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 에세이/역사의 단편들

플라톤과 아카데미(Plato and the Academy)

착한왕 이상하 2012. 6. 27. 00:58

 

 

플라톤과 아카데미(Plato and the Academy)

 

 

 

‘아카데미’라는 용어는 ‘전문가 육성을 위한 훈련 기관’이나 ‘전문가들로 구성된 학술 단체’를 뜻한다. ‘아카데미’의 이러한 의미는 ‘플라톤의 아카데미’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16세기 초 라파엘(Raphael)이 그린 벽화에 잘 반영되어 있다. 다음 그림을 보면, 라파엘은 르네상스 시절 고전에 대한 관심을 플라톤의 아카데미를 통해 보이려 했다.

 

 

플라톤의 아카데미와 관련해 회자되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플라톤은 시실리 지역을 여행하고 아테나로 돌아온 직후 그의 아카데미를 세웠다. ‘아카데미’는 ‘아카데모스(Akademos)’라 불리는 신화의 인물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아카데모스는 아테네 중심부 북서 쪽에 위치한 정원과 나무숲을 남겼다. 기원 전 6세기 이후, 아카데모스가 남긴 장소는 아테네 시민들이 운동을 즐기는 공공장소로 사용되었다. 또 그곳에서 신들을 숭배하는 축제가 열리곤 했다. 플라톤은 아카데모스의 정원과 나무숲을 물려받아 학문적 토론을 위한 건물과 신전을 세웠다. 그리고 그 건물을 아카데모스의 이름을 따 ‘아카데미’라고 칭했다. 플라톤은 아카데미 건물의 현관 입구 윗벽에 ‘기하학자가 아닌 자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Let no one who is not geometer enter!)’라는 문구를 새겼다.

 

 

그런데 위 이야기를 받아들이기 힘든 점이 있다.

 

 

• 도시 국가 아테네의 공공 소유물인 아카데모스의 정원과 나무숲이 어떻게 일개 개인인 플라톤에게 넘어갈 수 있었을까?

 

 

비록 시민 계급에 국한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리스 토의 문화를 고려한다면, 플라톤이 아카데모스의 정원과 나무숲을 인수 받는 과정은 상당히 까다로운 심의 절차를 거쳤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추측을 그럴듯하게 해주는 역사적 흔적은 없다. 키케로의 문헌을 보면, 아카데미는 플라톤 이전부터 존재했다. 아카데미의 소장을 역임한 인물로 데모크리토스(Democritus), 아낙사고라스(Anaxagoras), 엠페도클레스(Empedocles), 크세노파네스(Xenophanes), 그리고 소크라테스(Socrates) 등이 언급되고 있다. 키케로의 기록을 받아들이면, 아카데모스의 이름을 딴 아카데미의 역사는 기원 전 265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플라톤이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그곳에서 자신의 철학을 설파했다는 통념은 의심해 볼 여지가 있다. 이 점은 유대계 고전학자 존 글루커(John Glucker)의 연구를 접할 때 더욱 설득력을 얻게 된다.(*) 글루커는 기원 후 2세기 경 지리학자 파우사니아스(Pausanias)의 문헌을 조사했다. 아카데미는 기원 후 2세기에도 존속하고 있었다. 아카데미에 대한 파우사니아스의 기록에는 플라톤의 이름이나 그의 학파는 아예 나오지도 않는다. 그의 기록에 따른다면, 아카데미는 그리스 시민을 위한 공원과 같은 곳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아카데미는 플라톤 이전부터 존재했고, 플라톤은 단지 아카데미 소장을 역임한 여러 인물 중 한 명이었다. 이를 받아들이는 경우, 플라톤이 건물 현관 벽 입구에 새겼다는 문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기하학자가 아닌 자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는 문구는 플라톤이 사후에 유명해지고 나서 각색된 것으로 보아야 마땅하다. 그리스 신전 등에 새겨진 문구는 ‘공평하지 않거나 정의롭지 않은 자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였다고 한다. 플라톤이 새겼다는 문구는 그러한 문구에서 ‘공평하지 않거나 정의롭지 않은 자’를 ‘기하학자가 아닌 자’로 바꾸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 점, 선, 면 등 기하학의 대상은 추상적인 것을 대표한다. 또한 기하학의 지식은 불변의 확실한 지식을 대표한다. 그러한 지식은 플라톤이 추구한 것이었다. 따라서 ‘기하학자가 아닌 자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는 문구는 플라톤이 유명해진 후 그의 학문적 성향을 강조하기 위해 각색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플라톤 이전부터 아카데미가 존재했다면, ‘플라톤의 아카데미’보다는 ‘플라톤과 아카데미’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다. 플라톤은 아카데미 소장을 역임한 여러 인물 중 한 명이었을 뿐이다. 물론 아카데미에서 플라톤은 정기적인 강연회를 열었고, 또 자신만의 학문적 토론 모임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확대 해석하여 플라톤 이후 아카데미는 시민을 위한 공공장소에서 교육과 학문적 토론을 담당한 기관으로 변모했다고 주장하기는 힘들다. 플라톤이 아카데미 소장으로 재직한 기간 동안, 아카데미의 조직 구성 방식이 바뀌었다는 역사적 증거는 없다. 플라톤 당시에도 아카데미는 신을 찬양하기 위한 축제와 향연을 열고 관리하는 인물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받아들이면, 아카데미는 시민들이 운동을 즐기는 공공장소인 동시에 축제를 관장하는 모임, 즉 ‘티아수스(thiasus)’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이때 플라톤은 그러한 티아수스의 책임자라고 할 수 있다. 아카데미의 소장직을 뽑는 절차가 젊은 회원들의 투표 방식으로 바뀐 시점도 플라톤 당시가 아니었다. 그러한 투표 방식은 플라톤으로부터 아카데미 소장직을 승계받은 스페우시푸스(Speussipus)의 작품이었다.

 

플라톤은 시민의 교양과 여가 활동을 담당한 아카데미의 소장이었다. 그리고 아카데미의 목적은 그리스의 전통적 가치를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이를 받아들이면, 아카데미는 오늘날 시민센터와 유사한 기능을 가진 기관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한 아카데미의 교육적 목적이 플라톤 자신이 추구했던 세계관의 전파와 같은 것일 수는 없다. 아카데미의 교육 체계는 ‘지혜’와 ‘건강함’ 양자를 지향하는 전인 교육 체계였을 것이다. 플라톤은 아카데미 소장직에 대한 대가로 상당한 임금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플라톤이 아카데미 소장직을 맞게 된 것은 그에게 크나큰 행운이었다. 아카데미는 플라톤에게 안정된 삶의 환경을 제공해 주었고, 플라톤은 이를 바탕으로 많은 글을 남겼다고 추측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그의 글 상당수는 아카데미 소장직을 역임했을 때 완성되었다.

 

아카데미는 플라톤 이전부터 존재했었고, 플라톤은 단지 아카데미 소장을 역임한 여러 인물 중 한 명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특정 역사적 증거에 근거한 추측이다. 하지만 고대 문화에 대한 전문적 연구과 고고학적 발굴 결과를 진지하게 고려하는 경우, 플라톤이 아카데미를 세워 그의 사상을 전파했다는 주장을 무조건 받아들일 수는 없다.

 

 

 

 

(*) Glucker, J.(1978), Antiochus and the Late Academy, Goe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역사 속에 남은 아카데미의 흔적>                 

 

 

 

 

덧글:

 

현재 이 땅에는 많은 아카데미가 있다. 인문학의 발전을 위해 설립된 ‘플라톤 아카데미 재단’이라는 곳도 있다. 불행히도 이 땅의 그런 재단은 ‘돈만 잡아먹는 재단’이라 불려야 마땅하다. 신문, 방송, 대학 등과 엮인 각종 아카데미의 소장이 이런 글을 대한다면 마치 자신이 플라톤인 듯 착각할지도 모른다. 그런 착각에 빠진 자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참 가지가지 하는구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