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화와 민주주의 (봉인 해제)/세속화와 민주주의

기독교의 신(神) 개념과 신유학의 이(異) 개념

착한왕 이상하 2010. 12. 15. 05:00

(5) 기독교의 신(神) 개념과 신유학의 이(理) 개념

유교 전통의 궁극적 실체 개념인 이(理)가 기독교의 신 개념과 어떻게 다른지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양(陽)과 음(陰)의 관계를 영지주의 전통의 세계 이해 방식에 함축된 선과 악의 두 실체 사이에 성립하는 수평적 대립 관계와 비교해 보자.

 

선의 실체와 악의 실체의 수평적 대립 관계를 가정하는 경우, 그 둘 중 무엇이 우선하는지는 논할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양과 음 중 무엇이 우선하는지는 논할 수 없다. 양은 빛, 열, 불 등 활동적 기운이나 사회의 상부를 차지하는 계급을 상징한다. 그것은 또한 사건 전개 과정의 결과나 감정의 동요 등을 상징한다. 반면에 음은 어두움, 차가움 등 수동적 기운이나 안정된 상태 혹은 사회의 하부를 차지하는 계급을 상징한다. 그것은 또한 사건 전개 과정의 시작이나 차분한 감정 상태를 상징한다.

 

선의 실체와 악의 실체의 수평적 대립 관계에 근거한 세계 이해와 양과 음의 상보적 관계에 근거한 세계 이해 사이에서 발견되는 공통점은 무엇인가? 선과 악의 두 실체 각각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즉, 선의 실체는 악의 실체와 무관하게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으며, 또한 악의 실체는 선의 실체와 무관하게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양은 음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으며, 또한 음은 양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양과 음은 선의 실체와 악의 실체의 수평적 대립 관계와 달리 상보적 관계를 맺는 것으로 가정된다. 따라서 양과 음이 상보적 관계를 맺는다고 할 때, 이것은 단순히 A 없이는 B를 논할 수 없고, B 없이는 A를 논할 수 없음을 뜻하지 않는다. 이는 선의 실체와 악의 실체가 수평적 대립 관계를 맺는다고 가정하는 경우에도 해당하기 때문이다.

 

선의 실체와 악의 실체의 수평적 대립 관계를 가정하는 경우, 선을 기준으로 이 세계의 모든 것은 타락한 것이거나 부패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선과 악의 두 실체가 서로 공조하여 세계의 어떤 긍정적 측면 혹은 조화나 질서를 만든다는 생각은 그러한 가정 아래 정당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조화와 질서에 선이나 아름다움이라는 가치를 부여하는 한에서 그렇다. 양과 음의 관계가 상보적이라고 할 때, 그 관계는 자연과 사회에서 발견되는 조화와 질서가 근거하는 토대로 여겨진다. 따라서 양과 음의 개념은 서로 상반된 것이기는 하지만 서로 공조하는 관계를 맺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양과 음의 관계는 상보적이다.

 

선과 악의 두 실체에 근거한 세계 이해와 양과 음의 상보적 관계에 근거한 세계 이해 사이에서 발견되는 또 다른 차이는 무엇일까? 영지주의 전통에서 선과 악의 두 실체는 그 무엇보다 논리적으로 선행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신유학 전통의 양과 음의 개념에 대해서는 통용될 수 없다.

 

도교(道敎), 불교(佛敎), 유교(儒敎) 사상을 합성한 신유학 전통에서 양과 음은 형태를 만드는 ‘물질적 힘’ 혹은 ‘기(氣)’의 두 종류나 성질을 뜻한다. 또한 양과 음은 기의 분포 차이에 따른 공간의 전체적 특징을 뜻한다. 따라서 천(天)은 양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양의 기운이 분포된 공간을 뜻하기도 한다. 지(地)는 음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음의 기운이 분포된 공간을 뜻하기도 한다. 이러한 까닭에, 오로지 양의 성질만을 가진 것은 없으며, 오로지 음의 성질만을 가진 것도 없다. ‘천지(天地)’가 삼라만상의 생성의 원리로 강조되는 경우, ‘천지조화(天地造化)’는 양과 음의 끊임없는 결합과 분리에 의한 생성과 소멸의 반복을 뜻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만약 천지조화가 기의 활동 자체에 기인한 것이라면, 기보다 더 궁극적인 실체로서 이(理)라는 것을 별도로 가정할 필요가 없다. 또한 양과 음이 단지 기의 두 속성에 불과하다면, 자연과 사회의 질서는 단지 기의 활동성에 기인한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이때, 기는 그 무엇보다 논리적으로 선행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 자체로 존재하는 ‘궁극적 의미에서의 실체’로 여겨질 수 있다. 이는 신유학 전통의 세계 이해 방식에서 부정되는 것이다.

 

만약 기를 궁극적 의미에서의 하나의 실체로 가정하는 경우, 그리고 양과 음을 기의 활동성의 차이로 인해 나타나는 두 상태로 가정하는 경우, 인간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을 기 자체의 속성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양과 음의 상보적 관계로 인해 그러한 것은 기의 활동성에 수반되는 것이라고 주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은 신 개념을 우주에 내재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전통과도 어울릴 수 없다. 기독교의 신 개념이 제아무리 다양해도, 선은 신 자체의 속성으로 여겨진다. 신이 우주 창조 당시 우주를 서식지로 삼았다고 가정하는 경우에도, 즉 신이 우주에 내재한다고 가정하는 경우에도, 자연과 사회가 보여주는 조화와 질서는 신의 속성이 드러난 것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그러한 조화와 질서를 서로 상반된 양과 음의 균형 상태와 같은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기독교의 신 개념과 정합적 관계를 맺기 힘들다. 기독교의 신 개념이 제아무리 다양해도 그렇다.

 

이미 강조했듯이, 기독교와 신유학 전통의 세계 이해 방식에 공통된 것은 우리가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을 궁극적 의미에서의 실체에 기인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관점이다. 우리가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만약 기 자체의 활동성에 수반되는 것이라면, 역으로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도 기 자체에 수반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이때, 선과 악은 그러한 활동성에 수반된 좋은 측면과 나쁜 측면을 뜻할 뿐이다. 이를 받아들이면, ‘순수한 도덕성’이라는 것을 가정하고 그것을 궁극적 의미에서의 실체 자체의 속성이라거나, 실체 자체에서 직접적으로 기인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게 된다. ‘기일원론(氣一元論)’의 핵심인 이 점은 신유학 전통의 세계 이해 방식에서 부정되는 것이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이 땅을 지배한 신유학 전통의 세계 이해 방식에 따르면, 양과 음의 조화는 기의 활동성에 기인한 우연적인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이(理)라는 원리가 반영된 것이다. 유교 전통에서 도덕성을 대표하는 인의예지(仁義禮智)도 이가 구현된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자연과 사회에서 발견되는 조화와 질서는 기의 활동성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 만약 이(理)가 능동적으로 그 자체를 구현할 수 있는 것이라고 가정하면, 어떻게 되는가? 이(理)와 기(氣)는 서로 대립 관계를 맺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로 인해, 그 둘의 관계는 영지주의 전통의 선과 악이라는 두 실체의 수평적 대립 관계로 해석될 여지가 발생한다. 신유학 전통의 세계 이해 방식에서 ‘이(理)를 우주에 내재하는 수동적 원리로, 그리고 기를 능동적 힘으로 간주하는 것’은 이러한 해석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신유학 전통의 세계 이해 방식을 따르면, 기의 활동성 없이는 삼라만상은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자연과 사회에서 발견되는 조화와 질서는 이(理)에 근거해서만이 설명된다. 즉, 어떤 상태의 조화로운 정도는 이의 구현 정도에 따라 평가되는 것이다. 또한 이(理)는 대상의 형태를 규정하는 형상(形狀)과 같은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따라서 ‘이(理)가 기(氣)안에 있다거나 구체적 사물에 내재한다는 것’은 ‘이(理) 없이는 조화와 질서 및 사물의 형태를 설명할 수 없음’을 뜻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理)는 기에 논리적으로 선행하는 ‘궁극적 의미에서의 실체’로 간주된다. 그러나 존재론적 측면에서 접근할 때, 이(理)는 기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이(理)는 기(氣)와 무관하게 그 자체로 존재하는 실체의 개념은 아니다.

 

지상계와 천상계를 이분하는 관점,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을 이분하는 관점, 그리고 평신도와 성직자를 이분하는 관점으로 대표되는 고전적 이원론이 지배하던 시절의 세계 이해 방식을 따르면, 신은 ‘그 무엇보다 논리적으로 선행하며 그 자체로 존재하는 하나됨’이라는 실체로 규정된다. 초월적인 신만이 본래적으로 선한 존재이며, 이 세상의 악은 선의 결여 정도에 의해 평가된다. 이러한 세계 이해에는 우리가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을 ‘궁극적 의미에서의 실체’의 탓으로 돌리지 않으려는 사고방식이 깔려 있다. 그 사고방식은 지난 수백 년 동안 이 땅을 지배한 신유교 전통의 세계 이해 방식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理)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궁극적 실체로 여겨지지 않는다. 이(理)와 기(氣)는 존재론적으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理)의 결여’와 같은 것은 신유학 전통의 세계 이해 방식에서는 통용될 수 없다. 따라서 이(理)의 구현 정도 혹은 드러난 정도에 따라 자연과 사회의 조화와 질서를 평가한다고 할 때, 핵심 질문은 ‘왜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가?’ 혹은 ‘선에 대비된 악은 어떻게 규정되어야 하는가?’와 같은 것이 될 수 없다. 그 핵심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 되어야 한다.

 

• 왜 모든 것은 그 본성상 잠재적으로 선한 것인가?

 

 신유학을 포함한 유교 전통에서 선이란 항상 음양의 조화와 관련되어 이해되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부조화’는 단순히 선을 결여한 것이나 악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부조화는 조화로운 상태로 변통(變通) 가능한 것으로 여겨진다. 선의 기원으로 간주된 이(理)가 양과 음으로 구분되는 기의 활동성에 내재하는 것으로 규정되는 한, 그렇게 여겨져야 한다. 따라서 인간 본성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신유학 전통의 세계 이해 방식과는 어울릴 수 없다. 이 점은 그 세계 이해 방식과 원죄설을 함축한 기독교의 세계 이해 방식, 즉 고전적 이원론이 지배하던 시기의 세계 이해 방식 사이에서 발견되는 차이이기도 하다.

 

원죄설과 같은 것은 신유학 전통의 세계 이해 방식과 양립할 수 없다. 따라서 고전적 이원론과 비교해 볼만한 것이 신유학 전통의 세계 이해라면, 그 세계 이해 방식은 고전적 이원론에 바탕을 둔 세계 이해 방식과는 내용적 측면에서 다를 수밖에 없다. 두 세계 이해 방식의 차이를 구체화하는 가운데, 고전적 이원론에 대비된 ‘중심과 주변의 맥락’이 무엇인지를 알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