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화와 민주주의 (봉인 해제)/세속화와 민주주의

프랑스 혁명을 통해 본 '저기'의 실 꼬임

착한왕 이상하 2011. 5. 6. 02:17

프랑스 혁명을 통해 본 저기의 실 꼬임

 

역사를 여러 가닥의 실들이 서로 얽혀 꼬이는 현상에 비유해 보자. 이때 각 가닥의 실은 특정 이념이나 종교 교리에 비유된다. 실들이 쉽게 꼬이기 위해서는 ‘축’이 있어야 한다. 그러한 축은 서로 다른 실들이 꼬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진행 중인 문제의 상황’과 같은 것에 비유된다. 한 세대나 여러 세대에 걸쳐 논의 가능한 문제들로 구성된 ‘담론의 장’만이 서로 다르면서도 비교 가능한 여러 이념들을 산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근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서양의 역사’를 ‘저기’로, 그리고 ‘서양 역사에 대비된 우리의 역사’를 여기로 상징하자. 역사를 실 꼬임 현상에 비유하는 경우, ‘저기’의 실 꼬임과 ‘여기’의 실 꼬임이 다르다는 것은 ‘저기’의 역사와 ‘여기’의 역사가 다르다는 것이다. ‘저기’의 세속화 과정과 비교해 볼만 한 것이 ‘여기’에도 있었지만, 그것을 ‘저기’의 세속화 과정과 같은 것으로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다. 무종교인이 이를 알고 현실 문제를 진단하는 것과 모르고 진단하는 것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

 

유럽의 세속화 과정을 나무의 성장에 비유할 때, 고전적 이원론의 붕괴 과정은 세속화 과정이라는 나무의 줄기와 같다. 그러나 그 줄기가 ‘세속화된 사회 상태’라는 개화(開花)로 반드시 이어져야 할 필연성은 없다. 즉, 고전적 이원론의 붕괴 과정은 세속화된 사회 상태의 실현에 대한 필연적 원인과 같은 것으로 여겨질 수 없다. 또한 고전적 이원론의 붕괴 과정은 과거 전통에 대한 반발로 나타난 개인주의나 자유주의 관점 등이 지속적으로 확대된 과정도 아니었다.

 

개인주의나 자유주의 관점은 새로운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과거 전통의 유산을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결과였다. 이는 개인주의나 자유주의 관점이 기독교 교리 해석과 논리적으로 양립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적’으로 해석 가능하다는 사실에 의해 뒷받침된다. 이 때문에, 개인주의나 자유주의 관점에 대한 기독교적 해석과 반기독교적 해석 모두 서양 사상사에 나타난 것이다. 따라서 세속화 과정은 과거 전통의 연장선에 서있는 것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과거 전통의 완전한 사장’을 뜻하지 않는다. 이는 지금까지의 논의를 주의 깊게 따라온 사람에게는 분명한 것이지만 프랑스 혁명에 대한 영국 보수 진영의 입장을 살펴봄으로써 더욱 분명해진다.

 

지동설에 대한 회의론, 진보론, 종말론이라는 세 가지 지적 반응이 계몽주의와 낭만주의 사이의 갈등을 거쳐 ‘백색 도덕 제국주의’로 귀결되는 과정을 제 4장에서 살펴보았다. 개인의 개선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은 계몽주의자들이 참여한 프랑스 혁명은 그렇게 귀결되는 시점에서 발생했다. 그들 중 일부는 이상과 신앙의 분리되어 다루어질 수 있다는 관점에서 더 나아갔다. 그들은 무신론을 합리적 증명 대상으로 여긴 무신론자들이었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영국 보수 진영을 대표한 버크(E. Burke)는 계몽주의에 함축된 ‘합리적 개인 관점’을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 공동체와 역사적 전통에서 자유로운 ‘인간 본성’이라는 것을 간주하는 것은 허구를 가정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인간 본성에 근거한 ‘합리적 개인’이란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회 공동체의 구성원인 개인은 근본적으로 사회와 전통이라는 부모의 자식과 같은 존재이다. 따라서 사회와 전통과 무관한 ‘합리적 개인’을 가정하여 공동체를 그저 개인 간 계약의 결과로 간주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프랑스 혁명에 대한 버크의 비판적 입장을 유신론 대 무신론의 대립 구도 속에서 파악해서는 안 된다. 물론 그는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가지고 프랑스 혁명에 대한 그의 비판적 입장을 ‘기독교적’으로, 그리고 프랑스 혁명에 대한 옹호론을 ‘반기독교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이는 역설적이게도 원죄설에 대한 버크의 입장을 분석할 때 분명해진다.

 

원죄설은 신약의 형성 과정을 통해 기독교 교리 해석의 근간이 되었다. 원죄설은 고전적 이원론의 관점인 ‘지상계와 천상계의 이분법’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지상계와 천상계를 이분하는 관점에 따르면, 지구는 신성(神聖)이 구현된 천상계에 속하지 않는다. 선악과를 따먹고 지구로 추방당한 아담의 후손인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다. 여기서 ‘불완전하다는 것’의 의미는 경험이나 추리 능력뿐만 아니라 도덕적 판단 능력 및 양심까지도 포함한다. 원죄설은 계몽주의자들의 환영을 받을 수 없는 관점이었다. 계몽주의자들은 고전적 이원론을 구성하는 관점들을 비판한 것에 그치지 않고 아예 부정한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계몽주의에 함축된 ‘합리적 인간’ 개념에 따르면, 사회는 개인 간 약속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이때 전통을 상징하는 사회적 권위나 인간관계에 근거한 사회의 특징들 모두는 ‘이성적인 것’과 관련된 개인의 속성들로 설명 가능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여기서 ‘이성’은 감정과 공조하여 상황에 합당한 판단을 가능하도록 해주는 능력을 뜻하지 않는다. 이성은 감정에 대비된 합리적 판단의 원천으로, 그리고 감정은 상황 의존적인 것으로 여겨진 까닭에, ‘이성에 따른 판단’은 ‘상황에 합당한 판단’을 뜻하지 않는다. 계몽주의자들은 감정이나 상황적 요인을 ‘이성에 따른 판단’을 방해하는 것으로 여겼다. 즉, 그들은 감정이나 상황적 요인을 이성에 의해 극복되어야 할 대상으로 여긴 인물들이었다.

 

이성의 궁극적 원천은 무엇인가? 다수의 계몽주의자들은 그것을 신으로 간주했다. 이는 계몽주의 자체에 의해 정당화될 수 없다. 계몽주의 자체는 신 존재 가정과 양립 가능하기는 하지만, 신 존재를 필연적으로 전제하는 종교 교리의 체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계몽주의에 뿌리를 둔 자유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기독교 전통을 중시하는 입장이 있는가 하면, 기독교 전통의 종말을 선언하는 입장이 현대에 공존하는 것이다. 따라서 버크가 원죄설에 근거해 프랑스 혁명을 이끈 계몽주의자들을 비판했을 때, 원죄설을 부정하는 것이 기독교 정신에 반하는 것이라는 주장은 버크 개인의 독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원죄설에 대한 버크의 입장을 낭만주의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경우, ‘원죄설’은 특정 시기에 굳어진 기독교의 교리를 대표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버크가 원죄설을 언급할 때, 그는 계몽주의에 함축된 ‘합리적 개인’을 실제 존재하는 인간과는 거리가 먼 ‘추상적 개념’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그러한 추상적 개념에 근거한 모든 정치적 이념 또한 현실과 거리가 먼 이상론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한다. 물론 이상과 현실이 다르다고 해서, 이로부터 이상을 포기해야 한다는 논리는 성립하지 않는다. 이상은 궁극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것일지라도 실천의 목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프랑스 혁명에 대한 버크의 비판에는 ‘합리적 개인’ 개념에 근거한 모든 정치적 이념은 실천의 목적이 될 수 없다는 입장이 깔려 있다. 그 입장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 인간은 천사가 아니다. 인간의 판단은 본질적으로 상황과 전통에 의존적이기 때문이다. 상황 및 전통과 관련된 요인들은 이성에 의해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다. 그것들은 현명한 판단을 위해 고려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현명한 판단은 이성과 감정을 대립 구도 속에서 이해하는 사람에게는 불가능하다.

• ‘합리적 개인’을 가정하는 계몽주의자도 한낱 인간일 뿐이다. 그 자신이 천사가 될 수 없듯이, 그가 다른 사람을 천사화할 수도 없다.

• ‘합리적 개인’을 가정하는 계몽주의자도 전통에서 완전히 탈피해 행위할 수 없다. 또한 공동체를 결속하고 유지하기 위한 새로운 권력 체계를 만들어 내고 거기에 기댈 수밖에 없다.

• 따라서 ‘합리적 개념’에 근거한 그 어떤 정치적 이념도 실현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실천의 목적이 될 수 없다. 즉 그러한 이념은 인류의 이상이 될 수 없다.

 

위 논증의 결론에 대한 전제들은 계몽주의에 함축된 ‘합리적 개인’ 개념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그 내용은 결론을 주장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계몽주의자도 공동체를 결속하기 위해 새로운 권력 체계를 만들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가지고, ‘합리적 개인’에 근거한 그 어떤 정치적 이념도 실천의 목적이 될 수 없다고 단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위 논증의 전제들을 가지고는 기껏해야 그러한 정치적 이념은 실현 불가능하다는 주장만 설득력을 얻는다. 그러한 정치적 이념은 인류의 실천 목적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려면, 위 논증의 전제들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여기서 버크에게 필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논증을 설득력 있게 구성하는 것이다.

 

• ‘합리적 개인’ 개념에 근거한 그 어떤 정치적 이념도 실현 불가능하다. 그러한 개념은 현실과는 거리가 먼 추상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 실천의 도덕적 목적이 될 수 있는 이념은 전통을 존중하는 것에만 국한된다.

• 기존 전통을 사장 대상으로 삼는 정치적 이념을 신봉하는 사람은 혁명에 의해 자신의 이념이 실현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그의 정치적 이념은 공동체의 유지에 적합한 가치 체계로 평가되기 위한 역사적 검증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 혁명에 의해 기존 전통을 새로운 이념으로 대체하려고 할 때, 공동체의 조화로운 결속과 유지에 필요한 미덕들마저도 사장된다. 그러한 미덕들은 전통 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 혁명은 목적 없이 방황하는 개인들로 인한 사회적 혼란을 발생시킨다. 이때 혁명을 주도한 세력은 강압적인 수단을 사용하거나 근거가 모호한 선동을 통해 민중을 규합하려 든다.

• 혁명의 결과는 전보다도 소수에 권력이 집중된 사회 체제이며, 그러한 사회 체제는 조화로운 공동체로 간주될 수 없다.

• 따라서 ‘합리적 개인’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전제한 정치적 이념은 실현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 어떤 실천의 도덕적 목적도 될 수 없다.

 

기독교의 신 개념은 다양하다. 천지를 창조한 조물주로 신을 여기는 관점이 기독교의 다양한 신 개념에 배어 있더라도, 신 개념은 시기별 대세가 된 담론 주제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따라서 원죄설을 지지하는 버크의 언급을 가지고 ‘버크는 정통 기독교 옹호론자’, ‘계몽주의자는 기독교 비판자’라는 식으로 단정지을 수 없다. 원죄설의 인정 여부가 정통 기독교인과 그렇지 않은 기독교인을 구분해주는 척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원죄설을 지지하는 버크의 언급은 계몽주의에 함축된 ‘합리적 개인’ 개념을 비판하려는 ‘수사적 장치’로 이해되어야 한다. 또한 계몽주의자는 세속화 과정을 이끈 진보주의자, 반면에 버크는 세속화 과정을 가로막은 보수주의라는 식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평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세속화 과정을 그저 단선적인 경로에 따른 연속적인 발달 과정으로 여기는 착각에 빠진 사람이다.

 

계몽주의 입장만을 근대적 혹은 현대적인 것과 동일시하는 사람에게 프랑스 혁명은 실패작일 수밖에 없다. 그러한 사람은 세속화 과정에서 나타난 특징들, 즉 근대적 혹은 현대적인 것을 대표하는 특징들이 마치 계몽주의에 의해서만 정당화 가능한 것으로 믿는다. 이러한 믿음을 가진 그가 프랑스 혁명을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할 수 없다. 혁명 후 나폴레옹의 등장과 함께 유럽 각 지역에서는 왕권을 강화하려는 시도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버크가 우려했던 것은 오히려 혁명으로 인해 그러한 시도가 재현되는 것이었다. 권력이 소수에 집중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기준으로만 판단한다면, 버크 또한 진보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그 역시 계몽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권력이 소수에 집중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은 인물이었다.

 

세속화 과정에서 나타난 근대적 혹은 현대적 특징들이 계몽주의 입장에만 근거해 정당화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은 버크의 논증을 어떤 식으로 피해나가려고 할까? 그에게 가장 손쉬운 방법은 프랑스 혁명이 성공할 여건이 당시에는 아직 갖추어지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는 19세기 말 이후나 20세기 초에 발생한 여러 혁명을 프랑스 혁명과 비교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려는 동기를 갖고 있다. 그런데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 상황은 프랑스 혁명이 발생한 18세기 말 상황과는 다르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에는 ‘정치가 세상을 원하는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관점’이 유럽 지식인들을 지배했던 시대이다. 그런데 그 시대에 나타난 민주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아나키즘 등 여러 이념들이 계몽주의에만 뿌리를 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계몽주의만이 세속화 과정에서 나타난 근대적 혹은 현대적인 것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믿음은 역사적 증거를 결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때 계몽주의의 열렬한 옹호자는 그러한 믿음을 고수하기 위해 자신의 이념이 실현된 미래의 유토피아를 가정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을 기준으로 과거 역사를 평가하는 경우, 남는 것은 자신의 독단에 의해 왜곡된 역사밖에 없다.

 

무종교인이 프랑스 혁명에서 어떤 교훈을 얻고 싶다면 혁명의 결과에 대한 평가에만 집착해서는 안 된다. 그 교훈은 무종교인도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주장할 수 있는 사회 상태가 도래한 과정, 즉 세속화 과정을 그저 단선적 경로에 따른 발달 과정으로 여기는 착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한 착각에 빠진 무종교인은 그 어떤 이념에도 종속되길 거부하는 ‘진정한 무종교인의 관점’을 얻을 수 없다. 즉, 그는 단지 특정 종교의 교리를 신봉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만 무종교인일 뿐이다. 세속화 과정이 단선적 경로에 따른 연속적 발달 과정이라고 착각하는 무종교인은 계몽주의 자체가 세속화 과정의 원동력이라고 착각한다. 이때 그는 세속화 과정에서 나타난 근대적 혹은 현대적 특징들, 실례로 ‘개인의 자유의 확대’, ‘계층 분화’, ‘세계화’ 등이 계몽주의에 의해서만 정당화 가능한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그러한 착각에 빠진 무종교인은 버크의 논증에 기대어 ‘도덕의 종교 기원론’을 옹호하려는 사람 앞에서조차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

 

세속화 과정은 단선적 경로에 따른 연속적인 발달 과정이 아니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충실히 따라온 사람에게 이 점은 더 이상 따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계몽주의 입장과 버크의 입장 모두 사실은 ‘세속화 과정이라는 물결에 휩싸인 두 조약돌’에 비유 가능함을 명백히 하기 위해, 세속화 과정에 대해 두 가지만 다시 언급한다.

 

• 첫째, 근대적 혹은 현대적인 것을 대표하는 특징들인 ‘개인의 자유의 확대’, ‘이성의 강조’, ‘가치 체계의 다원화’, ‘세계화’ 등은 세속화 과정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러한 특징들이 단 하나의 관점, 이념 혹은 이론에 의해서만 옹호 가능한 것은 아니다. ‘개인의 선택을 존중하는 것 혹은 누구나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것’, ‘감정과는 구분되는 추론 및 추상화 과정 등의 합리적 능력이 과학과 기술의 결합에 큰 기여를 했다는 것’, ‘공동체에 해가 되지 않는다면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내세울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국가 간 경계가 느슨해진 것’ 등이 근대적 혹은 현대적인 것을 대표하는 특징들의 실제 양상이다. 과학적 가설에 초자연적인 것을 섞지 않겠다는 ‘자연주의적 태도’가 과학의 세속화 과정에서 굳어졌다고 할 때, 과학적 발견은 그러한 태도를 존중하는 다양한 세계 이해 방식에 대해 열려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속화 과정에서 나타난 근대적 혹은 현대적인 것들의 실제 양상도 다양한 해석에 대해 열려 있다.

 

• 둘째, 세속화 과정을 커다란 나무에 비유할 때, 고전적 이원론의 붕괴 과정은 그 나무의 뿌리와 같다. 하지만 세속화 과정이라는 나무에 ‘세속화된 사회 상태’라는 꽃이 열리기까지의 전 과정은 필연적인 어떤 인과 법칙에 의한 것이 아니다. 즉, 세속화된 사회 상태는 고전적 이원론의 붕괴 과정에 이어질 수 있는 가능한 사회 상태 중 하나로 여겨져야 한다. 고전적 이원론을 구성하는 세 관점인 ‘지상계와 천상계의 이분법’,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의 이분법’, ‘평신도와 성직자의 이분법’이 붕괴되거나 약화되는 과정은 서로 중첩되면서도 단계적으로 일어났다. 계몽주의가 유럽 지식인들을 사로잡은 시점은 ‘지상계와 천상계를 이분하고 이에 따라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을 이분하는 관점’이 위력을 잃게 된 시점이다. 반면에 신분제의 위계질서 속에 반영되어 있는 ‘평신도와 성직자의 이분법’이라는 관점이 위력을 잃게 된 시점은 19세기 중엽 이후이다. 그렇게 되는 데에는 종교가 사회 통합의 지배적 원리는 아니라는 인식의 확대, 그리고 이와 함께 발생한 ‘세속화 운동’의 역할이 컸다. 그러나 세속화 과정에서 나타난 근대적 혹은 현대적 특징들이 세계 여러 지역으로 확장되도록 만든 사건은 제 2차 세계 대전이었다. 19세기 말 이후부터 가속화된 분열 양상 속에서 ‘우리 유럽’이라는 이념을 지탱해주었던 ‘백색 도덕 제국주의’는 식민지 팽창주의로 이어졌고, 세계 대전의 종식과 함께 식민지 팽창주의는 일단 통용될 수 없게 되었다.

 

세속화 과정에 대한 위의 두 언급을 고려하는 경우, ‘계몽주의자는 인간의 합리적 능력이 갖는 긍정적 역할을 옹호한 사람이고 버크는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는 식의 주장은 통용될 수 없다. 계몽주의자와 버크 모두 인간의 합리적 능력을 경험적으로 연구하기 힘든 시대에 살았다. 모두 그러한 능력을 가능하도록 해주는 ‘마음의 원천’으로서 이성이라는 것을 가정했다. 다만 계몽주의자와 달리 버크는 이성의 한계가 단순히 경험의 한계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의 불완전함에서 기인한다고 여겼다. 이 때문에, 버크는 역사적으로 굳어진 미덕이나 감정의 도움 없이는 이성에 따른 합리적 능력도 제대로 기능할 수 없다고 여겼다. 따라서 그가 계몽주의에 함축된 이성 개념을 ‘실현 불가능한 추상적 개념’에 불과하다고 비판한 것을 가지고 ‘계몽주의자는 이성의 편, 버크는 이성의 적’이라는 표제어에 적합한 내용을 역사를 바탕으로 구성할 수 없다.

 

세속화 과정이 여러 사건을 거쳐 가치 체계의 다원화로 귀결되는 까닭에, 종교 시장이 형성된 사실을 가지고 세속화 과정을 사소하거나 허구에 불과하다는 입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또한 특정 시기를 과거 전통과 단절된 것으로 규정하기 위해 해당 시기에 ‘규범적 독자성’을 부여하는 입장조차 실제로는 ‘재구성의 변형 과정’이라는 맥락 속에서 평가되어야 함을 논했다. 고전적 이원론의 붕괴가 19세기 세속화 운동으로 이어진 방식은 과거 전통과의 단절도 아니며, 과거 전통의 단순한 수용 방식도 아니다. ‘재구성의 변형 과정’은 ‘특정 시기를 지배한 주제의 생성’, ‘과거 전통의 재구성으로서의 문제 해결 과정’, ‘새로운 세계 이해 및 관점의 생성’, ‘새로운 주제 생성’이라는 ‘역사적 템포(historical tempo)’들로 구성됨을 논했다. ‘재구성의 변형 과정’들이 중첩된 방식으로 ‘세속화 과정’을 파악하는 경우, 과거 전통에 대한 지적 반응들에 국한하여 세속화 과정을 논하는 것은 옳지 않다. 계몽주의와 버크의 입장으로 대표되는 낭만주의 모두 세속화 과정에서 나타난 그러한 지적 반응들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 당시, 계몽주의자와 버크 모두 세속화 과정이 무엇인지를 명백히 인식할 수 없었다. 그들 모두는 세속화 과정이라는 나무의 뿌리에 해당하는 ‘고전적 이원론의 붕괴 과정’을 경험했다. 정확히 말하면, 고전적 이원론을 구성하는 세 가지 관점 중에서도 ‘지상계와 천상계의 이분법’과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의 이분법’이라는 두 관점이 위력을 잃게 된 세태(世態)를 경험했다. ‘평신도와 성직자의 이분법’이라는 관점은 계층 분화가 가속화된 19세기 중엽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 당시 유럽의 각 지역에서는 왕권이 약화되고 있었던 반면, 프랑스는 다른 지역보다 권력이 왕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왕은 절대 권력을 행사하기 위한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세태의 흐름에 적응하지 못한 프랑스의 이러한 양상도 혁명을 발생시킨 원인 중 하나로 고려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 계몽주의를 지지하는 지식인들이 혁명을 이끌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혁명은 민중의 지지를 필요로 하며, 민중의 지지 기반은 단순히 어떤 사상이나 이념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지상계와 천상계를 이분하고 이에 따라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을 구분하는 관점이 지배력을 잃은 세태에서 절대 왕권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도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세태에 부합하는 ‘신과 자연,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요청되었고, 이에 따라 ‘개인’, ‘이성’, ‘자유’ 등의 개념들의 관계를 재구성해야 한다는 주제가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계몽주의자와 버크 모두 그러한 논의를 이끈 인물들이었다.

 

계몽주의자들은 과거 전통을 ‘사장되어야 할 대상’으로 간주했다. 다수의 계몽주의자는 근대에 나타는 특징들이 과거 전통과는 구분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시대를 과거와 단절된 것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그러한 특징들에 ‘규범적 독자성’을 부여했다. 하지만 그러한 정당화도 알고 보면 ‘개인’, ‘이성’, ‘자유’ 등의 개념들의 관계를 재해석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나온 관점들에 근거하고 있다. 결과의 측면에서 계몽주의를 평가하면, 계몽주의 입장은 과거 전통에 흡수될 수 없다. 이 때문에, 계몽주의에 따른 기독교 교리 해석 및 이성과 신앙의 관계에 대한 해석은 중세의 관점과 어울리기 힘들다. 그러나 결과가 아닌 개념의 변형 및 형성 과정의 측면에서 계몽주의를 평가하는 경우, 계몽주의 입장은 과거 전통을 새로운 주제에 맞추어 변형한 것에 해당한다.

 

계몽주의자와 달리 버크에게 과거 전통은 ‘존중해야 할 대상’이다. 그에게 공동체란 개인들의 합리적 판단에 근거한 계약이나 선택만으로는 조화롭게 유지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전통을 존중한다는 것이 버크에게 ‘과거로의 회귀’를 뜻하지는 않는다. 고전적 이원론이 약화되는 시점에서 계몽주의자들과 논쟁했던 버크 역시 지상계와 천상계를 이분하는 관점을 그대로 수용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을 이분하는 관점도 그대로 수용할 수 없었다.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을 이분하는 관점은 지상계와 천상계를 이분화는 관점과 논리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버크가 그러한 관점에 함축된 원죄설에 기대어 인간의 합리적 능력이 갖는 한계를 논한 것은 맞다. 하지만 초자연적인 것에 운명을 맡겨야 한다거나 하늘이 지상에 영향을 미친다는 식의 전통적 사고방식을 옹호한 것은 아니다. 버크 또한 개인의 자유가 확대되어야 한다는 데 동의한 인물이었다. 자유가 반드시 계몽주의의 ‘합리적 개인’을 전제할 때만이 보장된다는 생각은 독단에 가깝다는 버크의 지적은 옳다. 물론 그는 기독교가 사회의 통합 원리로 작용해야 한다고 믿은 인물이었다. 하지만 버크가 살던 당시에는 ‘종교도 사회를 구성하는 하나의 기능 단위이다’라는 인식이 아직 사회 전체로 확대되지 않았다. 그러한 인식은 19세기 중엽 이후에나 민중의 의식 속에 자리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계몽주의자와 버크 모두 고전적 이원론이 약화된 시기에 나타난 주제들을 놓고 고민했다. ‘계몽주의 대 낭만주의’라는 표제어로 종종 표현되는 이들의 입장 차이는 훗날 ‘개인과 집단의 관계’라는 주제를 놓고 벌어진 논쟁으로 이어진다. 그러한 논쟁은 ‘정치가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신념’이 탄생하는 데 기여했다. 민주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아나키즘 등의 이념이 형성되고 서로 경쟁하는 과정에서 제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다. 제 2차 세계 대전의 종식과 함께 근대적 혹은 현대적인 것의 특징들은 세계 각 지역으로 확장되었다. 그리고 가치 체계가 다원화된 지금, ‘차이와 공존’, ‘다양성과 통합’, ‘갈등과 중재’ 등이 중요한 담론 주제로 떠올랐다. 특정 정치적 이념이나 종교 교리가 문제 해결을 위한 구심점이 될 수는 없는 상황이 도래했기 때문이다.

 

역사를 여러 가닥의 실들이 꼬여 이어지는 것에 비교해 보자. 각 가닥의 실은 계몽주의와 같은 어떤 시대의 이념 혹은 특정 집단의 정체성과 관련된 특징들에 비교 가능하다. 실들이 꼬여 어떤 방향성을 갖기 위해서는 ‘축’이 있어야 한다. 그러한 축은 실들의 꼬임을 견뎌낼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축에 비교 가능한 것은 단순히 어떤 이념이나 입장과 같은 것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서로 다른 실들이 공조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인 까닭에 여러 입장들이 뒤섞인 ‘문제의 상황’과 같은 것이 되어야 한다. 세속화 과정을 그러한 축으로 잡는 경우, 세속화 과정이라는 축은 단순히 주어진 것이나 고정된 것이 아니다. 그 축은 고전적 이원론을 구성하는 핵심인 ‘지상계와 천상계를 이분하는 관점’이 위협을 받기 시작하면서 생겨났다. 고전적 이원론을 구성하는 또 다른 관점인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의 이분법’이 약화되는 시점에 이르러, 세속화 과정이라는 축을 중심으로 계몽주의를 비롯한 여러 입장의 실들이 꼬이게 된다. 계몽주의에 대한 버크의 비판도 그러한 여러 입장 중 하나로 이해되어야 한다. 사회의 계층 분화가 가속화되면서, 종교는 사회 통합의 지배적 원리가 될 수 없다는 인식이 확대되었다. 이와 함께 평신도와 성직자를 이분하는 관점, 즉 신분제에 남아 있던 관점도 더 이상 사람들의 통념으로 기능할 수 없게 되었다.

 

서양의 세속화 과정을 평가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현재의 상황에 대한 어떤 개인적 판단을 정당화하기 위해 세속화 과정을 지나치게 긍정적으로만, 아니면 부정적으로만 평가해서는 안 된다, 특히 무종교인은 세속화 과정을 마치 종교의 사장 과정으로 해석하는 무지한 무신론자의 선동에 휩싸여서는 안 된다. 그러한 선동에 휩싸인 무종교인은 세속화 과정이 진행된 실제 역사를 망각하게 된다. 그는 세속화 과정을 마치 고정된 대상처럼 여기고 거기에 지나치게 긍정적 가치만을 부여하려 든다. 이때 그는 식민지주의의 팽창, 제 2차 세계 대전의 발발, 그리고 제국주의의 현존 등을 세속화 과정에 반하거나, 혹은 세속화 과정을 지연시키는 사건으로 단순하게 해석하려 든다.

 

근대적 혹은 현대적 특징들이 세속화 과정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는 것과 그러한 특징들이 세계 여러 지역으로 확대되었다는 것은 구분되어야 한다. ‘개인의 선택을 존중하는 것 혹은 누구나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것’ ‘추론 및 추상화 과정 등의 합리적 능력이 과학과 기술의 결합에 큰 기여를 했다는 것’, ‘공동체에 해가 되지 않는 의견은 누구나 주장할 수 있다는 것’ 등의 근대적 혹은 현대적 특징들이 세속화 과정에서 이론적 정당성을 얻으면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 세속화 과정은 어디까지나 유럽을 중심으로 벌어진 것이다. 계몽주의, 낭만주의 및 여러 정치적 이념들이 세속화 과정에서 나타난 방식은 결코 ‘집단 간 권력 균형 및 분배’나 ‘문화적 다양성’을 전제한 방식이 아니었다. 계몽주의와 낭만주의 입장 모두 ‘백색 도덕 제국주의’라는 관점을 배척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를 뒷받침해 준다.

 

‘문화 가로지르기 관점’에서 근대적 혹은 현대적 특징들이 논의되기 시작한 시점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더욱이 그러한 특징들이 유럽이 아닌 다른 지역에 수용되는 방식도 일률적이지 않다. 종교가 사회 통합의 지배적 원리로 기능할 수 없게 된 사회 상태를 세속화된 것으로 규정할 때, 이는 세속화된 사회 상태가 유럽의 세속화 과정과는 다른 방식으로, 심지어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도 가능함을 암시한다. 이러한 암시는 이 땅의 실제 역사에 관심을 가질 때 명백한 사실로 굳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