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음은 나의 개인 원고 <안과 밖>의 부록으로 사용할 <마셜 홀, 왕립 협회, 란셋: 홀의 반사 작용 연구의 다양한 수용 방식>의 일부이다. 이곳에 적합한 내용일 수 있어 해당 부분만 올린다. 우리나라 의대 교육을 보면, 환자의 고통을 체험해 보는 간병 과정과 같은 것은 누락되어 있다. 특히 큰 병원의 시스템은 물건 찍는 공장처럼 돌아가는 측면이 강하며, 환자의 알 권리는 여전히 무시당하고 있다. 이런 문제를 바꾸려는 워클리와 같은 의사는 거의 없다.
토마스 워클리의 란셋
토마스 워클리(T. Wakley, 1795-1862)는 오늘날 종양학, 신경병 및 감염병 분야에서 권위를 갖고 있는 의학 학술지 <란셋(The Lancet)>의 창시자이다. 데번 지역 부농의 아들로 태어난 워클리는 1815년 런던으로 건너가 거이와 세인트 토마스 병원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그 병원은 낭만주의 시인 존 키츠(J. Keats)가 의학을 공부했던 곳이기도 하다. 1817년 외과 의사 자격증을 취득한 워클리는 1820년 결혼했는데, 부유한 사업가 장인 덕에 개업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병원은 6개월도 지나지 않아 풍비박산 나고 만다(Sprigge, 1899). 1820년 8월 27일 괴한들이 침입해 병원으로 사용하던 그의 집 저체를 불태웠다. 괴한들이 워클리를 공격 대상으로 삼은 이유는 아직도 미궁으로 남아 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그 괴한들이 수상 및 내각 구성원을 암살하려다 실패해 교수형당한 다섯 명 음모자들의 잔당들이거나 지지자들일 것으로 추측한다. 가면을 쓴 어느 인물이 교수형당한 그들을 참수했는데, 그 솜씨가 해부학 지식을 가진 의료 종사자일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괴한들은 워클리를 그 인물로 착각했다는 것이다. 한편 워클리는 보험 회사와 법적 분쟁에 휘말렸다. 보험 회사는 당시 사건을 워클리의 자작극이라고 몰아붙였기 때문이다. 법적 분쟁에서 승소해 피해보상을 받는 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워클리의 일대기는 법적 소송으로 꽉 차 있는데, <란셋>을 출간하면서 의사로서 다른 의사들과 법적 분쟁을 불사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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