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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CTC 퀴즈: 거짓말쟁이 역설(The Liar Paradox)

착한왕 이상하 2012. 5. 29. 23:52

* 저자 이상하의 허락 없이 이 글을 교재 편찬 및 문제 개발 등 상업적 목적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GCTC 031-381-2282)

 

* 다음 글을 읽고 [퀴즈]를 풀어 보자. 이 퀴즈를 풀어야 이 글의 완성된 내용이 무엇인지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러한 퀴즈는 <청소년 사고 훈련 과정>, <논증적 글쓰기 과정>을 마치고 본격적인 <사고 훈련 과정> 일부를 이수한 학생들을 위한 것이다. 그러한 학생들은 훗날 취업을 할 때에도 평균 수명 10년은 잡아먹을 무지막지한 이 나라 대기업보다는 구글 정도는 노릴 학생들이며, 또 특정 영역에서 자기 이론을 가진 진정한 전문가가 되기 위해 입시를 그저 수단으로 여기는 학생들이다. 물론 현재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 중에서도 이 기준을 만족하는 태도를 지닌 학생들은 분명히 많지는 않을 것이다. 어쨌거나 현행 수능은 주기적으로 나누어주는 ‘기출 문제 유형별 총정리’만 꾸준히 풀어도 충분히 고득점이 가능한 시험이다. 좀 더 멀리보고 자기 자신에게 의미있는 삶을 개척하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거짓말쟁이 역설(The Liar Paradox) 퀴즈

 

‘역설적(paradoxical)’이라는 표현은 크게 세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첫째, 어떤 진술 P가 역설적이라고 할 때 P는 대다수 사람들이 믿고 있는 것에 반하는 경우가 많다. 둘째, P가 역설적이라고 할 때 P는 우리에게 익숙하거나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것에 반하는 현상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셋째, ‘역설적’이라는 표현은 모순적 결론을 발생시키는 논증 과정에 적용되기도 한다. 보통 ‘역설(paradox)’은 이러한 세 번째 의미에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고사성어(古事成語) ‘모순(矛盾)’은 논리학의 모순 관계나 모순적 결론을 뜻하기 보다는 모순적 결론을 발생시키는 역설에 가깝다. 이 세상의 모든 창을 막을 수 있는 방패가 있다고 해보자. 또 이 세상의 모든 방패를 뚫을 수 있는 창이 있다고 해보자. 이들 전제로부터 모순이 발생한다. 역설을 해결한다는 것은 그러한 모순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역설을 해결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전제들을 나두고 논리적 추론 방식을 수정하여 모순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이 있다. 또 논증 맥락을 구성하는 데 필요한 언어 구조를 수정하여 모순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이 있다. 역설을 해결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은 전제들을 부정하거나 수정하여 모순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이 있다. 실례로 ‘이 세상의 모든 창을 막아내는 방패가 있다’ 혹은 ‘이 세상의 모든 방패를 뚫을 수 있는 창이 있다’라는 전제를 부정하면, ‘모순’ 이야기의 역설은 더 이상 발생하지 않는다. ‘모순’ 이야기의 역설을 해결하기 위한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이 ‘전제 부정’인 이유는 무엇일까? 주어진 전제들이 상식적 수준에서 받아들이기 힘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세상의 모든 창을 막아내는 방패가 있다’ 혹은 ‘이 세상의 모든 방패를 뚫을 수 있는 창이 있다’라는 전제 자체가 ‘앞서 언급한 첫 번째 의미의 사용법에서의 역설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전제들 자체가 역설적인 것으로 취급될 수 있는 경우, 역설을 해결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은 전제들을 부정하는 것이다.

 

모든 역설의 전제들이 대다수 사람이 믿는 것에 반한다는 점에서 역설적인 것은 아니다. 따라서 전제 부정이나 수정에 근거한 역설의 해결 방법이 자연스럽다고 하더라도, 그 방법이 반드시 역설을 해결하기 위한 가장 타당한 방법이라고는 할 수 없다. ‘거짓말쟁이 역설(the liar paradox)’이 흥미로운 이유 중 하나는 다양한 해결 방법들이 제시되고 논의 중에 있기 때문이다. 거짓말쟁이 역설은 6세기 경 크레타(Crete)의 시인 에피메니데스(Epimenides)와 관련된 다음 우화에서 기인한 역설이다.(*)

 

• 고대 시대, 크레타에 사는 모든 사람은 참인 진술을 만들 수 없었다. 크레타에 살았던 에피메니데스는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다’라는 진술을 만들었다. 에피메니데스는 거짓말을 한 것일까?

 

위 우화에서 기인한 거짓말쟁이 역설은 다음 진술을 전제로 삼는다.

 

• 지금 말한 진술은 항상 거짓이다.

 

이때 다음과 같은 역설이 발생한다. 

 

(1) 지금 말한 진술은 항상 거짓이다.

(2) 모든 의미있는 진술은 참 또는 거짓이다.

(3) 어떠한 진술 P에 대해 P가 거짓일 때 ‘P가 참이다’라는 진술은 거짓이며, P가 참일 때 ‘P가 거짓이다’라는 진술은 거짓이다.

(3) (1)이 참이라고 말해 보자.

(4) (1)이 참이면, 지금 말한 (3)은 거짓이어야 하므로 (1)은 거짓이다.

(5) 또한 (3)에 의해 (1)은 참이다.

(6) (1)이 거짓이라고 말해 보자.

(7) (1)이 거짓이면, 지금 말한 (5)는 거짓이어야 하므로 (1)은 참이다.

(8) 또한 (6)에 의해 (1)은 거짓이다.             

(9) (3)~(5)에 의해 (1)은 참이면서 거짓이다.

(10) (6)~(8)에 의해 (1)은 거짓이면서 참이다.               

(11) 따라서 (1)은 그 어떤 경우에나 참인 동시에 거짓이다.

 

위처럼 구성된 거짓말쟁이 역설을 살펴보면, (1)에 대한 참 거짓 판단이 ‘vicious circle’로 불리는 ‘모순적 악순환’을 발생시킴을 알 수 있다. (1)이 참일 때 (1)은 거짓이 되며, (1) 거짓일 때 (1)은 참이 되기 때문이다. 거짓말쟁이 역설을 해결하는 방법으로는 참 또는 거짓이라는 진리치의 순서를 정하는 방법이 있다. 또 참 거짓이라는 진리치 외에 참도 거짓도 아닌 중간적인 진리치를 도입하여 거짓말쟁이 역설을 해결하는 방법이 있다.(**)

 

상식적인 측면에서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다’라는 진술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해 부정적으로 답하는 경우, 크레타인인 에피메니데스가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다’라고 말했다는 것은 허구로 간주된다. 에피메니데스와 관련된 우화에 대한 이러한 접근 방식을 따르는 경우, ‘지금 말한 진술은 항상 거짓이다’라는 진술을 부정하는 방법도 거짓말쟁이 역설을 해결하는 방법이다. 다만 그렇게 부정하는 방법은 크레타인들이 진술을 만드는 맥락에 포함되지 말아야 한다. 이를 정확히 알려면, ‘자기 언급(self-reference)’과 ‘참 거짓 판단의 맥락 혹은 상황 의존성’에 대해 알아야 한다.

 

‘자기 언급’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다음 진술들을 비교 분석해 보자.

 

• W: 지금 쓴 것은 우리말로 써졌다.

• S: 지금 말한 것은 거짓이다.

 

첫 번째 진술 W는 참일 수밖에 없다. 반면에 두 번째 진술이 참이라면 동시에 거짓이 되며, 또한 거짓이라면 동시에 참이 된다. 따라서 첫 번째 진술은 역설을 발생시키지 않는 반면, 두 번째 진술 S는 역설을 발생시킨다. 이때 주의해야 하는 것은 두 진술 모두 ‘자기 언급’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 쓴 것이 ‘지금 쓴 것은 우리말로 써졌다’라는 W라면, 해당 진술의 ‘지금 쓴 것’은 해당 진술 W 전체를 언급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두 번째 진술 S의 ‘지금 말한 것’은 해당 진술 S 전체를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자기 언급’의 성격은 두 진술을 집합론을 빌려 재처리한 경우 명백해 진다.(***)

 

• W=[W∈우리말(SR)]

• S=[S∈거짓(SR)]

 

위에서 SR은 자기 언급 성격을 가진 진술들로 구성된 맥락을 뜻한다. 이때 ‘우리말(SR)’과 ‘거짓(SR)’은 각각 ‘SR 중 우리말로 써진 것’과 ‘SR 중 거짓인 것’을 뜻한다. 참 거짓 판단의 맥락 의존성을 고려하지 않은 경우에도 자기 언급 성질을 가진 모든 진술이 항상 역설을 발생시키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참 거짓 판단의 맥락을 별도로 고려하지 않는 경우, 다음 진술들 모두 SR의 맥락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 W(=[W∈우리말(SR)])는 참이다.

• W(=[W∈우리말(SR)])는 거짓이다.

• S(=[S∈거짓(SR)])는 참이다.

• S(=[S∈거짓(SR)])는 거짓이다.

 

‘W는 참이다’는 받아들일 수 있지만, ‘W는 거짓이다’는 아니다. ‘참(SR)’과 ‘거짓(SR)’을 각각 ‘SR 중 참인 것들’과 ‘SR 중 거짓인 것들’이라고 할 때, W는 오로지 ‘참(SR)’에 속할 뿐 ‘거짓(SR)’에는 속할 수 없다. 따라서 ‘W는 참이다’는 역설을 발생시키지 않으며, 이를 그림으로 나타내 보면 다음과 같다.

 

위 그림은 자기 언급 성격을 갖는 W는 역설을 발생시키지 않음을 보여 준다. 이제 ‘S(=[S∈거짓(SR)])’는 참이라고 해 보자. 이때 S는 거짓이다. 왜냐하면 S가 참이면, S는 ‘거짓(SR)’에 속하게 되기 때문이다. 역으로 ‘S(=[S∈거짓(SR)])’가 거짓이라고 해 보자. 이때 S는 참이다. 왜냐하면 S가 거짓이면, ‘S∈거짓(SR)’은 참이 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발생하는 역설을 그림으로 나타내 보면 다음과 같다.

 

위 그림을 보면, 거짓말쟁이 역설을 발생시킨 이유로 ‘자기 언급 성격을 가진 진술에 대한 참 거짓 판단’까지도 맥락 SR에 포함된 것으로 간주한 것을 들 수 있다. 만약 ‘SR에 속한 진술들에 대한 참 거짓 판단’을 SR에 포함된 것이 아니라 ‘SR에 대한 평가 맥락 EC(SR)(evaluative context to SR)’에 포함된 것으로 간주해 보자. 이때 ‘S(=[S∈거짓(SR)])’는 SR에 속하지만, ‘‘S(=[S∈거짓(SR)])’는 참이다’와 ‘‘S(=[S∈거짓(SR)])’는 거짓이다’는 EC(SR)에 속하게 된다. 자기 언급 성격을 가진 진술을 포함해 모든 진술이 참 또는 거짓 중 하나의 진리치만 가질 수 있고, ‘SR에 대한 평가 맥락 EC(SR)’이 무모순하다고 가정하는 경우, 맥락 EC(SR)에서 ‘S(=[S∈거짓(SR)])’는 오로지 거짓일 수밖에 없게 된다. EC(SR)에서 ‘S(=[S∈거짓(SR)])’가 거짓으로 간주되는 경우, ‘S(=[S∈거짓(SR)])’는 맥락 SR에서 참 거짓 판단 가능한 의미있는 진술의 자격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더 이상 거짓말쟁이 역설은 발생하지 않게 된다. 이를 정확히 분석해 보기 전에 그림으로 나타내 보면 다음과 같다.

  

 

[퀴즈] 위 글을 완성시킨 후 거짓말쟁이 역설에 대한 하나의 소논문을 쓴다고 생각하고 다음을 증명해 보자.

 

• S(=[S∈거짓(SR)])는 평가 맥락 EC(SR)에서 거짓이다.

 

  

 

(*) 에피메니데스의 우화에 대해서는 다음 책을 보라. Poundstone, W.(1988), Labyrinths of Reason, Doubleday.

(**) Bhave, S.V.(1992), “The Liar Paradox and Many-Valued Logic”, Philosophical Quarterly 42. 거짓말쟁이 역설을 해결하는 여러 방법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Barwise, J. and Etchemendy, J.(1987), The Liar, Oxford University.

(***) 집합론에 근거한 그러한 재처리 방식은 다음에 따른 것이다. Walker, J.S.(2003), “An Elementary Resolution of the Liar Paradox”, The College Mathematics Journal, Vol.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