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화와 역사 서술 방법론
귀족과 노예 혹은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사회적 구조가 19세기 중엽 이후 사회 계층의 다원화와 함께 붕괴되면서 탄생한 것이 ‘중산층’이다. 중산층의 확대는 직업 및 제도뿐만 아니라 가치 체계의 다원화도 가속된 시대적 상황을 상징한다. 그 상징성은 종교가 민중 위에 군림했던 세태에 대한 시대적 반발을 뜻한다. 여기서 19세기 중엽 이후의 세속화에 대한 두 가지 수용 방식을 구분해야만 한다.
• 그 하나는 세속화 과정을 철학적으로 정당화하려는 방식이며, 다른 하나는 시대적 대세 혹은 물결로 이해하는 방식이다.
전자의 수용 방식은 한 시대를 좋은 것 혹은 나쁜 것으로 정당화하려는 관점을 깔고 있으며, 그러한 관점과 맞물린 ‘시대정신’이라는 것은 종종 과거의 왜곡에 대한 원인이 되기도 한다. 피어슨의 사례가 세속화 과정의 부작용론을 뒷받침할 수 있다고 여기는 이들은 세속화 과정을 부정적으로 진단할 수 있는 사례만을 골라낸다. 그리고 자신들이 추구하는 이상향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러한 사례들을 사용한다. 사례의 이러한 사용 방식, 즉 자기 합리화의 수단으로 삼는 방식은 유럽 중심 사관이 굳어진 이후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실례로 ‘전통을 중시하는 자유주의자’들은 19세기 우생학과 같은 사례를 가지고 세속화 과정의 부정적 측면을 강조하면서 기독교 교리가 정치의 도덕적 뿌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정 사례를 자기 합리화의 수단으로 삼는 방식은 세속화 과정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들에게도 나타난다. 실례로 ‘전통을 중시하지 않는 자유주의자’들은 시장 경제와 구체적 권리 보장만으로도 원활하게 기능할 수 있는 사회가 인본주의의 마지막 단계라고 주장한다.
세속화 과정을 긍정적으로 혹은 부정적으로 평가하든, 세속화 과정의 역사적 특징들이 자기 합리화를 위한 수단이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러한 역사적 특징들은 마치 ‘필연적인 것’들로 둔갑하게 되고, 세속화 과정에 대한 긍정적 평가 방식과 부정적 평가 방식의 극단적 대립 양상만 남게 된다. 이때 세속화 과정의 실제 성격은 그러한 극단적 대립 양상 속에 가려지게 된다. 따라서 이 땅의 무종교인들이 서양 사상 및 종교와 맞물린 사안에 대해 논할 때 근대 이후에 탄생한 ‘서양적 역사 서술 방식’에 대한 그림을 갖고 있어야 한다.
(1) 역사를 규정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
펠로폰네소스 전쟁(Peloponnesian war)을 구체적으로 분석함으로써 후대에 교훈을 남겨 주고자하는 투키디데스(Thuchydides)의 소박한 방식보다는 ‘흥망성쇠의 보편적 발달 구조’를 가정하는 역사 서술 방식이 근대 이후에 주목을 받았다. 이러한 이유로 플루타르코스와 헤로도토스(Heredotos)가 근대 이후 서양 역사학의 아버지로 부활할 수 있었다. 플루타르코스는 자신이 존경하는 그리스인들의 고귀한 행적을 헤로도토스가 왜곡했다고 여겼다. 플루타르코스와 헤로도토스 중 누구의 기록이 더 정확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둘의 역사 서술 방식은 투키디데스에 비해 고증적이지 않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분석함으로써 후대에 교훈을 남기겠다는 투키디데스 장군의 정신은 근대 이후 역사 서술 양식으로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영원히 흥하기만 하는 곳은 없다. 이것은 과거 역사를 음미해 보면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로부터 흥망성쇠의 보편적 발달 구조가 있다고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실험 과학의 증거와 달리 사료와 같은 역사적 증거는 특정 조건 아래 재현 가능한 것이 아니고, 또 증거에 근거한 역사적 사실에는 실험적 사실과 달리 인간의 의도나 목적이 개입되어 있다. ‘15세기 국왕이 영국을 방문했다’와 같은 것이 아니라 ‘15세기 국왕은 이러이러한 의도 혹은 목적으로 영국을 방문했다’와 같은 것이 역사적 사실로 여겨진다. 따라서 역사적 사실에 ‘객관성의 칼날’을 대는 것은 쉽지 않다. 이로부터 사료에 근거해 수용 불가능한 역사적 사실을 선별해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결국 역사가는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현재를 가능하게 만든 경로를 진단하게 된다. 진단의 최종 결과는 ‘이러이러한 일반 성향’을 추정하는 것이지 ‘흥망성쇠의 보편적 발달 구조’를 밝히는 데 있지 않다.
소멸의 운명을 피할 수 없는 역사적 증거들에 근거하여 흥망성쇠의 보편적 발달 구조를 밝혀보려는 이가 있다면, 그는 어떻게든 역사를 규정하기 위한 보편적 원리를 전제해야 한다. 모든 역사적 증거들을 합해도, 그러한 보편적 원리가 얻어지지 않는다. 누가 그러한 원리에 매혹되는 것일까? 바로 현재의 특정 관점을 기준으로 과거를 평가하는 ‘현시점주의(presentism)’에 빠져 자기 시대를 정당화하려는 이들이다.
자기 시대를 부정적으로 정당화하려는 이에게 과거 어떤 곳의 시기는 미화의 대상이 되기 쉽고, 자기 시대를 긍정적으로 정당화하려는 이에게 과거는 현재를 위해 존재해야만 하는 암흑기로 비춰지기 쉽다. 18세기 중엽 이후 유럽이 세계무대의 중심축으로 자리 잡으면서, 많은 이들이 유럽 중심 사관에 빠졌다. 그들은 흥망성쇠의 보편적 발달 구조를 전제했고, 역사적 증거들은 그러한 구조를 정당화해주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이러한 분위기에 대한 강한 반발은 사료 등의 증거로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져온 경로를 추측할 수 있다거나, 적어도 수용 불가능한 역사적 평가 정도는 걸러낼 수 있다는 관점으로 끝나지 않았다. 목적이나 의도가 개입된 역사적 사실도 증거만 가지고 완전한 객관화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져온 경로를 확실하게 알 수 있다는 ‘실증주의적 역사 관점’이 그러한 반발로 나타났다.
흥망성쇠의 보편적 발달 구조를 가정하는 방식이 결여된 서술은 역사 서술의 자격을 가질 수 없다. 이를 받아들이면, 어떻게 되는가? 즉, 특정 원리를 가정하여 역사를 규정할 때만이 역사학이 성립한다는 관점에 역사가 종속된다면, 어떻게 되는가? 한 집단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고민 속에 탄생한 그 어떤 서술도 ‘역사적’이라는 명칭을 부여받을 수 없다. 오랑캐 개념을 탄생시킴으로써 중국의 정체성을 확립시킨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는 19세기나 20세기 초 서양 철학자들에게는 역사서가 될 수 없었다. 사기는 그저 기록이라는 내용만 갖고 있을 뿐, 흥망성쇠의 보편적 발달 구조를 보여주지 못한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구체적 사례를 분석함으로써 후대에 교훈을 남겨 주고자하는 소박한 방식 역시 역사 서술로서는 분류될 수 없게 된다. 왕의 잠자리까지 세세히 기록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도 역사 서술이 될 수 없다.
(2) 흥망성쇠의 공간적 순환 개념의 사장
‘헤로도토스의 역사 서술 방식’과 ‘근대 이후 유럽에서 유행한 역사 서술 방식’이 ‘흥망성쇠의 보편적 발달 구조’를 가정한다고 하여, 과연 그 둘이 동일한 것일까? 흥망성쇠에 관한 헤로도토스의 관점은 18세기 중엽 이후 유럽이 세계 경제의 중심 무대로 이동하면서 나타난 유럽 중심 사관과 같은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그의 역사 서술 방법에는 적어도 약자의 관점이 깔려 있다. 헤로도토스에게 다른 문화는 강자의 관점에서 관용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존경과 모방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는 유럽 중심 사관의 옹호자들과 달리 어느 곳이나 한 번은 흥하게 된다는 입장을 취했기 때문이다.
그리스의 시간 개념은 순환적 혹은 원형적이다. 따라서 헤로도토스가 생각한 흥망성쇠는 한 문명권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그에 따르면, 힘이 강한 지역과 약한 지역은 전쟁 등을 통하여 힘의 교차 관계를 맺게 된다. 힘이 강한 지역의 특성은 약한 지역으로 전파되고, 강한 지역은 반드시 망하게 되어 있으며, 약한 지역은 언젠가 흥하게 되어 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 서술 방식은 흥망성쇠의 순환 패턴을 보여준다. 흥망성쇠의 이러한 순환은 유럽 중심 사관과는 어울릴 수 없는 측면을 갖는다.
그리스의 시간 개념이 순환적이라 할 때 이것은 단순히 과거, 현재, 미래를 뜻하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그리스의 시간 개념은 본래적으로 모순적이다. 왜냐하면 과거, 현재, 미래라는 것은 일정한 방향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순환적 시간 개념은 단순히 과거, 현재, 미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가 조화로운 질서 상태와 무질서 상태를 끊임없이 반복하게 됨을 뜻한다. 즉, 그리스의 순환적 시간 개념이란 ‘변화의 패턴’과 관련되어 있다. 흥망성쇠의 패턴을 우주의 질서 상태와 무질서 상태의 반복적인 교차에 유비할 때 흥망성쇠의 공간적 순환을 가정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헤로도토스의 주장처럼 힘의 교차 관계에 의해 흥한 곳이 망하고 약한 곳이 쇠하게 된다면, 모든 지역이 동시에 흥하거나 망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게 되기 때문이다.
한 지역에 국한된 어느 시기의 독자성을 확보하기 위해 전 시기를 ‘암흑기’로 묘사하거나, 특정 시기의 위기를 유토피아의 도래를 위한 운명과 같은 것으로 묘사하는 방식은 헤로도토스의 역사 서술 방식이 아니다. 그러한 서술 방식은 시작과 종말, 태초와 최후의 심판을 전제한 기독교적 시간 개념과 맞아 떨어지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리스의 순환적 시간 개념을 미신으로 규정한 이후, 흥망성쇠의 역사를 시간적 발달 단계의 구조 관점에 가둬버리는 경향이 강해졌다. 18세기 중엽 이후 유럽이 세계무대의 중심축이 되면서, 유럽만이 시간적 발달 단계의 정점에 이르렀거나 정점으로 향하고 있다는 유럽 중심 사관이 대다수 지성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흥망성쇠가 지역들 사이의 공간적 교차 관계로 이해되는 방식, 그리고 그 방식에 깔린 순환적 시간 개념은 단지 문학가의 소유물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3) 유토피아의 환영
지난 세기 초 영국의 경우, 특정 교회에 소속된 이들의 비율은 20~27%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금세기 시작과 함께 그 비율은 10% 대로 추락하기도 했다. 종교세를 내면서도 교회에 나가지 않는 사람들이 유럽 사회에 무척이나 많다는 점을 감안할 때 언급된 비율은 전통을 중시하는 자유주의자나 정치 신학 옹호론자에게는 가히 충격적인 것이다. 기독교 정신이 정치의 도덕적 토대가 되어야 진정한 자유주의가 기능할 수 있다는 그들의 주장은 토인비(A.J. Toynbee) 말년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제 1차, 제 2차 세계 대전의 잔혹사를 겪은 토인비는 세계 교회의 설립에 의한 전 지구 차원의 정치적 안정 단계가 인류사의 마지막 단계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비록 유럽 중심 사관에서 탈피했다고 하지만, 그의 역사 서술 방식은 오히려 흥망성쇠의 발달 구조를 전 인류 역사로 확대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에 서구 사회에서의 기독교인 수 감소 현상은 전통을 중시하지 않는 자유주의자에게는 희망적인 메시지가 되는 셈이다.
기독교인 감소 현상에 대한 극단적인 두 반응, 곧 전통을 중시하는 자유주의 진영과 그렇지 않은 자유주의 진영의 반응은 사실 한 어머니의 두 자식과 같은 관계를 맺는다. 흥망성쇠의 발달 구조를 전제함으로써 인류의 마지막 유토피아 단계를 설정한다는 것은 무엇을 함축하는가? 과거 인류 역사의 전개 과정을 필연적 발달로 보든 말든, 현재 인류는 미래의 유토피아 세계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를 위해 과거와 현재의 인간관계가 새로운 정치적 틀 혹은 이념에 의해 재편될 수 있다는 관점이 요청된다. 아시모프(I. Asimov)와 같은 이는 그러한 관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과학소설가로 우리에게 더 친숙한 화학자 아시모프가 토인비의 적으로 자처했던 동기는 단순히 기독교에 대한 반감의 표출이 아니다. 그 동기는 인류사에 도래할 마지막 단계로서 어떤 유토피아 세계를 가정하고, 그 안에 인간관계의 복잡성을 가둬보려는 일체의 시도에 대한 반감의 표출인 것이다. 흥망성쇠의 보편적 발달 구조 관점은 전통을 중시하는 자유주의 진영과 그렇지 않은 자유주의 진영 양자에 공통된 것이다. 이로 인한 결과는 동일한 현상에 대한 두 진영의 대립 양상이다. 이때 세속화 과정의 실제 성격은 그러한 극단적 대립 양상 속에 가려지게 된다.
'과학과 철학 에세이 > 역사의 단편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알하젠(Alhazen) (0) | 2010.06.02 |
---|---|
세속화와 의무적인 종교 교육 (0) | 2010.05.26 |
리꾀르의 ‘해석학적 아크’: 무엇을 위한 역사인가? (0) | 2010.05.08 |
K. 피어슨의 사례 (0) | 2010.05.05 |
로크의 관용(Locke's 'Tolerance') (0) | 2010.04.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