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 에세이/자연철학

사후 구원의 논리: 기독교편 3 잠든 영혼, 의식, 육체

착한왕 이상하 2016. 1. 28. 00:56

사후 구원의 매개물로 영혼을 간주하는 것에 대한 개신교 세력의 비판 동기는 주로 정치적이다. 육체와 분리 가능한 영혼 개념은 지속적으로 위협을 받아 왔다. 특히 감각 작용의 생리적 기능이 점차 밝혀지면서, 충동 및 지각 현상을 물리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간과할 수 없게 되었다. 가톨릭 세력은 이러한 도전에 맞서 철학에 대한 신앙의 우위성을 강조했다. ‘실체적 영혼은 합리적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철학은 이에 대한 반박 성격을 갖는다.

 

데카르트는 실체적 영혼을 생각하는 실체(thinking substance)’로 규정했다. 여기서 생각한다는 것은 합리적 판단 능력자유 의지에 따른 선택 능력을 총칭하는 은유이다. 영혼의 기능은 지적 능력 및 의지에 국한되기 때문에, 데카르트의 영혼 개념은 기존의 영혼 개념보다 그 폭이 좁다. 기존의 영혼 개념에 따르면, 감각 및 충동 등도 영혼 혹은 영혼들의 기능으로 여겨졌다. 감각 및 충동의 내용은 물리적 자극에 대한 영혼의 해석 결과일 뿐, 감각 및 충동 그 자체는 물질의 운동만으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영혼 개념은 더욱 육체에서 멀어졌다는 점에서 과거 영혼 개념을 정화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영혼 그 자체는 육체적인 것에 의해 오염되지 않을 가능성을 가진 실체라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영혼은 육체와 분리 가능하면서도 육체적인 것에 의해 오염되지 않을 가능성을 가진 실체이다. 데카르트와 중세 철학자들 사이의 차이점을 논할 때, 데카르트의 영혼 개념이 실체적임을 강조하는 것은 큰 의미를 가질 수 없다. 대부분 중세 철학자들도 데카르트처럼 육체와 분리 가능한 영혼의 존재를 믿었기 때문이다. 그들과 데카르트 사이의 차이점을 논하려면, 데카르트의 영혼 개념에서 육체적인 것에 의해 오염되지 않을 가능성에 주목해야 한다. 데카르트는 그러한 가능성이 영혼을 지적 능력과 의지에 국한시킴으로써 확보된다고 믿었다. 이러한 믿음을 바탕으로 그는 감각지(感覺知)’와 같은 중세의 개념 혹은 인간의 합리적 능력에 한계를 가하려는 중세의 관점을 비판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그러한 관점을 비판함으로써 데카르트는 전통에 종속된 개인의 관점도 해체시키려 했다. 또한 육체의 소멸에만 국한시키는 방식으로 원죄설을 약화시킬 수 있었다. 인간의 본질은 육체와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에, 사후 구원의 매개물인 영혼은 데카르트에게는 동시에 사후 구원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데카르트의 영혼 개념은 적어도 두 가지 난제를 발생시킨다. 영혼이 육체적인 것에 의해 오염되지 않을 가능성을 갖고 있다면, 살아 있는 사람도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어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받아들일 사람은 거의 없다. 이 때문에, 데카르트는 영혼과 육체를 결합해 주는 기관을 가정했고, 그 기관을 찾는 데 집착했던 것이다. ‘생각하는 실체로서 영혼이 육체와 분리 가능하다면, 영혼은 잠 든 동안에도 계속 생각해야 한다. 심지어 꿈이 없는 상태에서도 계속 생각해야 한다. 데카르트는 영혼의 본유 관념, 타고나면서부터 갖고 있는 관념들과 같은 것을 가정하기 때문에, 꿈 없는 수면 상태에서도 본유 관념은 있어야 한다. 이때 다음과 같은 난제가 발생한다.

 

꿈 없는 수면 상태는 기억할 수 없다. 그 상태에서도 영혼이 활동한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사후에도 지속되는 영혼이라는 실체를 가정할 수 있을까?

 

위 난제는 데카르트 이후에야 논쟁된 새로운 것이 아니다. 중세에도 논쟁거리였다. 다만 개인의 의견 표출이 좀 더 쉬워진 시대에 더 자유롭게 논쟁될 수 있었을 뿐이다. 위 물음에 대한 데카르트의 답은 간단하다. 꿈 없는 수면 상태에서도 영혼은 계속 생각한다는 것이다. 단지 기억으로 떠오르지 않을 뿐 이라는 것이다.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데카르트는 두뇌를 기억의 저장소로 간주했다. 이러한 입장을 받아들이면, 영혼의 활동은 무의식적 측면과 의식적 측면으로 양분되면서도 지속성을 갖는다. 데카르트에게 그러한 지속성은 사후 구원의 필요조건과 같은 것이다.

 

영혼의 활동이 무의식적 측면과 의식적 측면으로 양분되면, ‘생각한다는 것도 그렇다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데카르트에게 생각한다는 것은 영혼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로크(J. Locke)기억할 수 없는 상태에 대해서 생각과 의식을 논하는 것을 비상식적이라고 여겼다. 기억은 로크에게 의식의 본질이다. 로크의 이러한 입장 역시 비상식적인 것은 마찬가지다. 로크의 입장을 그대로 따른다면, 손가락을 크게 움직여 원둘레 형태를 인식하는 것도 기억을 전제한다. 손가락 움직임의 종착 지점에서 전 단계들을 기억함으로써 원둘레 형태를 인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 ‘유한개의 단계들에 대한 기억이 어떻게 연속적인 원둘레 형태를 생성시킬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발생한다. 또한 손가락 움직임 등의 변화는 의식의 대상이 될 수 없게 되어 버린다.

 

로크의 의식 개념을 기억을 전제한 의식이라고 하자. 이러한 의식 개념이 잘 작용되는 경우는 자기 동일성을 확인해 보는 경우이다. 어제의 오늘의 나를 동일시 할 수 있는 상식적 근거는 어제의 일에 대한 기억이다. 하지만 이로부터 기억을 전제한 의식이 자기 동일성에 대한 절대적 기준이라고 할 수는 없다. ‘태어난 날의 나지금의 나를 기억에 의존해 동일시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라는 것은 단지 생각 및 행위에서 드러나는 일종의 표현에 불과할 수도 있다. 어쨌든 기억을 전제한 의식을 사후 구원의 매개물로 가정하는 경우, 심판을 통해 부활한 사람은 구원 이전의 삶을 기억할 가능성을 갖는다. 신이 전지전능하다면, 신은 사람들이 생전에 한 일을 알고 기억해낼 수 있을 것이다. 신의 심판을 통해 부활한 사람은 자신의 의식을 갖게 될 것이고, 생전에 한 일 일부를 기억해낼 수 있을 것이다.

 

(R6) 사후 구원의 매개물이 기억을 전제한 의식이라면, 사후 부활을 통해 구원을 받은 사람은 자신의 과거를 기억할 가능성을 갖고 있다.

 

(R6)육체와 분리 가능한 영혼의 존재를 배제하지 않지만, 전제하지도 않는다. 기억을 전제한 의식은 실체적 영혼을 가정할 때만 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정할 때만 의식이 가능하다면, 의식을 두뇌 활동과 연관시키는 시도는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되고 만다. 따라서 (R6)를 옹호하는 입장은 육체와 영혼 혹은 마음을 이분하는 실체적 이원론에 대한 불가지론적 태도를 반영한다.

 

원죄설의 전통적 사고방식에 따르면, 육체적인 것은 자기 보존의 성향과 관련되며, 충동 및 이기심으로 대표되는 자기 보존의 성향은 악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원죄를 육체의 소멸 혹은 죽음에 국한시키는 사고방식이 득세하면서, 자기 보존의 성향을 죄악시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 나타났다. 그러한 입장은 홉스(T. Hobbes)의 정치론에서 엿볼 수 있다. 자기 보존을 위해 계산하고 선택하는 것은 인간의 자연적 본성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본성에 따른 경쟁이 각자의 생존을 위협하게 되는 경우, 사람들은 자기 보존을 위해 약속을 하게 된다. 그러한 약속을 어기는 행위를 처벌할 권력이 없다면, 공동체는 다시 혼란에 빠질 수 있다. 그러한 권력을 가진 자는 독재자가 되어도 무방하며, 필요에 따라서는 살생도 할 수 있다. 그러한 독재자가 사후에 구원을 받게 될 가능성은 홉스에게는 배제되지 않는다. 로크가 사후 구원의 매개물로 의식을 가정한 데에는 그러한 가능성을 차단하려는 동기가 깔려 있다.

 

홉스에게 영향을 미친 17세기 기독교 필멸론(christian mortalism)에 따르면, 사후에 남게 되는 혹은 육체와 분리 가능한 영혼과 같은 것은 없다. ‘영혼이라 불릴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육체에서 기인한 것이기 때문에 육체와 함께 소멸할 수밖에 없다. 실체적 영혼 개념이 부정되기 때문에, 육체와 분리 가능한 영혼은 사후 구원의 매개물로 간주될 수 없다. 전지전능한 신은 육체의 흔적, 실례로 한줌의 뼛가루만으로도 사자를 부활시킬 수 있다. 이때 그러한 부활은 영생의 육체를 얻는 것이자 새로운 삶의 출발점이다. 따라서 사후 심판은 처벌보다는 축복의 의미를 갖게 된다. 부활한 사람은 생전을 기억할 수 있을까? 신이 그의 의식을 되살려 준다는 보장이 없는 한, 그렇다고 단정할 수 없다.

 

(R7) 사후 구원의 매개물이 육체적인 것이라면, 사후 부활을 통해 구원을 받은 사람이 구원 이전의 삶을 기억하지 못할 가능성은 배제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