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만에 <세속화> 원고를 이어 쓰다가 자료가 필요해 외장 하드 하나 뒤졌더니 2006년에 썼던 글들이 발견되었다. 그 중 하나가 올린 글이다. 다시 보니, 당시 글쓰기 능력이 정말 한심할 정도로 개판이다. 요새는 수입을 대폭 줄인지라 주 중에는 그나마 시간이 조금 나서, 약간 가독력 있게 글을 고쳐 올린다. 물론 완성된 형태로 그 내용을 수정하고 고친 것은 아니다. 고치면서 생각했다. 왜 이런 글을 썼지? 폴더 이름이 <과학과 사람>이고, 거기에는 당시 다루어야 겠다고 마음먹은 과학자들과 관련된 논문들이 들어 있었다. 그 중 한 명으로 버날을 다룬 당시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분명히 좌파 과학자 옹호론은 아니었다. 글을 고치면서 생각이 났다. 버날과 관련된 당시 주제들은 바로 '과학의 민주화와 급진주의'였다.
올린 글은 완성본이 아니다. 과학의 민주화와 급진주의와 같은 주제에 무관심해서가 아니라, 그런 주제에 시간을 할당할 처지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미완성 원고에 이어질 내용이 무엇인지 고민해 보고, 이를 바탕으로 소책자를 완성시켜보고 싶은 이가 있다면 다음 물음들에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
● 급진주의의 일반적 의미는?
● 과학의 민주화는 경제 민주화 등과 어떻게 다른가? (자기 학풍 하나도 건설하지 못한 개한민국 학계나 인터넷을 주축으로 한 속칭 재야 지성인? 집단는 이런 문제조차에 대해서도 구체적이고 그럴듯한 담론 하나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반성해라! 나야 學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반성할 필요가 없다.)
● 과학의 민주화를 필요해 급진주의가 필요한 이유는?
● 지금 이 땅에 필요한 급진주의자는 어떤 인물이어야 하는가?
과학과 사람
- J.D. 버날 -
과학과 사람, 이 주제만큼 데스몬드 버날(J.D. Bernal, 1901-71)을 평생 매료시킨 것은 없다. 그를 좌파 과학자 집단의 대부로 묘사할 때, 그를 단지 정치적 이념의 관점에서 평가해서는 안 된다. 만약 그러한 정치적 이념의 관점에서만 버날의 과학과 삶을 평가한다면, 버날은 어느 정도까지 좌파였는지 혹은 그의 정치 사회적 활동은 정말 좌파 이념에 충실했는지 등에 대한 관심이 평가의 기준이 되어버린다. 이때 사회라는 유기체 속에 기능했던 개인에 대한 진정한 역사적 평가는 가로막힌다. 그리고 현재 우리가 그의 삶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란 남지 않게 된다. 물론 과거 어느 개인에 대한 진정한 역사적 평가라는 것을 규정하는 것은 항상 애매모호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시행착오를 피할 수 없는 개인의 삶은 결코 단절된 개개의 사건에 의해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버날의 개별적 행위들을 가지고 그 행위가 정말 좌파 이념에 부합한 것인지만 따져서는 안 된다. 개인의 전체 삶 속에서 개인이 평가되어야 하고, 또 이러한 평가는 사회라는 유기체와 단절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이를 명심하고 과학자 버날의 삶을 살펴볼 때, 우리는 버날을 좌파 과학자로 규정하려는 시도에 대한 서양 학자들의 논쟁을 벗어나 정말 지금 우리에게 의미 있는 물음들을 만나게 된다. 이 땅 역사의 직접적 연장선에 서있지 않는 버날의 삶을 통해 그러한 물음들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1. 방황에서 결단으로
버날이 마르크스주의(Marxism)에 심취하게 된 동기는 켐브리지 대학 임마누엘 칼리지(Emmanuel College) 시절 왕성한 토론 모임 참가 활동에 기인한다. 임마누엘 칼리지 시절 전까지 버날의 정치적 신념은 아일랜드 민족주의였다. 버날이 아일랜드 민족주의자에서 마르크스주의자로 개종한 과정을 살펴보자.
버날의 가계는 원래는 스페인 유태인계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암스테르담과 런던을 거쳐 아일랜드 리메릭(Limerick)에 정착했고 12명의 자매를 낳았다. 그 중 버날의 아버지인 사무엘만이 살아남았다. 사무엘의 애칭은 샘이었다. 유태인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자 샘은 오스트리아로 건너가 양을 키우는 농장에서 일했고, 아버지가 죽자 리메릭으로 돌아와 작은 농장을 경영했다. 35세의 샘은 여행광인 여동생과 함께 파리에 머무른 동안 당시 21세의 베씨(Elizabeth Bessie Miller)를 만났다. 미국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베씨는 고전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문학에 대한 관심사가 넓었으며 여러 언어에 능통했다. 파리 소르본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여행기를 연재하기도 했다. 샘과 베씨의 관계는 급진적으로 발달했고, 둘은 교재 한 달 만에 결혼했다.
샘과 베씨의 결혼 초기가 순탄만 한 것은 아니었다. 부부가 정착한 부룩웨잇슨은 베씨와 어울리기 힘든 시골 동네였다. 둘의 결혼 초기를 어렵게 만든 또 하나의 문제는 종교였다. 샘이 아일랜드의 구교 전통에 충실했다면, 베씨는 개신교를 믿었다. 그러나 둘은 미국, 유럽 대륙 그리고 아일랜드 사이를 왕래하면서 화목한 가정을 이끌어 갔다. 베씨 덕에 버날은 자연스럽게 여러 언어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베씨가 도시의 발랄한 문화 생활을 즐기는 여성이었다면, 아버지 샘은 농장주였다. 그들의 종교와 삶의 태도에서 나타나는 차이, 그리고 아일랜드, 잉글랜드 및 프랑스를 오가며 교육을 받은 버날은 어린 시절 어떤 세계관을 갖게 되었을까?
버날은 어려서부터 문화의 다양성을 경험했다. 그러나 구교와 신교의 종교적 갈등은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프랑스 파리에서 아일랜드의 고향으로 돌아오면, 동네의 큰 4개의 건물만 보인다고 버날은 회고하곤 했다. 커다란 법원, 감옥, 군대 및 경찰 시설이었다. 이 네 가지 건물들은 어린 버날에게 아일랜드에 대한 영국의 압박과 권력으로 비추어졌다. 그는 아일랜드의 구교와 신교의 갈등이 전적으로 잉글랜드의 정치적 모략에 기인한 것으로 판단했다. 그리고 잉글랜드 세력을 아일랜드에서 제거할 수 있다면, 집에서 겪는 종교적 문제, 즉 아버지의 구교와 어머니의 신교 사이의 갈등도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으로 기대했다.
버날이 과학에 관심을 갖게 된 여러 원인 중 하나는 폭발물 제조에 대한 관심이었다. 그 관심은 잉글랜드를 제거하려는 꿈에서 기인했다. 하지만 성장하면서 그 꿈은 점점 계란에 바위치기처럼 느껴졌다. 버날은 일부러 잉글랜드 군사 학교에 들어가 전략과 무기 제조법을 배워 나중에 잉글랜드의 제거에 이용할 꿈도 꾸곤 했다. 이러한 버날의 심리는 억압에 대한 반발심을 더욱 강화시켰다. 성장할수록 그는 일체의 모임에 동화하기 어렵게 되었다. 버날의 이러한 태도는 일제 강점기 시대에 선진 문명의 과학과 기술 지식을 일제를 통해 섭렵하면서도 일제의 억압에 찬동할 수 없었던 민감한 학생이 가진 태도에 비유될 수도 있다. 어쩌면 지루한 아일랜드의 시골 생활도 잉글랜드에 대한 버날의 증오심 키웠을지 모른다. 그가 겪은 미국과 유럽 대륙의 당양한 경험은 브리지 카드 게임과 농장 일로 바뿐 아일랜드의 시골 생활과 어울리지 않았다.
캠브리지 임마누엘 칼리지에 진학하면서 버날의 삶은 변하기 시작했다. 이와 관련해 두 가지가 주목할 만하다. 첫째는 그의 종교적 신념의 약화다. 둘째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간접적 체험이다. 당시 버날은 철학자 러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의 보급에 분주했던 에딩턴 등이 참석하는 여러 토론 모임 참가했다. 그곳에서 버날은 종교적 신앙에 호소한 논증과 과학적 설명에 근거한 논증을 구분하는 법을 체득했다. 그 어떤 토론 그룹도 무차별한 종교적 교리 및 신앙에 대한 호소를 허락하지 않았다. 사실 이 점은 서양의 신학에서도 무시되지 않은 전통이다. 일상적인 기복 신앙에 물든 고향의 분위기에 익숙한 버날에게는 대학의 토론 모임은 신선하게 다가왔다. 버날의 신 대한 애착은 점점 약해졌고, 급기야 교회와도 선을 긋게 된다.
버날은 일찌감치 과학자의 길을 가기로 했다. 구교와 신교가 마찰하는 성장 과정을 거쳐 임마누엘 칼리지 경험을 통해, 그는 과학의 경험적 세계와 종교의 상징적 세계를 화해하는 법을 터득했다. 버날의 종교와의 결별은 결코 종교적인 것을 멸시하고 과학적인 것을 가장 합리적이거나 우월한 것으로 여기는 심리에 기인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버날은 정치와 교육에 개입하는 ‘세력화된 교회’의 입장은 용인할 수 없었다. 버날은 과학을 과학 자체로만 보지 않았다. 그는 과학을 사회 속에 기능하는 다른 분야와의 관계 속에서 파악했다. 정치와 교육에 개입하려는 교회의 입장은 버날에게 여러 분야의 거래 관계로 구성되는 사회의 기능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비추어졌다. 교회의 입장이 그러한 관계의 중심축으로서의 사회 통합의 원리가 된다면, 과학 등 다른 분야가 직접적으로 사회에 기여할 통로는 사라진다. 이는 바날과 같은 과학자에게는 ‘과학의 종말’을 뜻하는 것이다.
버날이 과학과 정치의 관계에 대해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만든 사건은 소련의 공산 혁명이었다. 당시 공산 혁명이라는 사회 실험은 영국 대학생들의 큰 관심거리였다. 버날도 예외가 아니었다. 마르크스에 대한 버날의 관심은 친구인 헨리 디킨슨(H. Dickinson)과의 밤샘 토론을 통해 증폭했다. 때는 소련의 공산 혁명 2주년을 기리는 1919년 11월 7일이었다. 디킨스와의 밤샘 토론에 대한 버날의 회고를 들어보자.
“이 사회주의(마르크스주의)는 정말 놀라운 것이었다. 왜 아무도 나에게 그것을 말해 주지 않았을까? 그것을 알고 있던 딕은 몇 시간 동안 나에게 명쾌히 설명해주었다. 러시아의 위대한 혁명인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이 우리가 지금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은 너무나 명백했고, 도전적이며 그리고 보편적인 것이었다. 나의 아일랜드 민족주의가 얼마나 편협한 것이었던가? 나의 잉글랜드를 파괴시키겠다는 (어린 시절) 군사 계획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이었던가? 소련 민중에게 모든 힘을! 내가 증오한 모든 것들을 쓸어버릴 수 있는 것은 ‘사람들 자신들’이었다. ‘잉글랜드의 공립 학생 부류의 신사(the English public schoolboy gentleman)’들의 교만함을 깨부수자. ‘과학적 세계 국가’가 탄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하는가? 명백히 아무 데도 없었다. 사람은 그를 요구하는 곳에서만 역량 것 새로운 물결에 기여할 수 있다. 나는 공허한 내 인생 전체를 보았다. 나의 우주는 여러 조각으로 산산조각이 났었다.”
마르크스주의를 접하면서 잉글랜드에 대한 버날의 적대감이 갑자기 약화된 것일까? 또 아일랜드 민족주의가 그의 마음속에서 갑자기 사라진 것일까? 이러한 질문에 대해 고민해 보는 것은 서양 역사의 연장선에 서있지 않은 우리에게 별 다른 교훈을 주지 못한다. 개인적 경험 자체가 버날에 대한 평가의 척도라면, 우리는 이 순간부터 개인의 심리적 분석이라는 영역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한 분석은 버날을 연구하는 사람에게나 필요한 것이다. 과학과 사회에 대한 어떤 교훈을 얻고자 한다면, 버날의 젊은 시절 회고에서 발견할 수 있는 문제점들에 우선 주목해야 한다.
버날 자신에게 그의 ‘과학적 세계 국가’의 이상이 무엇인지 묻는다고 해도, 확실한 대답을 얻기는 힘들 것이다. 그것은 사회 속의 과학, 세계 속의 과학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 성숙한 사고를 거쳐 나온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회고에서 언급된 ‘과학적 세계 국가’를 일단 그저 ‘과학을 중심으로 한 평등한 세계’ 정도로 이해하자. 이러한 경우에도 그것은 일련의 문제들을 발생시킨다. 첫째, 그러한 과학적 세계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버날이 부정하지 않는 세계의 문화적 다양성과 어떻게 양립 가능한가? 둘째, 모든 좌파 과학자들이 과학적 세계 국가 건설에 찬성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러한 국가 건설에 찬성하는 좌파 과학자들과 반대하는 좌파 과학자들의 갈등은 궁극적으로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과학자들이 처한 역사적이고 상황적인 맥락인가 아니면 다층적으로 해석 가능한 마르크스주의의 양면성인가? 버날이 의도한 과학적 세계 국가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인가? 이러한 문제들은 버날 개인뿐만 아니라 좌파 과학의 역사적 평가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또한 이러한 문제들을 다루는 과정에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물음들을 이끌어낼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일단 뒤로 미루자. 먼저 ‘과학과 사람’이라는 주제에 버날이 인생을 걸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자.
버날의 관심은 과학과 종교 그리고 과학과 정치의 관계로 이동했다. 여기에 덧붙여지는 또 한 가지는 섹스에 대한 관심이다. 섹스에 대한 관심을 성 행위라는 실전 속에서 충족하는 실천형의 부류가 있다면, 멀리서 관망하는 이론형의 부류도 있다. 또 실전 속에서 이론을 추구하는 부류도 있다. 버날은 이 마지막 부류에 속한다. 그의 섹스에 대한 관심은 그를 프로이트에 심취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프로이드에 관한 토론 모임의 핵심 회원이 되었고 이 모임 활동을 통해 아일린(Eileen Sprague)을 만났다.
지금의 우리 대학의 풍토는 토론 모임이라는 것이 거의 사라졌다. 기껏해야 전공에 목매인 대학원생들의 모임을 제외한다면, 학부 학생들의 다양한 토론 모임은 사라진지 오래다. 토론 모임에서 자연스러운 ‘짝짓기 문화(mating culture)’도 고갈된 상태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현재 이 땅의 대학에는 다양한 학풍이 정상적으로 건설될 기반이 없다. 이는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그랬다. 대학은 쓰레기장이다. 학생들 잘못은 결코 아니다. 교수 중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학생들과 함께 토론 모임을 만들고, 또 일반 회원으로 그런 모임에 참석하는가? 나서댈 줄 모르는 내성적인 인물로 대표되는 물리학자 디랙(P. Dirac)이 노벨상을 타게 된 기반은 토론 모임에 근거한다. 그런 기반도 없이 맹목적인 애국심과 결합한 것이 이 땅의 ‘노벨상 꿈’이다. 어떤 종류의 토론 모임이든, 토론 모임에는 위와 아래의 엄격한 구분이 없어야 한다. 그 모임은 하나의 자체적인 작은 사회가 되어야 하며 역사적으로 자체적인 전통을 축적해 나가야 한다. 디랙, 버날 뿐만 아니라 그러한 토론 모임이 얼마만한 위력을 지니고 있는지는 역사 속에서 이미 증명된 것이다.
어쨌든 아일린은 당시 캠브리지 대학의 비서였다. 버날은 그녀에게 사랑에 빠진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의 나이 21세였다. 어머니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버날은 그녀와 결혼했다. 버날의 대학 성적은 그리 좋지 않았다. 아일린은 그런 그를 위해 논문을 타이핑해 주었다. 그의 논문은 X선 크리스탈로그래피(Crystallography)의 창시자인 노벨상 수상자 브래그(W. Bragg) 경에게 보내졌다. 브래그 경은 버날이 왕립 연구소에서 일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이제 버날에게 방황의 시기는 끝났다. 이 세상 속의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찾는 방황의 시기를 끝내고 자신의 결단을 실행할 시기가 온 것이다. 그의 결단은 ‘사람의 세상 속에 과학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우리 모두는 어떻게 살지를 생각하고 시도함으로써 실험적으로 좋은 삶을 찾아 볼 수 있다. 실제로는 아주 소수만 그렇다. 대부분은 집에서 그리고 학교에서 전형화되고, 그들 중 나머지는 해놓은 것을 모방한다. 단지 지극히 일부만 이곳, 저곳에서 일탈한다. 그들은 괴짜들이다. 그리고 의심할 여지없이 나 자신 또한 그들 중 한명으로 손꼽히게 되리라.”
2. 좌파, 민족주의 그리고 과학자
버날이 생각하는 ‘과학적 세계국가’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일까? 과학적 세계국가의 이상이 그가 인정한 세계관의 다양성과 양립 가능한가? 좌파들의 다양한 행동 방식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분석은 우리에게 일단은 좌파 과학의 역사가 없었다는 사실의 의미를 밝혀줄 것이다. 하지만 그 의미는 반드시 좌파 대 우파 이념을 넘어서 확대되어야 한다. 이렇게 확대된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앞서 언급된 문제들을 심층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선결되어야 할 문제가 있다. 좌파 과학자는 민족주의와 결탁할 수 없는 것일까? 이 질문은 과학자가 처한 시대적 상황과 무관하게 다루어질 수 없다. 버날을 접근할 때 좌파 과학자는 제국의 지배를 받는 약소국의 입장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인생의 목적을 세운 ‘결단의 해’인 1919년 시기 버날의 좌파 경험은 간접적이었다. 1920년까지 그가 직접 마르크스와 레닌을 읽었다는 증거는 아무 데에도 없다. 마르크스주의가 소련에서 볼쉐비키 혁명으로 이어지는 동안, 영국의 지식인 사회에서는 노동의 가치에 대한 좌파적 해석과 사회다윈주의(social darwinism)를 둘러싼 논쟁이 한창이었다. 버날은 이러한 논쟁과 연관된 책들을 먼저 접했고, 1920년 이후 트로츠키(Trotsky) 등 실제 소련 공산주의 서적 및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게 된다. 버날이 대학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정치적 활동에 참여한 것은 1921년으로 알려져 있다. 부인 아일린과 함께 노동당 활동에 참가한 것은 1922년이고, 1923년에 영국 공산당에 가입했다. 버날은 일련의 정치적 활동을 통해 이념의 지향하기 위한 실천은 다양하다는 인식을 얻었다.
버날이 노동당 활동에 참가한 당시 아일랜드에서는 사회 개혁 운동이 없었는가? 당연히 있었다. 좌파 이념을 접하기 전 버날의 정치적 입장은 ‘아일랜드 공화국 군대(IRA)’와 관련된 민족주의였다. 아일랜드 민족주의가 테러 수단을 허용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행동 준칙으로만 점철된 것은 아니었다. 여성을 포함한 교육의 기회 균등, 양성 평등 및 경제 개혁을 통해 아일랜드의 독립을 쟁취하려는 ‘신페인 당(Sinn Feiner)’이 주축이 된 운동도 강했다. IRA와 신페인 당 운동 둘 다 민족주의를 지향했다. 전자가 국수적 성향의 민족주의 형태라면, 후자는 아니다. 민족주의가 좌파 이념과 양립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면, 아일랜드로 돌아가 좌파 이념을 실천하는 가운데 선진 과학과 기술을 전파한 버날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상상이 터무니없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이 점은 1920년 대 일본에 의해 점령된 조선을 아일랜드와 비교할 때 분명해 진다.
버날은 1921년 그에게 동북아 정세를 알려준 버트(A. Butt)에게 아일랜드와 당시 조선이 아주 유사한 상황에 처했음을 언급했다. 우리 또한 역사적 측면에서 그리고 정서적 측면에서 이 땅과 아일랜드를 종종 비교한다. 단순한 논리는 이렇다. 둘 다 외세 침략에 시달린 민족이라는 점, 술을 마시면 ‘더치페이’가 아니라 서로 술값을 내려고 하는 점, 노래를 좋아하는 민족이라는 점, 도박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 등이 있다. 물론 이러한 특징들은 과장된 측면이 있지만 그렇다고 무시 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 무엇보다도 외세의 개입 속에 벌어지는 민족 내 갈등 양상의 역사는 우리나라와 아일랜드를 관통한다. 버날의 눈에는 IRA와 신페인 당의 갈등은 주변 강대국 세력 속에서 독립을 위해 여러 이념들이 민족주의와 양립했던 조선의 상황과 유사하게 비추어 졌던 것이다.
하나의 시나리오를 써보자. KB(Korean Bernal)는 1921년 일본 동경 대학의 조선인 유학생이다. 그는 그곳에서 좌파 이념을 처음 알았다. KB는 마르크스의 공산주의가 인류 공동체의 정치적 이상형임에 동의했다. KB는 일본 좌파들이 권력에서 노동자들을 해방시키려는 것에 감동했다. 인류가 보편적으로 지향해야 할 것이 정말 공산주의라면, 공산주의는 이론적으로는 국수적 민족주의, 곧 자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민족주의와는 양립 불가능하다. 만약 공산주의와 국수적 민족주의가 양립 가능하다고 가정한다면, 이것은 공산주의의 보편성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국주의의 세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민족 자결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실제 수단으로서의 국수적 민족주의는 허용된다. 우선 독립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KB는 귀국하여 자신이 배운 것, 특히 과학을 가지고 민족의 독립과 부흥에 헌신하기로 결정했다.
버날은 KB와 같이 시대적 상황에 따라 마르크스주의가 민족주의의 여러 형태와 결합할 수 있다고 여겼다. 버날은 과학과 기술의 유기적 관계에 의해 양자가 발전한다고 여겼다. 그는 그러한 유기적 관계가 경제적 기반이 됨으로써 질적 그리고 양적인 측면에서 생활 세계를 개선시킬 수 있다고 여겼다. 따라서 조선에 비해 아일랜드에는 이미 과학과 기술이 어느 정도 정착했다고 하더라도, 귀국해 자신이 배운 과학을 가지고 민족의 독립과 부흥에 헌신하기로 결정한 버날은 상상 가능하다. 뉴턴과 다윈을 가진 스코틀랜드와 달리, 아일랜드는 역사적으로 유명 과학자를 배출하지 못했다. 아일랜드의 과학 전통은 기술과 분리된 적이 없었다. 거기에는 현실 세계에서 추상화된 수학적 모델의 위력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또 실험은 발견의 매개물이 아니라 단지 이미 발견된 것을 반복하는 과정으로만 기능했다. 지배 세력인 잉글랜드의 산업 기반으로서 아일랜드의 과학과 기술이 있었을 뿐이다. 아일랜드 과학 전통은 현실 문제를 푸는 데 과학을 단지 도구로 사용하는 ‘아마추어 과학자들’의 지위가 강했다. 대범한 과학적 발견을 자극할 수 있는 분위기는 아일랜드 과학계에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과학과 결합한 기술이 장기적 측면에서 좀 더 부유한 나라를 만들 수 있다면, 잉글랜드에서 배운 과학을 가지고 민족의 독립과 부흥해 헌신하기로 결정한 버날을 상상해 보는 것은 터무니없지 않다. 하지만 그러한 버날은 ‘현실 세계의 버날’이 아니라 ‘가상 세계의 버날’일 뿐이다.
일제 강점기 때 국외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이들이 귀국하자마자 정치권으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던 조선의 상황은 아일랜드에 유비되기 힘든 측면을 갖고 있다. 상대적으로 오랜 동안 영국 제국주의 지배 구도 속에서 아일랜드는 최소한 부분적으로 잉글랜드와 동화된 측면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측면은 버날이 아일랜드의 대학에서 조국을 위해 헌신할 기회를 약화시킬 수 없다. 그는 그러한 기회를 잡을 수도 있었지만 잡지 않았다. 헤르만 헤세가 독일 나치즘을 비판했을 때, 그는 미국에 있었다. 그래서 독일인 일부는 헤세를 비겁자 혹은 겁쟁이로 평한다. 이 논리를 버날에게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까? 이러한 자극적인 물음에 대해 긍정적으로 혹은 부정적으로 답할 이유는 없다. 단지 KB와 버날의 직접적인 유비는 힘들다는 사실만 따져 보면 된다.
첫째, KB는 가계 혈통상 혹은 족보상 명백한 조선인이다. 버날이 얼마나 아일랜드적인지는 평가하기가 매우 애매모호하다. 엄격히 말해 할아버지 때부터 버날의 가계는 아일랜드에 속한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유태인이다. 어머니는 미국인이다. 버날이 좌파 이념에 심취하기 전 국수적 형태의 민족주의에 심취했던 것도 ‘아일랜드 민족과의 강한 소속감’에서 기인한 것은 아니다. 이 점은 민비 시해에 가담했던 친일파 우범석의 아들 우장춘 박사의 경우와 버날을 대칭적으로 비교할 때 잘 드러난다. 일본인 어머니 밑에서 자란 우장춘이 강한 반일 감정을 가졌다는 결정적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우장춘에게 조선은 그냥 아버지의 나라였다. 어린 시절부터 여러 국가를 돌아다닐 기회를 맞본 버날의 성장 배경을 고려할 때, 그가 강한 애국심을 가져 아일랜드 민족주의에 심취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오히려 억눌리는 것에 대한 본능적인 반항심, 그리고 가족과 친지 반경을 넘어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힘들었던 아일랜드 시골 생활이 잉글랜드에 대한 버날의 증오심을 키웠을 것이다. 버날이 아일랜드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한 시기는 실제 마르크스주의와 결합 가능한 건전한 민족주의의가 가능한가라는 물음을 놓고 고민했던 1921년 대였다.
둘째, 종교적 측면에서 당시 아일랜드와 조선에는 큰 차이가 있다. 구교가 아일랜드를 지배했다면, 당시 조선에는 절대 다수 민중을 지배한 종교적 이념은 없었다. 유교 이념이 조선을 지배했다고 하지만, 그리고 그 이념이 민중의 삶 속에 깊게 자리 잡았다고 하지만, 유교가 정치적 권력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정치적 권력의 측면에서 유교의 기능은 이미 조선 후기부터 약화되기 시작했으며, 일제 강점기 동안 정치적 권력은 일본과 친일 세력이었다. 잉글랜드가 아일랜드를 지배한 기간은 일본이 조선을 지배한 기간보다 훨씬 길다. 그 지배 과정에서 나름대로 정치적 탄력성에 근거한 협상력이 양자 간에 발휘되었다. 특히 종교는 잉글랜드에 대한 아일랜드의 반항심의 축으로 기능하면서도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간 중재 역할을 했다. 성직자가 직접적으로 정치에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성직자의 정치적 역할은 컸다. 버날은 교회가 정치권과 결합해 세력화를 꾀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이 점은 종교를 구심점으로 한 통합을 종교의 사회적 지배 구도로 간주하고 싫어한 버날의 본능적 심리를 반영한다.
셋째, 선진 문물을 배운 사람 수의 측면에서 당시 아일랜드와 조선의 직접적인 비교는 불가능하다. 달랑 박사 학위를 받은 것이 화제가 되는 상황적 특수성은 조선과 달리 당시 아일랜드에서는 통할 수 없었다. 과학과 기술을 결합시켜 경제적 활성화를 도모함으로써 민족적 주체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동기가 버날에게 있었다고 해도, 그 동기가 캠브리지 왕립 연구소에서 얻은 기회를 포기하도록 할 만큼 자극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넷째, 버날에게 그의 좌파 이념을 실현하는 데 잉글랜드가 아일랜드보다 더 매력적이었다. 상대적으로 강한 종교적 문화 때문에 아일랜드는 쉽게 마르크스주의와 동화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잉글랜드는 좌파 이념을 수용한 노동당을 주축으로 노동자 해방 운동이 강했고 공산당도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은 좌파 이념을 인류가 지향해야 할 보편적 정치 이념으로 생각한 버날에게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다섯째, 당시 기능적 측면에서 과학과 종교의 엄격한 영역 구분이 아일랜드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족주의를 둘러싼 버날의 갈등은 심화될 수밖에 없었다. 윤리적 문제는 종교가 담당하니, 과학과 기술은 그러한 문제를 다루는 영역에는 근접하지 말라! 버날은 과학이 외부에서 부가된 목적 달성의 수단으로 전락하는 상태에 증오감을 갖고 있었다. 그는 19세기 과학과 기술 발전이 근본적으로 목적 달성의 수단으로 봉사했다고 여겼다. 목적 달성 수단으로 과학을 여기는 관점은 20세기에도 이어졌다. 그러한 관점은 강대국보다는 약소국에 더욱 강하게 전파될 가능성이 크다. 앞선 과학과 기술을 보유한 제국과 제국의 지배를 받는 약소국 중, 어느 곳에서 과학과 기술이 정치권의 목적 달성 수단으로 전락하기 쉬울까? 약소국에서 과학과 기술이 정치권의 목적 달성 수단으로 더욱 강하게 여겨지는 경향은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버날은 강대국과 약소국 사이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차이를 사소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러한 차이는 비교의 우위에서 오는 상대적 차이일 뿐이라는 것이 버날의 입장이다. 과학과 기술이라는 벌들의 꿀이 사회에 고루 고루 분배되기를 버날은 강하게 희망했다. 그의 희망은 국지적인 것이 아니라 범세계적인 것이었다. 이때 그는 분명히 다음과 같은 종류의 딜레마에 시달렸을 것이다.
약소국일수록 주권 확보를 위해 경제적 활성화와 발전을 기대한다. 이러한 기대 속에서 사람들은 ‘경제’라는 문구 아래 과학과 기술을 사회 진보의 단순한 수단으로 여기기 쉽다. 약소국이 강해지면, 자본의 논리 속에 국가 간 경쟁은 심해질 것이며, 지배 세력과 피지배층 그리고 강대국과 약소국의 갈등 구도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아일랜드와 한국이 강대국이 되어도, 또 다른 제 2의 아일랜드와 한국이 나올 수밖에 없다.
버날은 소련의 혁명이 소련 내에서는 성공작일지 모르지만 세계 평화의 구현에는 부족하다고 보았다. 그는 어떤 정치적 이념이 일 방향이 아니라 다원적으로 구현 가능함을 알았고, 평화는 지역적인 계층 간의 대립 극복의 논리에 더해 사회 속의 종교, 정치 및 과학의 상호 작용을 통해 정착 가능하다고 여겼다. 이러한 그의 생각을 실현하는 데 당시 아일랜드의 상황은 분명히 우호적이지 않았다. 훗날 1953년 한국 전쟁이 끝나갈 무렵, 버날은 아일랜드 더블린의 트리니티 칼리지 학생회로부터 강연회 초청을 받았다. 대학 측은 그의 강연회를 취소시켰다. 무신론자이면서 공산주의자이고 동시에 아일랜드인일 수는 없다는 것이 그 취소의 이유였다. 물론 그 취소의 진짜 이유는 잉글랜드를 시끄럽게 하는 골칫거리 버날을 둘러싼 아일랜드와 잉글랜드 사이의 묘한 정치적 관계였다. 마치 우리 정부가 달라이 라마의 방문을 거부할 명백한 이유를 가지지 않은 채 중국과의 관계 때문에 그렇게 하는 상황과 유사하다.
버날은 결국 아일랜드와 함께 민족주의를 버렸다. 지역의 상황적 특수성을 고려할 때, 공산주의와 민족주의가 양립 불가능해서가 아니다. 그로 하여금 조국에 봉사하도록 만들기 힘든 여러 요인들이 있었다. 그는 세계 평화를 ‘좌파 정신과 결합한 과학’에 정초시키려고 했다. 그는 프롤레타리아 혁명 정신보다는 지식인 및 과학자 집단의 통찰과 비판 정신이 사회 개혁에 더욱 중요하다고 여겼다. 강대국의 변화 없이는 궁극적인 세계 평화는 불가능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버날은 환상에 가득 찬 엘리트 의식을 가진 좌파였는가? 버날은 조국을 배신한 기회주의자였는가? 적어도 이 시점에서 둘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확실하다. 버날을 조국을 배신한 기회주의자로 볼 수는 없다. 버날이 조국에 해를 끼친 일제의 앞잡이와 같은 인물은 아니었을 뿐더러, 내가 버날이라도 당시 상황에서 아일랜드로 귀환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다섯 가지 요인들에 의해 드러난 당시 상황적 특수성을 고려할 때, 조국을 위한 귀환은 그 대가로 버날의 신념을 포기할 것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이념의 내용과 상관없이, 확고부동한 신념은 상황에 따라 개인을 ‘가까운 것’에서 떼어놓아 개인을 목적지를 향해 이동시키는 마력을 갖는다. 신념에 가득 찬 사람은 주변을 서성거리지 않는다. 그를 잡지 못한 주변은 그를 원망하지만, 결국 어느 시점에 다다랐을 때 주변은 그를 재평가 한다. 그가 자기만을 위해 자기 주변에 냉혹했던 것이 아니라, 신념이 그를 놓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3. ??????
이어질 내용은 스스로 찾아보고 그럴듯하게 구성해 보는 사람이 있기를 바란다. 나에게는 여기서 더 나아갈 동기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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