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화와 민주주의 (봉인 해제)/세속화와 민주주의

선과 악

착한왕 이상하 2010. 11. 22. 02:31

(4) 선과 악

궁극적 의미에서의 실체를 가정하는 경우, 실체가 반드시 하나 혹은 한 종류일 이유는 없다. 예를 들어, 고대 그리스의 사원소설(四元素設)을 생각해 보자. 사원소 없이는 그 어떤 대상도 존재할 수 없는 것으로 가정된다는 점에서, 사원소는 그 무엇보다 논리적으로 선행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존재하는 모든 것과 관계는 사원소라는 실체에 의해 설명된다. 또한 사원소는 일반적으로 변화 속에 불변하는 것으로 가정된다는 점에서, 사원소는 그 자체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서로 상반된 성질을 갖는 사원소들 중 무엇이 논리적으로 선행하는지 혹은 존재론적으로 우선하는지를 따질 수 없기 때문에, 사원소설은 궁극적 의미에서의 실체를 하나 혹은 한 종류로 보지 않는 세계 이해의 방식으로 분류된다. 반면에 기독교의 신 개념은 ‘그 무엇보다 논리적으로 선행하고 그 자체로 존재하는 하나 혹은 하나됨’으로 규정된다.

 

기독교 전통에서 궁극적 의미에서의 실체로 가정된 것이 신이라면, 유교 전통에서는 이(理)이다. 기독교의 신은 궁극적 의미에서 그 무엇보다 논리적으로 선행하며, 그 자체로 존재하는 하나 혹은 하나됨으로 여겨진다. 고전적 이원론의 관점이 지배한 시절, 선은 초월적 존재인 신의 속성으로, 그리고 이 세상의 악은 선의 결여 정도에 의해 평가 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다. 궁극적 의미에서의 실체가 그 무엇보다 논리적으로 선행한다는 관점은 사회와 자연에서 발견되는 질서와 조화를 우연의 탓으로 돌리지 않는 사고방식과 맞물려 있다. 이때 악은 실체 자체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질서나 조화에서 빗나간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이해 방식은 기독교와 유교 전통 모두에 공통된 것이다.

 

유교 전통의 신적인 것, 즉 이(理)가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어떤 것의 원인이라는 생각은 통용되지 않는다. 이 점은 이(理) 개념에 대한 유학자들의 찬양 일색의 언급을 머릿속에 떠올려 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理)라는 유교의 실체 개념은 기독교 전통에 흡수될 수 없는 측면을 갖고 있다. 이(理)는 그 무엇보다 논리적으로 선행하는 것으로 규정되지만,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으로는 규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알기 위해, 선과 악에 대응되는 두 실체를 가정하는 경우를 기독교와 유교 전통에 각각 대비시켜 보자. 그 전에 본질적 혹은 궁극적 존재를 뜻하는 실체를 가정해야 세계에 대한 해석이나 철학이 가능한 것은 아님을 분명히 하자. 실체를 가정하지 않는 방식의 세계 이해도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실례로 각 대상의 존재는 다른 모든 것에 의존적이고, 대상들의 상호 작용에 의한 어느 계층이 다른 계층에 의존적이라고 한다면, 그 어떤 대상이나 계층도 다른 것보다 본질적이거나 궁극적이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궁극적 의미에서의 실체를 가정해야지만 세계에 대한 철학적 해석이나 종교가 가능하다는 생각은 선입관에 불과하다.

 

 

영지주의와 일맥상통하는 페르시아의 마니교의 교리를 살펴보면, 선에 대응되는 힘과 악에 대응되는 힘이 있다. 그 두 힘은 각각 ‘선의 신’ 혹은 ‘선의 실체’, 그리고 ‘악의 신’ 혹은 ‘악의 신’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한때 심취했던 마니교의 실체 개념과 기독교, 그리고 유교의 실체 개념을 비교해 보면, 기독교와 유교의 실체 개념이 어떻게 다른지가 분명해진다.

 

선의 실체와 악의 실체가 각각 따로 있다고 가정하면, 악은 더 이상 사회와 자연의 질서 및 조화에서 빗나간 것 또는 선의 결여 정도에 의해 평가 가능한 것이 될 수 없다. 악의 기원은 악의 실체에서 기인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선의 실체와 악의 실체를 가정하면, 모든 것은 두 실체의 상호 작용에 의해 설명된다. 이 점에서 두 실체는 모든 것에 논리적으로 선행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두 실체 중 하나만 가지고 세계를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전제된 까닭에, 두 실체는 서로 대등한 것으로 규정된다. 이를 선의 실체와 악의 실체의의 수평적 관계라고 하자.

 

 

선과 악의 두 실체가 수평적 관계를 맺는 까닭에, 둘 중 무엇이 우선적인지는 논할 수 없다. 선의 실체는 악의 실체와 무관하게, 그리고 악의 실체는 선의 실체와 무관하게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반면에 모든 현상은 선과 악의 두 실체가 맺는 대립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세계 이해 방식을 따르는 경우, 인간에게도 선에 대응하는 것과 악에 대응하는 것이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영지주의에서 인간의 영혼은 선의 실체에, 육체는 악의 실체에 기인한 것으로 가정된다. 이때 ‘인간’은 ‘육체에 갇힌 영혼’ 혹은 ‘육체에 의해 더럽혀진 영혼’을 뜻하게 된다.

 

고전적 이원론이 지배한 시절, 기독교의 세계 이해 방식은 선과 악의 두 실체 사이에 성립하는 수평적 관계를 ‘수직적 관계’로 역전시킨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다음은 이를 상징적으로 나타낸 도식이다.

 

 

위 도식의 검은 영역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할까? 만약 선과 악의 수평 관계에서 악의 실체를 제거한다고 해보자. 악의 실체를 제거하는 것은 선의 실체가 될 수밖에 없다. 악의 제거하는 또 다른 무엇을 가정한다면, 이것은 선의 실체를 궁극적인 의미에서의 실체로 가정하는 것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악의 실체를 ‘악의 신’, 그리고 선의 실체를 ‘선의 신’이라고 할 때 선의 신만이 악의 신을 제거할 수 있다. 선의 신이 악의 신을 제거하는 경우는 인간에게 구원을 의미할 수 있다. 하지만 악의 제거는 ‘이 세상의 파괴’를 뜻한다. 육체가 악의 신에 기인한 것으로 여겨지는 한, 악의 제거는 또한 ‘육체의 파괴’를 뜻한다. 따라서 선의 신을 인간 영혼의 구세주로 가정하는 경우, 선의 신은 동시에 파괴의 신이 되어야 한다. 신의 이러한 이중적인 모습을 부정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악의 실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즉, 악이란 본래 없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이때 궁극적 의미에서의 실체는 오로지 하나 혹은 하나됨으로 가정되기 때문에, 위 도식의 검은 영역은 악의 실체 혹은 악의 신을 제거한 것으로 해석될 수 없다. 고전적 이원론이 지배하던 시절의 기독교 교리에 비추어 위 도식을 해석할 때 그 검은 영역은 악 자체가 아니라 ‘선의 결여’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유일한 실체인 신은 전지전능한 창조주로 가정되었다. 신 이외에 모든 것은 불완전한 존재들이다. 완전함에서 정도 차이를 보이는 모든 대상들을 창조한 것과 결부되어 신의 전지전능함은 정당화되었다. 완전함의 정도 차이는 절대 선이 결여된 정도 차이로 이해되었다. 신과 대상들 사이에 대한 이러한 이해 방식은 이미 살펴본 ‘존재 사슬’의 다양한 해석 속에 반영되어 있다. 위 도식의 검은 영역에서 출발해 선의 실체인 신에게 가까이 위치한 존재일수록 완전하다.

 

신이 완전함에서 정도 차이를 보이는 대상들의 세계를 창조한 동기는 무엇일까? 신이 에덴동산에서 추방한 인간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이 세계를 창조했다면, 이 세계는 인간에게 일종의 ‘도덕 훈련장’과 같다. 도덕 훈련을 잘 수행한 인간은 사후에 구원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생각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설에 반영되어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설은 선과 악의 두 실체의 수평적 관계에 근거한 영지주의의 세계 이해 방식을 부정할 목적으로 창작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