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의미
- 멍청한 짓 -
누구나 한 번쯤 이런 물음을 던지게 된다. 삶이란 무엇인가?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 삶의 의미를 묻게 되는 과정과 동기는 사람마다 천차만별이지만,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물음인 것이다. 철학자도 예외가 아니다. 삶의 의미를 고민하던 누군가가 철학자에게 해답을 구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하지만 철학자는 그 멍청한 짓을 가치 있게 만드는 법을 고안해냈다.
[1.10] 어느 날 강에 시신 하나가 떠올랐다. 시신에서 유언장이 발견되었다.
“제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토록 헌신적으로 봉사했지만, 제가 사랑하던 사람은 저를 버렸습니다. 도대체 우리네 삶이 의미를 가진 것일까요? 제가 사랑하던 사람이 저를 버린 순간부터 삶의 의미는 저에게서 사라졌습니다. 부모님, 친구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저로서는 여러분 곁을 떠나야만 합니다.”
[1.11] 유언장을 본 어느 철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자살한 사람이 삶의 의미를 놓고 고민했지만, 그 ‘삶’은 그에게 국한된 것이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는 ‘삶의 의미’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자살 동기가 그 고민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도, 그것은 철학적일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자살은 안타깝지만, 우리가 그의 자살에서 배울 것은 없다.”
이 철학자가 말하는 ‘철학적 물음’은 어떤 것일까? 그 물음은 개인에 국한된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 물음은 제 3자의 관점에서 나와 다른 사람들 모두에게 해당하는 그러한 것이어야 한다. 또 그 물음은 누구나 한 번쯤 고민하게 되는 그러한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자살한 사람이 삶의 의미를 놓고 고민한 것은 철학적인 것이 될 수 없다.
[1.12] 또 다른 철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삶에 대한 ‘일반 의미’를 묻고 있다. 삶은 분명히 수(數)의 존재처럼 추상적이지 않다. 나의 삶은 나에게서 죽는 날까지 떨어지지 않는다. 내가 죽기 전까지 나의 삶은 사과나 나무처럼 대상화되어 취급될 수 있다. 우리는 단어 ‘나무’가 나무들을 뜻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무에 관한 정보와 지식을 가지고 ‘나무’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삶의 일반 의미를 묻는 순간, 그 의미는 너무나 애매모호해서 규정 불가능한 것이 되어 버린다.”
제 3자의 관점에서 삶의 의미는 규정될 수 없다. 개인을 초월한 삶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삶’이라는 단어는 단지 특정 개인에 국한해 경험적 의미를 가지며, 개인들의 삶들만 유사성과 차이성의 비교 대상이 될 뿐이다. 삶의 일반 의미는 단지 가정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가지고 삶을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1.20] 한강에 또 다른 시신 하나가 떠올랐다. 시신에서 유언장이 발견되었다.
“저는 잘 나가던 사람이었습니다. 저의 시체가 발견되는 순간, 신문은 온통 제가 자살한 원인을 두고 추측성 기사를 날리겠죠. 저는 엄청난 부를 축적했습니다. 저의 가족은 아무 걱정 없이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서재에서 아름다운 정원을 바라보는 순간 이런 물음이 떠오르더군요. 과연 인간의 삶은 저 정원처럼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도대체 왜 살아야 하는가? 저는 저의 삶에 대해 고민한 것이 아닙니다. 삶 자체에 대한 물음을 던진 것이었습니다. 대답이 나오지 않더군요. 오랜 생각의 감옥에서 방황하던 저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삶은 무의미한 것이다.”
[1.21] 서로 의견을 달리 했던 두 철학자는 이번 사건을 놓고서도 논쟁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이번 자살은 저번 자살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보여준다. 네 말대로 인생의 일반 의미는 규정할 수 없다. 그것을 규정하는 순간, 그것은 애매모호함으로 꽉 차버리게 되지.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없다면 단어는 의미를 가질 수 없고, 또 단어를 사용하는 실제 맥락이 사전적 정의에 종속될 수도 없다. 애매모호함은 의미라는 것의 운명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것이 아니다. 이번에 자살한 사람은 자신의 삶이 아니라 삶 그 자체에 대해 묻고 있다. 삶의 일반적 의미 규정이 당장 불가능하다고 하여, 삶의 의미라는 물음이 항상 개인적인 것은 아니다.”
“이번에 자살한 사람은 정말 제 3자의 관점에서 삶의 의미를 물은 것일까? 내가 보기에 너는 ‘철학적 물음들에 대한 케케묵은 관점’을 갖고 있다. 그것은 모든 철학적 물음들이 일종의 수수께끼라는 관점이다. 수수께끼가 성립하려면, 물음 안에 이미 답이 있어야 한다는 가정이 전제되어야 한다. 삶 자체에 대한 물음이 던져질 수 있기 때문에, 삶의 일반 규정이 가능하다는 관점이 너를 지배하고 있다. 너는 적어도 그 규정이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해도 포기되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의 자살은 삶의 일반 의미가 규정하기 힘들거나 불가능하다는 것에 기인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삶이 무의미하다는 것에 기인한 것이다. 자살한 사람의 결론인 삶 자체의 무의미성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애초의 물음, 곧 삶 자체의 의미에 대한 물음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사실 새로운 삶의 방향을 찾지 못했을 뿐이다.”
[1.22] 첫 번째 철학자는 제 3자 관점의 물음만을 철학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가 개인적인 것과 일반적인 것의 이분법을 전제한다고 볼 수는 없다. 그는 단지 철학적 물음의 범주 경계를 설정하기 위해 그 둘의 개념적 구분을 사용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철학적 물음의 범주를 그렇게 정하는 순간, 삶에 대한 일반적인 의미 규정 작업을 포기할 수는 없게 된다. 삶 자체가 정의 불가능하다면, 그는 어떤 맥락을 구성해 그 안에 삶을 집어넣어야 한다. 삶의 의미라는 수수께끼는 어떻게 하든 풀려야만 하는 것이다.
[1.23] 두 번째 철학자는 첫 번째 철학자의 수수께끼 풀기 방식에 동조하지 않는다. 두 번째 철학자가 개인적인 것과 일반적인 것의 이분법을 전제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 그는 다만 수수께끼 풀기 방식의 철학이 갖는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자살한 사람이 도달한 결론은 ‘삶의 무의미함’이다. 삶의 의미라는 수수께끼의 정답이 그러한 결론이라면, 수수께끼 자체가 사실은 무의미한 것이었다. 수수께끼가 생겨난 실상은 철학적 물음의 본성과 같은 것이 아니라 심리적인 것일 뿐이다. 자살한 사람은 어떤 심리적인 원인으로 인해 남들이 부러워하는 자신의 삶에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새로운 목적을 찾지 못했으며,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는 일종의 철학적 핑계로 자살을 택한 것이다.
[1.30] 어느 날 두 철학자는 지하철에서 예상치 못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위대한 과학자로 칭송을 받던 모 씨가 종적을 감춘 지 1년 만에 지하철 전도사로 변신해 나타났기 때문이다.
“저는 신(神) 존재를 부정했던 사람입니다. 그것은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것이니까요. 그런 존재를 믿고 신앙을 운운하는 사람들을 비웃었습니다. 하루는 제가 받은 많은 상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답니다. 내가 저 상을 받기 위해, 그리고 아이들이 나를 본받으라고 과학자의 길을 선택한 것은 아니야. 실험으로 바쁜 날을 보내면서 내가 고작 발견한 것은 무엇인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산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 의미는 무엇일까? 갑자기 내가 헛살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1년을 방황했습니다. 타락의 구덩이에 빠져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이 너무나 깨끗하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 저는 더 이상 신 존재를 의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세상은 신의 빛으로 꽉 차있습니다. 그것은 증명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삶의 의미이니까요.”
[1.31] 이번만큼은 두 철학자가 동의하는 것이 있었다.
“신의 빛이 삶의 의미는 아니야.”
두 철학자는 과학자의 결론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다. 그들은 그 결론이 단지 과학자의 선택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첫 번째 철학자는 제 3자 관점에서 삶의 의미를 묻는 사람만이 자신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삶의 목적을 갖게 된다고 생각한다. 삶의 일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인간은 ‘세상의 그림’, 곧 ‘세계와 사는 방식의 그림’을 얻게 된다는 생각이다. 두 번째 철학자는 삶의 의미를 묻고 그러한 세상의 그림을 찾아가는 것은 근본적으로 심리적 차원에서 설명 가능하다고 본다. 두 철학자의 생각을 관통하는 것은 무엇인가? 삶의 의미를 묻는 것은 ‘세상의 그림을 찾아 나서게 만드는 것’이다.
[1.40] 두 철학자의 상이한 의견 속에 담긴 공통된 사고방식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먼저 다음의 논증을 살펴보자.
• 삶은 의미가 있거나 없다.
•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살만한 가치는 있다.
•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면, 살만한 가치는 없다.
• 따라서 살만한 가치는 있거나 없다.
[1.41] 첫 번째 철학자는 제 3자의 관점에서 던져진 물음만을 철학적인 것으로 여긴다. 두 번째 철학자는 삶의 의미를 묻는 것은 근본적으로 심리적 차원에서 이해되고 대답되어야 한다고 여긴다. 그 어느 경우든, 살만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삶의 의미를 놓고 고민하게 되는 당사자이다. 그 누구도 철학자에게서 삶의 의미에 대한 해답을 구할 수 없다. 그 철학자가 윤리학자라면 더욱더 그렇다.
[1.42] 서양이든 동양이든, 지금까지의 도덕 담론은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전제 아래 진행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1.40]의 논증 방식이 윤리학의 한계를 드러내준다거나, 삶의 의미를 묻는 것은 도덕 담론과 무관하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이것은 두 철학자에게는 통용될 수 없다. 그들은 삶의 의미를 물음으로써 누구나 자신의 삶을 안내해줄 세상의 그림을 얻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1.50] 첫 번째 철학자와 두 번째 철학자가 서로 합의할 수 있는 것들에 주목해 보자. 둘 다 삶의 의미를 묻는 것이 가능해도 삶의 일반 의미가 반드시 규정될 필요는 없다는 데 동의한다. 첫 번째 철학자는 그러한 규정 가능성에 동경심을 갖고 있지만, 물음 자체의 일반성을 더욱 중요하게 여긴다. 둘 다 삶의 의미를 묻는 것이 삶을 안내해줄 어떤 세상의 그림과 연결될 수 있다는 데 동의한다. 첫 번째 철학자는 ‘철학적 물음의 생산성’을 강조한다. 삶의 일반 의미를 물음으로써 누구나 세상의 그림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철학자는 물음을 던지는 것과 해결책의 다양한 연결성에 공통된 심리적 과정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 어느 경우든, 결론은 하나다. 자살하거나, 마지못해 살거나. 혹은 세상의 그림을 얻게 되는 것은 개인의 몫이다.
[1.51] 두 철학자가 서로 합의할 수 있는 것들에 주목할 때 다음의 사고방식이 관찰된다.
• 누구나 삶의 의미를 묻거나 묻지 않을 수 있다.
• 삶의 의미를 묻지 않는 사람보다는 삶의 의미를 묻는 사람이 세상의 그림을 얻게 될 가능성이 더 크다.
• 그러한 사람이 자살을 하더라도, 그 누구도 그의 삶을 가치 없는 것으로 몰아세울 수 없다.
• 삶의 의미를 묻는 것은 누구에게나 가치 있는 것이다.
[1. 52]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물음이 제 3자의 관점에서 해석되든, 심리적 차원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지든, [1.51]의 사고방식은 두 철학자를 관통하고 있다. 네가 그들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삶의 의미를 묻는 것이 가치가 있다는 결론’은 네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다. 삶의 의미에 대해 고민할 때 네가 원하는 것은 ‘사는 법’이기 때문이다.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죽지 않고 살아야 한다면,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해 [1.51]의 사고방식은 너에게 아무것도 전해줄 수 없다.
[1.53] 세상의 그림을 얻을 수 있는 여지가 없다면, 삶의 의미를 묻는 것도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없다. 세상의 그림을 얻는 것은 근본적으로 너의 몫이다. 그러자 두 철학자는 너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래도 철학자들이 삶의 의미라는 물음으로 고민하는 너를 도와줄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런 고민 속에서 세상의 그림을 만들어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세상의 그림을 만들어낸 과정을 따라가 보는 것만으로도, 너의 사고의 지평은 넓어질 것이다.”
[1. 54] 너는 아이가 되어 철학자의 손에 이끌려 세상의 그림이라는 그의 등대를 방문한다. 그 등대가 마음에 든다고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등대는 철학자의 것이다. 네가 그 등대의 안내에 따라 살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등대 주인의 이름은 종교가 되고, 너는 그 종교의 신봉자가 된다. 등대가 하나가 아니라 아주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너는 다시 방황하게 될지도 모른다. 철학자들은 그 방황을 ‘지성적 여행(intellectual journey)’이라 부를지도 모른다. 여러 가지 세상의 그림들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결국 너의 몫이며, 어떤 철학자가 그런 그림을 그리게 된 과정이 너에게 동일한 방식으로 반복될 수 없기 때문이다.
[1.55] 삶의 의미를 고민하던 누군가가 철학자에게 해답을 구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하지만 철학자도 삶의 의미를 놓고 고민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적어도 삶의 의미를 묻는 것 자체는 철학자 자신을 포함해 누구에게나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지만 철학자들이 만든 세상의 그림들이 빛을 잃지 않게 된다.
[1.60] [1.51]의 사고방식은 다음을 전제하고 있다.
• 세상의 그림 없이는 인간은 삶의 주인이 될 수 없다.
삶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자신을 이끌어온 세상의 그림이 망가지는 순간 자살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이는 아름답게만 보였던 그 그림을 다른 각도에서 보기 시작한다. 그 어떤 경우에나 삶의 의미를 묻는 자만이 새로운 세상의 그림을 얻을 수 있고, 다시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
[1.61] 내가 나의 삶의 주인이 된다고 하여 세상에 득이 되는 것은 아니다. 자기를 보존하는 동시에 세상에 득이 되는 삶은 무엇일까? 이것은 세상의 그림을 산출시키는 물음이 가치가 있다는 것으로 대답되지 않는다. 삶의 의미를 물음으로써 세상의 그림이 얻어질 수 있다고 할 때 그 물음의 가치는 단지 ‘그 그림이 주인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에 국한된 것이다. 삶의 주인이 되게 만들면서 세상에 득이 되고 싶은 이가 위의 전제를 따른다면, 다음도 전제해야 한다.
• 누구에게나 살만한 가치가 있다. 이러한 사실은 누구에게나 권장할만한 것이다.
첫 번째 철학자가 그러한 가치의 일반 규정을 찾는다면, 두 번째 철학자는 심리의 차원에서 그러한 가치가 생성되고 사회로 전파되는 과정을 설명하려고 할 것이다.
[1.62] 동서(東西)를 관통하는 도덕 담론의 뼈대는 [1.60]~[1.61]의 두 전제를 깔고 있다. 그 구조는 다음과 같다.
• 세상의 그림 없이는 인간은 삶의 주인이 될 수 없다.
• 누구에게나 살만한 가치가 있다. 이러한 사실은 누구에게나 권장할만한 것이다.
• 살만한 가치가 있음을 보여주는 세상의 그림은 누구에게나 권장할만한 것이다.
[1.63] 이제 두 철학자는 이렇게 말한다.
“네가 삶의 의미를 놓고 고민할 때 우리 철학자들에게 해답을 구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하지만 우리는 적어도 그 멍청한 짓을 누구에게나 가치가 있도록 해주는 방법을 발견해냈다. 우리가 만든 세상의 그림들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너의 몫이다. 우리에게 사는 법을 묻는 것은 멍청한 짓이지만, 그 선택은 가치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만든 세상의 그림들은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1.64] 그러나 그 어느 철학자도 ‘왜 누구에게나 살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들은 그 대신 인본주의(humanism), 천성(天性) 등에 기대어 삶의 가치를 규정하려 들거나, 아니면 심리적 차원에서 자기 보존(self-preservation)과 관련된 성향 등과 연관지어 설명하려 든다.
[1.65] [1.62]에서 서술된 도덕 담론의 뼈대, 즉 서로 달라 보이지만 많은 사상들에 공통된 관점의 뼈대를 부숴버릴 것이다. 어떤 세상의 그림이든지 세상 자체를 묘사할 수는 없다. 누구에게나 가치 있는 것을 시도하는 삶은 실제로는 ‘주인 없는 삶’에 불과하다. 그러한 것은 허상(虛想)이기 때문이다. 도덕 담론의 뼈대에 붙은 살덩어리는 네 자신이 될 수 없다. 이를 받아들이면, 결국 어느 철학자처럼 도덕 담론의 가능성 자체를 부정해야 한다고 누군가는 생각할 것이다. 그런 사람은 도덕 담론의 뼈대에 붙은 살덩어리만 쳐보면서 투덜거렸을 뿐이다. 그는 그 뼈대를 부숴버릴 때 진정한 도덕 담론이 가능해진다는 사실을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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