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 에세이/자연철학

'코스모스'의 파괴자 니체 (수정)

착한왕 이상하 2016. 4. 9. 21:09

 

 

코스모스의 파괴자들

      

삶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그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삶의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하자. 그의 선택은 다른 사람이나 전통에 영향을 받더라도 자신의 의지에 따른 것이어야 한다. 삶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코스모스(cosmos)’를 부정해야 한다. 이것이 니체(F.W. Nietzsche)의 결론이다.

 

자연이 우주가 존재하는 방식을 뜻하는 경우, ‘코스모스는 아주 특별한 자연 개념이다. ‘코스모스질서잡힌 우주혹은 우주의 조화로운 측면을 뜻하기 때문이다. ‘코스모스가 실재한다고 해보자. 코스모스가 질서잡힌 우주 그 자체라면, 그리고 인간의 운명도 그러한 질서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선택 상황을 불러일으킨 갈등과 고민은 인간의 착각일 뿐이다. 우주의 구성원인 인간도 코스모스에 속하는 까닭에, 질서에 반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모든 것은 ()’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코스모스가 질서잡힌 우주 그 자체라면, 삶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는 것조차 무의미하다. 따라서 자신을 위한 삶의 지도를 찾으려는 시도는 허망한 것이다.

 

코스모스가 우주의 조화로운 측면이라면, 선택 상황을 불러일으킨 갈등과 고민은 조화에 반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코스모스에 부합하는 삶이 선()한 것이라면, 삶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선한 사람일 수 없다. 그는 이미 주어진 것에 따른 삶혹은 코스모스에 부합하는 삶자신의 의지에 따른 삶으로 여기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코스모스질서잡힌 우주우주의 조화로운 측면중 무엇을 뜻하든, 삶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코스모스개념을 부정해야 한다. 코스모스 개념을 부정하는 데 필요한 첫 번째 관점은 다음과 같다.

 

자연은 그 구성원인 인간에 대해 무관심하다.

 

위의 관점은 에피쿠로스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 우주는 무한한 공간 속에서 영원히 운동하는 원자들의 상태일 뿐이다. 크기와 종류에서 서로 다른 원자들의 수는 무한개이다. 원자들의 운동을 보편적으로 규정하는 법칙성이 없기 때문에, 가능한 우주의 수도 무한개이다. 원자들의 운동에 의한 자연은 행위의 판단에 대한 근거가 될 수 없다. 원자들로 이루어진 실재는 인간에게 아무런 강요를 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이 자연에 대해 책임감을 느낄 이유도 없다. 인간은 원자들로 이루어진 실재를 파악할 때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다.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을 따를 때. 삶의 궁극적 의미는 고통에서의 해방으로 귀결된다. 인간의 영혼은 그러한 해방 상태에서 신적인 것이 된다. 그러한 해방 상태는 모든 것이 원자들의 운동에서 기인한 것임을 인식할 때 도달 가능하다. 이때 발생하는 난제는 신적인 것원자라는 실체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삶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자연이 그 구성원인 인간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관점에만 머물 수 없다. 삶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그 관점 외에도 다음의 관점을 가져야 한다.

 

자연 개념을 매개로 하여 신적인 것을 가정하지 말아야 한다.

 

위 관점을 받아들이면, 자연 개념은 인간과 신적인 것을 매개하는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따라서 자연이 질서로 파악되든, 혹은 무질서로 파악되든, 자연은 삶의 의미를 던지게 만든 모든 요인들에 대해 아무런 책임성을 갖지 않는다. 또한 특정 자연 개념을 핑계로 신적인 것을 가정할 필요도 없다. 이때 삶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의 선택에 대해 자연이나 신적인 것을 탓할 수 없게 된다. 그는 자신의 선택에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이다.

 

(God)은 죽었다라는 니체의 말은 자연이 그 구성원인 인간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관점과 자연을 핑계로 신적인 것을 가정하지 말아야 한다는 관점을 결합한 은유에 가깝다. 니체의 말을 받아들이든 말든, 그의 말은 종교적 권위가 민중의 삶에 대한 일반적 기준이 될 수 없게 된 19세기 말 유럽의 상황을 반영한다.

 

* 작성일: 2010년 5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