 삶을 살 때 행복하다는 것이 아니다. 내가 보이려고 했던 것은 다음과 같다.

 

특정 상황에 처한 어떤 사람은 자연스러운 쾌락 추구를 삶의 목적으로 삼을 수 있다. 불필요한 쾌락은 더 큰 고통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자연스러운 쾌락만을 추구할 것이다. 이렇게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삶에 큰 방해가 되지 않는다. 그가 자신에게 좋은 것이라고 선택한 삶은 이 점에서 무조건 비도덕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

 

쾌락 자체가 본래 선하다는 혹은 행복만이 최선의 가치를 지닌다는 주장은 무시하자. 이때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삶의 전략은 다음이다.

 

<자기중심적 삶의 전략>

다른 사람의 삶을 방해하지 않고, ‘의 삶을 만의 적소(適所)로 만들라.

 

자기중심적 삶의 전략은 행복한 삶과 관련된 여러 삶의 전략 중 하나이다. ‘자기중심적 삶의 전략을 구체화하는 것은 뒤로 미루자. 그것은 삶의 다른 전략들과의 비교를 통해서만 구체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그저 원하는 것’, ‘할 수 있는 것등 삶의 요소들이 에게만 국한된 전략을 자기중심적 삶의 전략으로 이해하자. 이러한 단순한 이해 방식만으로도 에피쿠로스 쾌락주의를 추구하는 삶의 전략자기증심적 삶의 전략으로 규정할 수 있다.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에 따르면, 행복한 삶은 우선적으로 만을 위한 것이다. 분별력을 발휘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삶에 국한된다. 물론 그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고려를 배제하지 않는다. 심지어 인간이 아닌 동물에 대한 고려도 배제하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고려하는 것은 자신의 행복한 삶을 위해 필요한 수단일 뿐이다. ‘자기중심적 삶의 전략을 택하는 경우, 그렇게 고려하는 것은 분별력을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확장할 것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이로부터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에 따른 삶이 다른 사람의 삶을 방해하는 것이라는 결론은 성립하지 않는다. 미래의 고통을 불러일으킬 불필요한 욕망을 억제한 경우의 자연스러운 쾌락자기 보존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2.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가 발생시키는 문제 중 하나는 실천하기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행복한 삶과 관련해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는 잘못된 것이며, 다른 이론, 실례로 욕망 충족 이론(desire-satisfaction theory)’은 올바른 것이라는 결론은 성립하지 않는다. 현대 행복론을 대표하는 이론 중 하나인 욕망 충족 이론의 윤곽을 살펴보기 전에, 언급한 문제를 분석해 보자.

 

에피쿠로스의 철학은 싯다르타의 철학과 닮은 점이 있다. 둘 다 삶을 위해 미리 주어진 자아와 같은 것을 부정한다. 에피쿠로스에게 자아란 원자들과 빈 공간의 상호작용에 의해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다. 싯다르타 역시 사후에 남게 되는 영혼과 같은 것을 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싯다르타에게 죽음은 업보(karma)에 따른 윤회 과정의 일부이다. 이때 불멸의 영혼과 같은 것을 가정하지 않고서도 윤회가 가능한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는 난제가 발생한다. 그러한 난제를 다루는 것은 여기서는 불필요하다. 다만 에피쿠로스에게 죽음은 끝인 반면, 싯다르타에게는 아니다. 이 때문에, 에피쿠로스에게 삶의 목적은 행복이지만, 싯다르타에게는 업보에 따른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탈이다. 하지만 둘 모두 각자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불필요한 욕망 억제를 강요한다. 에피쿠로스나 싯다르타의 말에 호감을 가지는 사람도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기중심적 삶의 전략을 택한 어느 거지의 일상생활을 살펴보자.

 

어느 잘생긴 젊은 거지가 있다. 그를 불쌍히 여긴 사람들이 그에게 적선을 하려는 경우, 그는 그들을 째려보고 지나친다. 그는 절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구하는 경우가 없다. 먹는 것도 쓰레기통을 뒤져 해결한다. 이때 그의 눈은 유독 반짝거린다. 상한 음식물을 걸러 내기 위해서이다. 그 이유는 단순히 그의 건강 때문이 아니다. 상한 음식물은 부패의 원인이 되어 복통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절대 과식을 하지 않는다. 하루에 한 끼 식사가 끝나면 공원 벤치에 앉아 사색에 잠긴다. 냄새가 난다고 다른 사람들이 투덜거리면 조용히 그 자리를 뜬다. 이런 그가 가장 아끼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그의 손이다. 손으로 음식물도 걸러내고 자위행위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위 거지의 삶의 방식은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쾌락만 유지한다는 점에서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에 따른 방식이라 할 수 있다. 거지의 삶의 동경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뿐더러, 설령 동경하더라도 실천하기란 매우 힘들다. 당장 주변의 평판 때문에도 실천하기 어렵다. 물론 평판의 기준도 시대별로 다르다. 에피쿠로스가 살았던 시대에는 위 거지의 삶의 방식도 일부에게는 존경의 대상이었다. 소크라테스만하더라도 평소에는 거지차림을 하고 맨발로 돌아 다녔다고 한다. 또한 에피쿠로스, 소크라테스 모두 자신들을 추종하는 무리를 가졌다. 현재 평판의 기준은 그들이 살았던 시대와는 다르다. 현재 평판의 기준을 명확히 하지 않더라도, 거지는 완전히 고립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한 고립된 삶의 방식을 현대인 다수가 실천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신분제에서 벗어난 현대 사회의 개인들은 다양한 욕망을 충족할 권리를 지닌다. 욕망이 충족되었다고 해서, 행복한 삶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욕망 충족과 행복을 연관시키는 것은 현대인들에게 훨씬 더 친근하게 다가온다. 욕망 충족 이론이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보다 주목을 받게 된 실제적 이유는 딱 하나다. 욕망 충족 이론에서 이끌어 낼 수 있는 허용 가능한 삶의 전략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자기중심적 삶의 전략이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에서뿐만 아니라 욕망 충족 이론에서도 허용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 전략의 목적은 최소한의 자연스러운 쾌락의 획득과 유지가 아니라 특정 욕망의 충족이다. 이 점은 행복한 삶의 전략들이 다원적으로 해석 가능함을 암시한다. 이제 욕구 충족 이론의 전체적인 윤곽을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