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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의미: 고대 이집트인들의 사후 세계

착한왕 이상하 2015. 8. 13. 23:51

 

 

구원의 의미

- 고대 이집트인들의 사후 세계 -

 

기원전 2700년 바빌론의 통치자 길가메쉬(Gilgamesh)의 이야기는 사후 세계에 대한 고대인들의 관심을 보여 준다. 영생의 비밀을 찾던 그는 죽음이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이라는 신탁을 받게 된다. 사후 세계란 없다는 것이다. 사후 세계가 없다면, 사후 구원의 가능성도 없다.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다. 선과 악, 공평함과 부당함, 현명함과 어리석음을 구분하고 전자를 추구하려는 노력도 죽음과 함께 덧없는 것이 되어 버릴 수 있다. (죽음은 삶을 허무한 것으로 만든다는 입장은 유대교를 이해할 때 필수적인 전도서 코헬렛(Qoheleth)에서 엿볼 수 있다. 코헬렛은 일반적으로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고대 유대인들의 종교서로 규정된다. Grabbe, L.L.(2008), A History of the Jews and Judaism in the Second Temple Period, Vol. 2, Bloomsbury.) 살아 있는 동안 선을 행해야 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기독교는 이슬람교와 함께 이러한 의문을 잠재우기 위해 고안된 종교이다. 두 종교의 공통점은 다음과 같다.

 

사후 구원이 가능하기 때문에, 선은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

 

위와 같은 생각은 기독교 문화가 번성하기 이전의 고대 이집트 문화에도 있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의 세계 이해 방식에 따르면, 각 사람은 육체, ‘(ba)’라고 불린 개인의 성격 및 기억 등 의식과 관련된 것, 그리고 (ka)’라고 불린 생명력의 결합체이다. ‘는 사람이 살아 있는 것으로 분류되기 위한 보편적인 힘이다. 반면에 육체와 는 개인의 동일성 문제, 즉 한 개인이 스스로를 다른 개인과 구분하고 고유성을 확보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의 세계 이해 방식에서 흥미로운 점은 육체 중심이나 의식 중심의 기준만으로는 개인의 동일성을 확보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육체는 다른 물체와 마찬가지로 동시에 서로 다른 장소에 위치할 수 없다. 또한 두 육체가 동시에 하나의 장소에 위치할 수 없다. 각 사람의 육체는 이러한 조건을 만족한다. 하지만 이러한 육체 중심의 기준만으로 개인의 동일성은 확보될 수 없다. 사람마다 성격에서 차이를 보인다. 또한 사람마다 각자의 경험이 다르기 때문에 기억도 다르다. 이러한 의식 중심의 기준만으로 개인의 동일성을 확보할 수 없다. 육체 중심의 기준이나 의식 중심의 기준은 단지 개인의 동일성에 대한 필요조건일 뿐이다. 육체와 가 분리된 상태의 사람이란 없으며, ‘가 육체의 특징들에 수반된 것도, 그리고 가 육체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일상생활에서 자신의 동일성에 관해 묻는 사람은 없다. 대상들을 지각하는 동안 대상들의 관계 속에서 대상들의 지속성과 변화를 경험하며, ‘라는 것은 그러한 시공간적 경험 속에 내재하는 동시에 대상들과 구분된다. 시공간적인 지각 경험, 경험 환경, 생존 과정에서 길들여진 행동 패턴 등을 무시한 채, 육체 중심 혹은 의식 중심의 기준을 설정해 개인의 동일성을 규정하는 방식의 철학은 일상성과 거리가 멀다. 하지만 그렇게 규정하려는 방식의 철학이 서양 지성사의 한 장을 차지했다. 이렇게 된 이유 등을 따지는 것은 다루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대 이집트인들이 개인의 동일성에 대한 유일한 충분조건을 찾으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반면에 현대 철학자들 다수는 그러한 충분조건을 찾으려고 한다.

 

육체는 개인의 동일성에 대한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이 아니다. ‘역시 개인의 동일성에 대한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이 아니다. 이러한 이해 방식에 따를 때, 육체만 사후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또한 육체와 분리 가능한 것으로 가정되곤 하는 영혼만이 사후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 점은 고대 이집트인들의 사후 세계 관점에 잘 드러나 있다. (원자론이나 스토아 사상에서 영혼은 물질 현상에 수반되는 것이다. 원자론에 따르면, 영혼은 단지 원자들의 운동에 기인한 것이다. 스토아 사상에 따르면, 영혼을 가정하여 설명되는 모든 현상은 공기 중의 생명력인 프네우마(pneuma)가 육체로 퍼져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다. 그 어떤 경우에나, 영혼은 육체가 소멸한 후에도 남게 되는 것이 아니다. 육체가 소멸한 후에도 남게 되는 영혼 개념은 플라톤의 중기 철학에 잘 나타나 있다. 플라톤 등에 기원을 둔 불멸의 영혼 개념은 이후 여러 종교와 서양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한 영혼 개념은 1439년 플로렌스 가톨릭 협의회에서 정죄계를 인정하면서 기독교의 핵심 개념이 되었다. 하지만 사후 구원의 대상을 영혼으로 간주하는 입장은 종교 개혁기 루터 등의 비판 대상이 되었다. 기독교에서 사후 구원론의 핵심은 사후 부활 가능성이며, 그러한 부활의 대상이 무엇인지는 시대별로, 교파별로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

 

사람이 죽을 때, ‘는 입을 통해 빠져 나간다. 개인의 의식이라고 할 수 있는 는 신들이 살고 있는 지하 세계를 향해 출발한다. 보편적인 생명력과 달리, ‘는 육체와 분리되어 계속 지속할 수 없다. 사람들은 사자(死者)진리의 방에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도록 사자를 미라로 만들어야 한다. 진리의 방에서 이루어질 심판을 통해 사자가 부활하려면 사자의 육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심판을 통해 부활한 사자는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생전의 신분을 유지한 채 영생을 할 수 있다. 여기서 다음을 엿볼 수 있다.

 

고대 이집트의 종교는 당시 사회의 위계질서를 정당화해 주는 지배 원리로 기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당시 사회 질서에 반대한 인물들은 선한 사람이 아니며,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만약 네가 무신론자이거나 무종교인이라면, 당시에는 반사회적이거나 사회에 무관심한 인물로 몰렸을 것이다. 그 어떤 종교든 그것의 초기 형태는 이렇듯 교리의 반경 내에 선을 가두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종교가 사회의 지배 원리로 기능하며,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 속에서 사람들이 현세 구원보다는 내세 구원에 관심을 갖게 된 시기는 농경 시대 이후로 간주된다. Wade, N.(2009), The Faith Instinct: How Religion Evolve and Why It Endures, Penguin.)

 

사자의 미라를 만들 때, 이집트인들은 심장은 따로 떼어 보관한다. 심장은 지적 능력 및 도덕감을 주관하는 기관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사자의 는 후손들이 남긴 지도와 행동 수칙에 따라 진리의 방에 도착한다. 지하 세계의 신인 오시리스(Osiris)는 다른 신들을 소집한다. 저울의 한 쪽에 사자의 심장을, 다른 쪽에 깃털을 올려놓는다. 그리고 사자의 는 신들의 명령에 따라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거짓을 일삼지 않았다’, ‘나는 악을 행하지 않았다’, ‘나는 동료들을 가난에 빠트리지 않았다등을 낭송한다. ‘의 낭송이 거짓이 아니라면, 저울은 균형을 이루게 된다. 저울이 균형을 이루게 되면, 신들은 사자의 와 육체를 결합하고 를 불어 넣어 사자를 되살린다. 이렇게 부활한 사자는 신들과 함께 생전의 신분을 유지한 채 고통 없이 영원히 살게 된다. 그가 생전에 노예였다면 노예로서 왕을 모시고 영원히 살게 된다. 다만 그가 모시게 될 왕은 신들의 사후 심판을 거친 현자(賢者)인 것이다. 저울이 평형을 이루지 않는 경우, 사자의 는 구원을 받지 못하고 소멸하게 된다. 구원을 받지 못하는 인간은 결국 두 번 죽는 셈이다. 첫 번째 죽음은 육체의 죽음이며, 두 번째 죽음은 그의 개성이자 의식인 의 죽음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의 사후 구원은 신들과 인간들의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구원의 심판은 신들의 몫이지만, 사자의 육체를 보존하려는 인간들의 노력 없이는 사자의 구원은 불가능하다. 구원의 대상은 육체, ‘’, ‘의 결합체인 개인이다. 그것은 사후에도 사라지지 않는 불멸의 영혼과 같은 것이 아니다.

 

고대 이집트인들의 사후 구원 개념은 신의 전지전능함이 전제된 기독교나 이슬람교의 사후 구원 개념과 다르다. 하지만 그것은 선이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사후 구원과 연관시킨 최초의 인류학적 흔적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