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 에세이/역사의 단편들

K. 피어슨의 사례

착한왕 이상하 2010. 5. 5. 04:47

K. 피어슨의 사례

 

 

1.

종교는 단지 개인의 사적 영역에 속할 뿐 사회의 유지에는 불필요하다. 이를 옹호하려면, 정교 분리의 원칙이 현재 실현 가능해졌다는 입장을 펼쳐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비현실적인 입장은 오히려 반대편에게 비판의 빌미를 제공할 수도 있다. 수리 통계학의 토대를 마련한 칼 피어슨(K. Pearson)의 일화를 통해 왜 그런지 살펴보자.

 

 

  <피어슨>

 

칼 피어슨은 피셔(R.A. Fisher)와 함께 현대 통계학의 대부로 불린다. 둘 다 집단적 차원에서 ‘형질 대물림’, 곧 ‘유전’ 문제를 다룰 수 있는 양적 방법론의 토대를 닦는 데 기여했다. 캠브리지 대학에서 맥스웰 등을 사사하고 법학을 전공한 후 런던 대학의 응용 수학과 교수로 재직하던 1890년 무렵, 피어슨은 동물학과에 부임한 웰던(W.F.R. Weldon)과 교류하게 된다. 집단 유전학에 관한 웰던의 작업에 깊은 감명을 받은 피어슨은 유전 가능한 형질들 사이의 유사성을 찾기 위한 수학적 방법론 개발에 착수하여 18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 일련의 논문 속에 회귀 분석(regression analysis)을 통해 상관관계(correlation)의 계수를 찾고 인과 가설을 검증해보는 방법론이 들어 있다.

 

상관관계 계수는 공변이(covariation), 곧 어떤 두 현상 사이의 비례 및 반비례 관계를 나타내는 표현 수단이다. 많은 경우, 현상들 사이의 상관관계는 뚜렷이 나타나지 않는다. 우선 유사한 현상들을 모아 그들이 정말 상관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조사해야 한다. 따라서 상관관계를 통계적으로 추적하는 작업에는 일반적으로 많은 양의 자료가 필요하며, 그 양의 충분성은 조사의 맥락에 의존적이다. 더욱이 두 현상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다고 해서 둘 사이에 인과관계가 반드시 성립하는 것도 아니다. 실례로 나이와 성장 사이의 상관관계를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여길 수 없다. 축적된 자료에 근거해 두 현상 사이의 상관관계를 추적하는 방법만이 통계학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무선적으로 추출한 개체군에 ‘통제 설계에 바탕을 둔 실험’을 가함으로써 인과관계를 규명하는 것은 현대 통계학의 또 다른 전통이며, 피셔는 이 분야의 대부이다.

 

 

<피셔>

 

피어슨이 통계 연구에 박차를 가할 1890년 무렵, 피셔가 태어났다. 그러나 성격뿐만 아니라 연구 방법론의 차이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는 원만하지 않았다. 피어슨과 피셔의 갈등 관계는 과학사나 과학자의 심리 분석 연구에서 자주 거론되는 소재이지만, 그 관계가 지금 우리의 관심사는 될 수 없다. 1890년 발생한 사건 중 우리의 관심사가 될 수 있는 것은 피어슨이 결혼할 무렵에서 찾아볼 수 있다. 1880년에서 1886년 사이 장학금으로 유럽, 특히 독일을 돌면서 괴테에 심취했고 마르크스 유물론의 영향을 받았던 피어슨은 여러 희곡을 쓰기도 했다. 그 중에는 남녀 사이의 성 관계에 관한 것도 있었는데, ?남성과 여성 클럽, 그리고 올리버 슈라이너?(Men and Women's Club and Olive Schreiner)라는 작품을 들 수 있다. 그는 1885년 남성과 여성 클럽이라는 토론 모임을 조직했으며 거기서 마리아(M. Sharpe)를 만나 결혼하게 된다.

 

자신의 이름을 ‘Carl’에서 ‘Karl’로 바꿀 만큼 마르크스의 유물론에 호감을 가졌던 피어슨은 교회의 권위가 사회의 진보를 가로막는다고 보았다. 원래 퀘이커 교도였던 그는 신앙을 버려야 과학의 길로 들어설 수 있다고 여겼으며, 캠브리지 대학 내에 의무적인 종교 교육을 수용할 수 없었다. 그는 대학 당국을 고발했고, 대학 당국과의 법정 투쟁에서 승리했다. 전통이라는 것은 한 번에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의무적인 종교 교육은 캠브리지 대학 내에서 다른 방식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대학 당국과의 법적 투쟁에서 피어슨이 이겼다는 사실은 종교 세력이 대학 학제를 완전히 지배할 수 없게 된 19세기 말 영국의 시대적 상황을 보여준다.

 

피어슨은 여성에게도 참정권과 학업의 권리를 보장해 주어야 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다. 그 입장은 분명히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정치계와 학계가 여성들에게 문을 열어야 한다는 피어슨의 입장에서, 그 ‘여성’은 ‘모든 여성’을 뜻하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에 맞닥뜨릴 때 우리는 피어슨의 진보성 속에 담긴 또 다른 측면을 보게 된다.

 

 

 

2.

피어슨은 대영 제국의 힘이 약해지는 원인 중 하나로 지적으로 뛰어난 젊은이들에 비해 지적으로 열등한 인물들이 일찍 결혼하고 많은 아이들을 낳는 데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시각은 다윈 시절부터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자들을 사로잡고 있었던 것인데 피어슨의 시대에 이르러 과학적 해석 대상이 되었다. 이를 19세기 말 유럽 전역에서 결핵, 매독과 함께 공공 위생의 적으로 간주되었던 알코올 중독에 대한 당시 견해를 빌려 살펴보자.

 

(A) 알코올 중독증에 빠진 부모로부터 허약할 뿐만 아니라 난폭한 기질을 가진 후손이 태어날 가망성이 높다고 여겨졌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유행하던 시절, 유전은 어떻게 간주되어야 할까?

 

형질 대물림 방식이 미시적 차원에서 규명될 수 없었던 시절, 바이스만(A. Weismann)과 이시카와(C. Ischkawa)에 의해 ‘생식질 이론’이 출현했다. 만약 성장 및 경험 과정에서 얻어진 획득형질이 자손에게 대물림된다면, 질문 (A)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후천적 경험의 산물인 알코올 중독의 부작용이 후손에게 그대로 대물림된다고 답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이스만과 이시카와의 생식질 이론에 따르면, 유전병은 설명하기 힘든 대상이 된다. 형질이 오로지 정자와 난자라는 생식 세포 내의 생식질에 담긴 어떤 유전물질에 의해 대물림되는 것이라면, 체세포로 침투하는 세균 등에 기인한 질병이 유전된다고 여기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변이의 원인을 추적하고 변이를 통제적으로 실험할 수 없었던 당시에는 ‘순수한 유기체’ 혹은 ‘순수한 인종’ 개념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고려할 때, 바이스만의 생식질 이론을 받아들인다면 (A)는 어떻게 대답되어야 할까?

 

(i) 알코올 중독에 의한 성격 변화 등이 유전된다는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기질, 지능 및 행동 방식을 결정하는 요인이 생식질에 있다고 가정해야 한다. 바이스만은 육체를 환경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발달하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 육체를 단지 유전 물질의 운반체 정도로, 그리고 발생, 성장 및 양육을 그저 유전 물질의 확장 정도로 여겼던 바이스만은 ‘가소성을 띤 유전 물질’ 개념을 갖고 있었다. 즉, 그는 환경 요인으로 인해 유전 물질이 부분적으로 변형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ii) 환경 요인은 유전 물질에 영양을 공급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으므로, 교육을 통한 ‘개인의 개선’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 환경 요인은 단지 ‘순수한 유기체’ 혹은 ‘순수한 형질’에 대응하는 유전 물질의 변형과 관련된다. 알코올 중독이 심해져 생식질의 유전 물질이 오염되는 경우, 순종에 간직된 형질들의 후퇴가 발생한다. 그렇게 오염된 생식 물질이 대물림되면서, 알코올 중독에 의한 성격 이상이나 폭력적 행동이 자손에게도 나타난다.

 

바이스만을 비롯한 19세기 말 생물학자들 다수의 머릿속에서 종이 불변한다는 생각은 사라졌지만, 우수한 혈통에 대한 미련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우수한 혈통, 곧 순종은 ‘과거 환경에 적응된 우수한 형질’을 갖고 있다고 여겨졌다. 현재의 환경이 갑자기 바뀌지 않는 한, 알코올의 사회적 확산으로 인해 순종의 형질이 퇴화할지도 모른다는 강박 관념이 많은 진화론자들을 짓눌렀다. 피어슨도 (i)과 (ii)의 관점을 받아들였다. 그는 영국의 발전에 방해가 되는 열등한 계층을 줄일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했다. 따라서 정치계와 학계가 여성들에게 개방적이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서, 그 ‘여성’은 결코 ‘모든 여성’을 뜻하지 않는다. 그 ‘여성’은 ‘지적으로 뛰어난 대영 제국의 숙녀’를 뜻한다.

 

피어슨은 기독교가 사회 진보의 방해물이라는 관점을 갖고 있었다. 그 관점은 종교가 사회를 지배했던 세태에 대한 반발로만 기인한 것이 아니었다. 그 관점에는 전통과의 단절 없이는 진보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또한 피어슨은 대영 제국의 발전을 위해 특정 계층을 제거해야 한다는 관점을 부정하지 않았다.

 

기독교의 포기가 결국 특정 계층의 제거론과 같은 것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는 입장을 피어슨의 사례를 근거로 옹호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피어슨의 사례를 가지고 기독교 전통의 중요성을 강조하거나, 현 시점에서도 기독교의 사회적 기여 가능성을 강조하는 방식이 있다. 이러한 방식은 별다른 논쟁거리를 제공하지 않을 뿐더러, 들어볼만한 가치도 있다. 하지만 피어슨의 사례를 가지고 도덕의 종교 기원론을 강조하거나, 19세기 세속화 과정의 부정적 측면을 강조하면서 의무적인 종교 교육을 정당화하는 방식은 받아들일 수 없다. 이를 알기 위해 도덕의 종교 기원론이 가진 유치함을 먼저 살펴볼 것이다. 의무적인 종교 교육을 정당화하기 위해 세속화 과정의 부정적 측면을 강조하는 입장이 도덕의 종교 기원론에 기대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3.

현재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방식의 자유주의는 양면성을 띠고 있다. 자유주의가 기대고 있는 ‘인권’은 한 편으로는 기독교 전통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개념이다. ‘전통을 중시하는 자유주의자’는 그러한 영향을 강조하는 사람이다. 또 한 편으로 인권을 기독교 전통과 무관하게 정당화하는 것도 가능하다. 기독교 전통에 근거하여 의무적인 종교 교육을 옹호하는 자유주의자가 있다고 해보자. 그러한 자유주의자를 비판하는 경우,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전통을 중시하는 모든 자유주의자가 의무적인 종교 교육의 옹호론자는 아니며, 또 의무적인 종교 교육을 옹호하는 경우에도 일방적으로 성경 내용 자체를 정당화의 원리로 삼지는 않기 때문이다.

 

전통을 중시하는 자유주의자가 의무적인 종교 교육을 옹호할 때 이에 대한 무종교인의 반박은 ‘사후 세계를 빙자해 사기를 치지 말라는 식의 독단적인 무신론자의 반박’과 같은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무종교인은 나처럼 동시에 무신론자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의무적인 종교 교육에 반론을 펼치고 싶은 무종교인은 ‘무신론이라는 이념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평가해 버리는 독단적인 무신론자’에 대해서도 비판적일 수 있어야 한다.

 

전통을 중시하는 자유주의자 중 의무적인 종교 교육을 통해 학생들이 자유와 평등의 이념을 배울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피어슨의 사례를 이용해 의무적인 종교 교육을 옹호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된다.

 

• 도덕의 종교 기원론

도덕의 기원은 종교에 있다. 따라서 종교를 부정하는 것은 도덕을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실례로 기독교에 반감을 가진 이들은 우생학 관점을 사회에 확산시켰다. 우생학은 나치, 곧 국가사회주의(Nazism)를 이끈 히틀러의 제 2차 세계대전을 유발시킨 결정적 원인 중 하나였다.

 

• 세속화 과정의 부작용론

피어슨의 사례는 세속화 과정의 부정적 측면, 특히 정교 분리 원칙의 부정적 측면을 보여준다. 현실 정치가 종교와 분리될 수 없으며, 종교가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가로막으려는 시도는 역으로 종교적 전통 속에 정착된 미덕마저도 사장시킬 수 있다.

 

무종교인이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반론을 펼쳐야 하는 것은 세속화 과정의 부작용론이지 도덕의 종교 기원론이 아니다. 이 글에서는 도덕의 종교 기원론이 유치한 이유만 지적하자.

 

도덕이 종교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할 때 ‘어떤 종교’인가라는 문제가 발생한다. 미신도 믿는 사람에게는 종교라고 누군가 주장한다면, 이 주장은 ‘미신과 참다운 종교’의 구분을 통해 무효화되지 않는다. 미신의 규정은 종교 현상 연구에서 빼먹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도덕의 종교 기원론을 옹호하는 사람은 종교에 담긴 도덕에 대한 관점이 종교의 수만큼이나 다양하다고 말하든가, 아니면 모든 종교는 근원적으로 도덕에 대한 동일한 관점을 전제하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그 어느 것을 택하든, 결론이 날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종교의 교리가 지역적, 문화적 압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도덕의 기원을 놓고 벌어지는 논쟁의 종착역이 종교가 될 수 없다는 것도 명백해진다.

 

그러나 피어슨의 사례를 가지고 도덕의 종교 기원론을 옹호하려는 것이 유치한 이유는 정작 다른 데 있다. 정말 피어슨과 같은 지식인들이 기독교를 부정했기 때문에, 우생학의 관점이 당시 사회에 널리 퍼졌던 것일까? 기독교 전통에 국한하는 경우에도, 이 물음에 대해 긍정할 수 없다. 기독교가 자유와 평등의 이념을 서구 전통에 심어줬다는 주장을 일부 수용해도, 특정 종족을 우상화하거나 우월한 것으로 여기는 관점 또한 기독교의 전통과 무관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월한 종족이 열등한 종족에 관용을 베풀고, 열등한 종족을 교화시켜야 한다는 관점은 기독교 전통에서 허용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 아니었다면, 기독교에서 강조되는 자유와 평등의 이념은 선교 활동에 대한 이념적 배경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유럽 종족만이 도덕적 오류를 범하지 않고, 또 열등한 종족의 역사에 개입할 수 있다는 ‘도덕 제국주의’(moral imperialism)가 한때 기독교의 교리에 근거하여 정당화되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피어슨이 수리 통계학의 토대를 마련했던 시절, 영국 종교계가 우생학에 일방적으로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갈등 관계를 맺었던 피어슨과 피셔를 이어줄 수 있는 통로도 우생학이었다. 순종 강세에 대한 피셔의 강한 동경심에는 우생학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우생학은 20세기 초까지도 일부 집단에게는 ‘시대정신’처럼 기능했었고, 성직자들도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영국 종교계가 우생학적 정책을 장려했다는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심지어 예수를 선민사상에 투영시켜 우생학을 정당화해보려는 성직자도 있었다.

 

종교의 교리 해석이 ‘시대의 악(惡)’과 항상 양립 불가능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이 점은 기독교뿐만 아니라 불교를 비롯한 다른 종교에도 해당한다. 우생학이 시대정신으로 기능했던 시절, 과학기술은 서서히 사회의 공적 담론 차원을 넘어 정책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당시 우생학은 의료 공공 정책에 대한 이론적 기반이었다. 따라서 알코올 중독 문제가 우생학의 관점에서 쟁점이 된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이를 바탕으로 우생학이 현대적 의료 공공 정책을 정착시킨 것처럼 주장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우생학이 나치가 주도한 제 2차 세계대전의 주원인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문제다.

 

현대인 모두는 어떤 의미에서든 제 2차 세계 대전이라는 거대한 전쟁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제 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정치 구도와 삶의 방식이 그 전에 비해 많이 변모했기 때문이다. 제 2차 세계 대전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 중 하나는 단 하나의 이념으로 세상을 획일화하려는 시도가 불러올 수 있는 위험에 대한 인식이다. 히틀러도 ‘좀 더 나은 세계’를 꿈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더 나은 세계를 꿈꿨던 히틀러는 유럽 통합을 위한 제국의 부활을 시도했고, 또 그 세계를 지휘할 인물들을 길러내기 위한 ‘인종 개선 정책’을 장려했다.

 

그러나 우생학이 정말 나치의 인종 개선 정책의 중심축이었을까? 그랬다면, 그 인종 개선 정책에 ‘호르몬 치료법’과 같은 것은 채택되지 않았을 것이다. 우생학의 관점에 따른다면, 소위 ‘나쁜 습성’이라는 것은 유전적으로 결정되어 있어 후천적 치료가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호르몬 치료법은 호르몬 조절로 당시 비정상적으로 규정된 동성애자 등을 정상 상태로 돌릴 수 있다는 관점에서 도입되었다. 나치가 유태인을 제거해야 하는 이유를 우생학에 근거해 정당화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아리안족을 대상으로 한 인종 개선 정책은 오히려 나쁜 습성의 유전 가능성을 부정하는 ‘행동 후성학’ 관점의 측면에서 옹호되었다. 우생학은 나치의 인종 개선 정책에 부분적으로 수용된 것이었지, 그 정책의 중심축은 아니었다. 더욱이 마르크스를 존경했던 피어슨이 우생학을 옹호했다고 나치의 옹호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4.

기독교를 포기하는 것은 도덕을 포기하는 것이며, 지식인들의 기독교에 대한 반감은 우생학의 사회적 확산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우생학은 제 2차 세계대전을 유발시켰다는 식의 주장은 역사적 근거를 결여한 것이다. 따라서 피어슨이 우생학의 옹호자였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도덕의 종교 기원론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는 조잡한 논리적 구성물에 불과하다. 그러한 시도에는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은 악의 구렁텅이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독단이 깔려 있다. 그러한 독단에 빠진 이들에게 지금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과거의 사건들, 특히 기독교에 비판적인 인물들과 관련된 사건들은 마치 필연적으로 연결된 것처럼 비춰지게 된다. 그러한 독단에 빠진 사람들은 특정 조건 아래에서만 성립하는 사건들의 우연적 연결성을 필연적인 것으로 과대 포장함으로써 자신들에게 불리한 사건을 빠트리게 된다. 피어슨이 살았던 시대에는 교회 세력도 우생학을 지지했다. 우생학이 피어슨뿐만 아니라 많은 성직자들에게 시대정신처럼 작용했다는 사실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종교 교리가 더 이상 사회 통합의 원리로 기능할 수 없게 된 시대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다.

 

 

<덧글>

(1) 이 글은 원고 <세속화: 무종교인의 관점> 앞 부분 일부를 수정하여 올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글로만은 '자유주의 개념의 양면성'을 정확히 알기는 힘듭니다. 왜 '전통을 중시하는 자유주의자'가 여기에 등장하는지에 대한 맥락도 빠져 있습니다. 또한 배열도 원래의 원고와는 다를 뿐더러, 연관된 여러 주제들이 빠져 있습니다.

 

(2) 이 글에 이어지는 부분들은 빼고 개인적으로 중요하다고 여기는 '역사 읽기'에 대한 부분을 올릴 예정입니다. 전체적인 내용은 혹시 책으로 출판이 되면 보실 수 있습니다.

 

(3) 마지막에 언급된 독단성은 엄밀히 말해 '정치 신학'이라는 분야의 학자들에게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과 유사한 독단성을 세속화를 '근대의 합법성'과 연관시키는 학자들에게서도 발견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추후에 카테고리 <민주주의와 세속화>에 올려질 '야스퍼스의 딜레마'를 보시면 됩니다. 야스퍼스가 그러한 독단성에 빠진 인물은 아니고, 제가 규정한 '야스퍼스의 딜레마'를 푸는 한 방식이 그러한 독단성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때 처음으로 H. 블루멘베르크가 언급됩니다. 블루멘베르크야말로 그러한 독단성을 통찰력 있게 지적한 인물이니까요.

 

(4) 그러나 <세속화: 무종교인의 관점>은 서구 대륙 철학의 주제인 '근대의 합법성'에 관한 것이 아닌 까닭에 블루멘베르크는 자세히 다루지 않습니다. 사실 이 원고의 주제들은 이 땅에서 뽑아낸 것이며, 그와는 다른 방식의 히스토리오그래피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세속화 주제는 <세속화: 무종교인의 관점>, <세속화: 과학을 둘러싼 학문 충돌의 지도>, <세속화: 동양의 맥락>, 이렇게 3부작으로 기획된 것입니다. 각 권 당 500쪽 정도의 분량입닉다. 블루멘베르크는 주로 <세속화: 동양의 맥락>에 등장합니다. <세속화: 무종교인의 관점>이 끝나면, <세속화: 과학을 둘러싼 학문 충돌의 지도> 원고 작업에 들어갑니다. 이 원고는 일단 내년 말까지는 초고를 끝낼 예정입니다. 다만, 내년에는 문제 만들어 팔기 사업을 다시 병행하게 될 것 같기 때문에,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세속화: 동양의 맥락>은 <사방전후(四方前後)>를 쓰기 위한 습작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