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K 비판적 사고/GCTC 청소년 교육

<허생전>을 읽고 (성정아 중 2)

착한왕 이상하 2013. 6. 7. 02:56

* 정아는 다른 지역 또래보다 먼저 훈련을 시작한 중학교 2학년 학생이다.

 

 

 

연암 박지원의 <허생전>을 읽고

중 2 성정아

 

 

1. 책을 읽게 된 동기와 목적

 

학교 도서관이나 지역 도서관에 가서 필독도서 목록을 살펴보면, 박지원의 <허생전>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허생전>은 조선 시대 때 써진 고전 소설로 청소년들이 꼭 한 번쯤은 읽어봐야 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나는 <허생전>을 읽기 전에 먼저 <양반전>을 읽었다. <양반전> 역시 박지원이 쓴 것으로, 당시 지도층인 양반 계층의 문제점을 지적한 책이라는 점에서 <허생전>과 비슷하다. <양반전>은 당시 양반들의 무능력함과 겉치레, 위선적인 생활 모습을 풍자한다. 나는 <양반전>을 읽으면서 ‘그렇다면 당시 양반들의 바람직한 역할은 어떤 것이며, 양반이 해야 할 역할은 무엇일까?’라는 의문을 품게 되었고, <허생전>을 통해 나름의 답을 찾을 수 있었다.

 

<허생전>에서 허생은 이완에게 난세를 극복하기 위한 세 가지 제안을 제시한다. 첫째는 뛰어난 인재를 등용하는 것, 둘째는 옛 명나라의 후손들을 지원하는 것, 셋째는 유학을 장려하고 무역에 힘쓰는 것이었다. 이 세 가지 제안을 통해서 나는 사회 지도층이라면 마땅히 개인의 이익보다는 나라의 이익을 위한 방법을 고민하고, 그것을 실천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그리고 그렇지 않으면 국력이 약해지고 나라가 혼란스러워진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또 ‘소위 사대부란 게 도대체 어떤 놈들이냐? 이·맥의 땅에 태어나서 제멋대로 사대부라고 뽐내니, 어찌 앙큼하지 않은가?’라는 허생의 대사를 통해 강대국의 기준으로 현실을 평가하려고 하는 사대주의가 그 당시부터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2. 저자 연암 박지원에 대하여

 

박지원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 겸 소설가이다. 그의 호는 ‘연암’으로 그가 정착했던 황해도 근처의 골짜기의 이름인 연암골에서 유래되었다. 그는 1737년 한양 서쪽의 야동이라는 고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반남 박 씨라는 명문 집안이었다. 그러나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당쟁에 휘말리기 싫어 벼슬을 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가세가 기울었다. 열여섯 살에 결혼을 하고 뒤늦게 장인에게 <맹자>등과 같은 고전을 배웠다. 처숙부의 영향으로 역사와 문장 쓰는 법을 터득하고 논설습작에 치중했고, 평생의 문우가 되는 이재성을 만나 학문에 열중했다. 그는 빼어난 글재주를 가졌지만, 1760년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생계의 어려움을 겪어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는 처음으로 과거에 응시하고 낙방한 후, 과거를 포기하고 오로지 학문과 글쓰기에만 치중했다. 서른이 넘어서 백탑 근처로 이사를 가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등 당대 학자들과 이웃하여 교류했다. 1780년 그의 팔촌형인 박명원이 청의 진하사절단 정사로 북경에 가는 길에 동참하여 북경과 열하를 여행하고 돌아와 <열하일기>를 지었다. 오십 세에 관청의 하급 관리가 되었다. 나이 육십이 넘어 충청도 연천군의 군수가 되었고,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과농소초>를 지었다. 그 후 여러 벼슬을 하다가 정조가 죽으면서 양양부사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1805년에 육십구 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는 <열하일기>, <양반전>, <허생전>, <우상전>, <호질> 등이 있으며 문집으로는 <연암집>이 있다.

 

 

3. 책 구성 방식 및 내용 소개

 

<허생전>은 변화하는 세태에 적응하지 못하고 그저 체면치레와 체통 지키기에 급급한 당시 양반들을 풍자한다. 이와 비슷한 소설로 <양반전>이 있는데, 둘은 당시 양반들을 풍자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생전>과 <양반전>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양반전>은 당시 양반을 풍자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허생전>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사대부들이 난세를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실천해야 하는 지까지 말해주고 있다.

 

당시 혼란에 쌓여 있던 조선 사회를 좋은 쪽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허생은 이완에게 세 가지 제안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연암은 뛰어난 인재인 허생의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에 인재가 있어도 등용되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을 빗댄 것이다. 뛰어난 인재는 마땅히 등용되는 세상이 곧 좋은 세상이며, 그렇지 못한 세상은 난세이니 결국 망국의 길로 치닫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허생이 말하는 난세란 무엇이고, 난세를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이러한 의문점들을 <허생전>의 내용을 통해 알아보자.

 

허생은 매우 가난한 선비였다. 그는 글 읽기를 좋아해 하루 종일 글만 읽었기 때문에, 그의 아내가 남의 바느질품을 팔아서 겨우 입에 풀칠하며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하루 종일 책만 읽는 허생에게 밤낮으로 글만 읽는다고 구박하였다. 아내의 투정으로 허생은 “아아, 안타깝구나. 내가 처음 글을 읽기 시작할 때에 십 년을 채우려고 했는데 이제 겨우 칠 년 읽었구나.”하며 할 수 없이 책을 덮고 집을 나오게 되었다.

 

허생은 저잣거리로 나가 한양 안에서 가장 부자인 변 씨를 찾아갔다. 그리고 긴 말 없이 자신이 시험해 볼 것이 있으니 만 냥만 빌려달라고 부탁하였다. 변 씨는 허생의 영특함과 비범함을 눈치 채고 역시 여러 말 묻는 것 없이 바로 만 냥을 내주었다. 만 냥을 빌린 허생은 안성에 머무르며 그곳의 모든 과일들을 전부 매전 매석하여 만 냥의 열배가 넘는 돈을 벌게 되었다. 허생은 겨우 만 냥으로 좌지우지되는 당시 조선의 경제 상황을 안타깝게 여기고 탄식하였다. 엄청난 돈을 번 허생은 칼, 호미, 베, 명주, 솜을 사가지고 제주도에 갔다. 허생은 사람을 풀어 제주도의 모든 말총을 사들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엄청나게 오른 말총 값으로 허생은 백만 냥이 넘게 돈을 벌었다.

 

그야말로 떼돈을 번 허생은 늙은 뱃사공의 도움으로 외딴 곳에 있는 빈 섬에 가게 된다. 그곳은 기름지고 물이 풍부해 사람이 잘 살 수 있는 섬이었다. 허생은 기뻐하며 변산에서 떼를 지어 도둑질을 하던 도둑들을 설득해 섬으로 불러 모은 후 그 곳에서 살게 하였다. 그리고 그는 섬에서 나오기 전에 자신이 타고 나갈 배를 제외한 모든 배들을 불태웠다. 허생은 섬을 나오면서 섬나라의 화근을 뿌리 뽑기 위해 도둑들 중 글을 읽을 수 있는 자들을 데리고 나오고 은 오십만 냥을 바다에 던져버렸다.

 

섬을 나온 허생은 조선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나누어 주었다. 그러고도 십만 냥이 남자 변 씨를 찾아갔다. 허생은 변 씨에게 십만 냥을 내놓았고, 깜짝 놀란 변 씨는 일어나 절하였다. 그리고 변 씨가 십만 냥을 사양하고 십분의 일만 이자로 받겠다고 하자, 허생은 화를 내고 가버렸다.

 

가버린 허생의 뒤를 밟던 변 씨는 마침내 남산 밑 허생의 집에 닿게 되었다. 다음날 변씨가 십만 냥을 들고 그의 집에 찾아가 그에게 주었다. 허생은 그것을 사양하며 자신의 가족을 돌보아 달라고 했고, 변 씨는 그렇게 했다. 몇 해가 지나고 변 씨와의 우정도 진해지자 허생은 그간의 일을 알려주며 독점만으로도 떼돈을 벌 수 있고 인재가 있어도 등용되지 못하는 당시 조선 사회에 탄식하였다.

 

허생의 말에 감명받은 변 씨는 평소 친분이 있었던 이완 대장에게 허생에 대해 말해주었다. 그러자 이완이 깜짝 놀라며 변 씨와 단둘이 허생의 집에 찾아갔다. 이완이 허생에게 지금 조선이 난세고 나라에서 어진 인재를 찾고 있다고 뜻을 밝히자, 허생은 인재 등용을 제시했다. “내가 곧 와룡선생을 천거할 테니, 그대가 임금께 아뢰어서 그의 초가집까지 세 번 찾아가게 하실 수 있겠느냐?” 이완은 그것은 어렵다고 하며, 다음 방법을 알려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허생은 다음 방법을 제시하였다. 조선에 흘러들어온 옛 명나라 장병들에게 종실의 딸들을 시집보내고 세도가의 재산을 빼앗아 그들을 살게 해 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완은 그것도 어렵다고 하였다.

 

그러자 허생은 아주 쉬운 일이 하나 있으니 자네가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이완이 그것을 듣고 싶다고 하자, 허생이 마지막 방법을 말해주었다. ‘청나라가 가장 먼저 항복한 조선에 대해 가지고 있는 좋은 감정을 역이용하여 청나라와의 친분을 돈독히 한다. 그리고 조선 안의 여러 자제를 뽑아 머리를 깎고 되놈의 옷을 입혀 지식인은 빈공과에 응시하고, 서민들은 강남에 장사치로 스며들게 한다. 고관 자제들은 그들의 호걸들과 친분을 맺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완은 부끄러워하며 삼가 예법을 지키려는 사대부들이 어찌 머리를 깎고 되놈의 옷을 입으려 하겠느냐고 하였다. 그러자 허생은 “소위 ‘사대부’란 게 도대체 어떤 놈들이냐? 이·맥의 땅에 태어나서 제멋대로 ‘사대부’라고 뽐내니, 어찌 앙큼하지 않은가? 바지저고리를 온통 하얗게만 입으니 이는 참으로 상복이고, 머리털을 한데 묶어서 송곳처럼 짜 매니 이것도 남만의 방망이 상투에 불과하다. 어찌 ‘예법’이라고 뽐낼 게 있느냐?”하며 이완을 크게 꾸짖었다. 그러면서 번어기와 무령왕의 예를 들어 당시 양반들의 체면치레에 불과한 관습과 군자의 덕을 구분하지 못한 채 세태의 변화에 둔감한 조선 사대부들을 질타했다.

 

허생이 화를 내며 이완을 베어 버리려고 칼을 찾자, 이완은 화들짝 놀라 자신의 집으로 달아나버렸다. 다음날 이완이 다시 찾아갔지만 허생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4. 허생전을 통해 알 수 있는 사대주의 사상

 

박지원은 <허생전>을 통해 조선의 사대주의 사상을 비판하였다. 이 사대주의 사상을 정확히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허생전>을 통해 드러난 사대주의 사상을 자세히 살펴보아야 한다. 당시 조선의 사대주의 사상은 소중화 사상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데, 사대주의 사상을 자세히 알기 위해 먼저 조선 사대부들의 의식에 깊게 박혀 있던 소중화 사상에 대해 알아보자.

 

소중화 사상은 중국 이외의 나라에서 중화사상의 영향을 받아 발달한 자민족 중심주의 사상이다. 조선을 소중국으로 간주하는 세계 이해 방식인 것이다. 당시는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중국을 차지했을 때였다. 명나라의 문화를 흡수한 조선은 이제 조선이 제 2의 명나라, 즉 소중국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면서 명이 망한 이후에도 명나라를 따르고 청나라를 오랑캐라 여겼다. 이런 세계 이해 방식의 바탕에는 중국을 세계의 중심을 보고 중국의 것을 모든 평가의 기준으로 삼으려는 태도가 깔려있다. 소중화 사상은 사대주의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사상이다.

 

사대주의의 정의는 '주체성이 없이 세력이 강한 나라나 사람을 받들어 섬기는 태도‘이다. 그 정의를 의역하면, 어떤 문제나 현상을 자신의 나라 것이 아닌 강대국에 빗대어 평가하려하는 의식이다.

 

앞서 말했듯이, 박지원은 사대주의 사상을 비판하기 위해 <허생전>을 썼다. 그렇다면 사대주의 사상은 현대에 와서 완전히 사라졌을까? 그렇지 않다. 나는 사대주의가 대상만 바뀌었을 뿐 그대로 남아있다고 생각한다. 옛날에는 중국을 따르려는 사대주의가 팽배했다면 지금은 미국을 따르려는 사대주의가 팽배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주변에 여전히 남아있는 사대주의의 사례들은 아주 많다. 그 중에서 사례 두 가지를 소개해 보겠다.

 

다음은 2012년 10월 2일에 방송된 뉴스의 내용을 나 나름대로 요약해 본 것이다.

 

가수 싸이는 강남스타일로 미국 빌보드 차트 2위, 영국 차트 1위 등 해외에서 어마어마한 인기몰이 중이다. ‘말춤을 추지 않으면 대통령 출마도 못할 정도다‘라는 우스갯소리까지 생기고, 심지어 정부에서는 싸이를 독도 홍보대사로 위촉하는 방안까지 검토할 정도다. 싸이가 이토록 우리나라에서 대접받게 된 것은 사실 미국에서 뜨고 난 이후부터다. 그 전에 싸이는 그저 좀 웃기는 B급 가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해외에서 뜨자 허겁지겁 대접하는 역수입, 역차별 현상은 싸이뿐만이 아니었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 ’피에타‘, 김덕수의 사물놀이, 가수 이박사의 트로트 메들리 등도 모두 해외에서 호평을 받자 역수입된 사례들이다. 이런 사례들은 현대판 사대주의가 아닌지 의심해볼만 하다.

 

우리 주변에 남아 있는 사대주의의 또 다른 사례는 영어공용화 논쟁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영어공용화란 모든 공식, 비공식 언어와 문서, 의사교환, 소통에 한국어와 똑같은 비중으로 영어가 사용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영어공용화 찬성론자들은 영어를 공용화했을 때 우리나라가 얻는 경제적 이익이 크다는 점을 들어 공용화를 찬성한다. 이들은 영어를 잘해야 외교도 잘하고 정보를 더 많이, 더 빨리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나는 이런 입장에 반대한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영어를 공용화한다고 우리나라가 얻는 경제적 이득이 크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만약 영어공용화를 하게 되면 많은 교육비를 투자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교육비에 비교해 영어공용화로 얻는 이득은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의 대부분 대기업들은 이미 전 세계 시장을 누비고 있다. 기업인들이 영어를 못한다고 국제 시장에서 사업을 못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영어를 못해도 영어를 잘하는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 그만이다. 실제 국가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영어공용화 정책이 아니다. 그것은 경제 및 외교에서 탁월한 능력을 가진 전문가를 양성하는 것이다.

 

둘째, 영어공용화 정책은 사대주의 발상일 뿐이다. 영어공용화 정책이 시행되면 어릴 때부터 영어를 배워야한다. 어릴 때부터 영어에 비중을 두고 영어를 사용하다보면 한글의 중요성은 점차 줄어들 것이다. 결국에는 민족의 긍지와 정체성마저 사라질 것이다. 우리나라 경제성장의 원동력은 국민들의 단결인데, 민족의 정체성이 사라진다면 국민들의 단결력도 줄어들게 된다. 영어공용화는 단기적으로 본다면 이득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국가의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 결국 영어공용화 정책을 옹호하는 것은 미국이 강국이라는 이유로 영어권 문화를 모방하면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한 착각은 미국에 대한 사대주의에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 시대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를 올바른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지금 사대주의 사상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싸이 열풍이나 영어공용화 논쟁에서 미국에 대한 사대주의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5. 결론

 

나는 양반전과 허생전의 차이점을 살펴보았다. 양반전과 달리 허생전은 당시 양반들을 비판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사대부들이 해야 하는 역할과 도리까지 다룬다. 당시 양반들이 자신들의 사회적인 역할과 임무를 다하지 못한 것은 사대주의 사상의 영향이 크다. 그들은 중국을 무조건 떠받드는 사대주의 사상에 빠져, 정작 자신이 맡은 일을 하지 못했다. 지금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에 빠져있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사대주의 사상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싸이 열풍이나 영어공용화 논쟁에서 보았듯이 미국에 대한 사대주의 사상이 여전히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