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음은 2개월 사고훈련을 하고 중학교 3학년 수연이 쓴 첫 번째 에세이다. 아주 잘 쓴 것을 올리는 것은 아니다. 각 주제마다 한 편 정도만 가끔씩 올리는데, 이 번에는 수연의 것으로 택했다.
* 이 글이 흥미로운 이유
이 글에는 내가 동의할 수 없는 '식민지 근대화론', 즉 일제 강점기 덕에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는 입장이 담겨 있다. 따라서 식민지 근대화론을 옹호하는 이들이 아주 반길 글이다. 그래서 내가 학생을 비판해야 할까? No! 칭찬해 줄 것이다.
사건들의 나열, 인과관계의 우연성의 구분,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들로 이어진 역사성에 대해 학생은 아직 충분한 배경 지식을 갖고 있지 않다. 오히려 이런 학생이 식민지 근대화론에 담긴 허접한 논리를 더 잘 파악해 식민지 근대화론 옹호자들을 제대로 비판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생긴다.
사실 식민지 근대론에 대한 비판다운 비판조차 구성하지 못하고 있는 집단이 바로 '진보를 내세우는 이 땅의 지식인'들 아닌가! 나처럼 식민지 근대화론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은 이 학생을 비판한다는 입장이 아니라 설득한다는 입장에서 이 글을 접하면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무조건적인 사대주의 비판에 대한 반론
- 연암 박지원의 ‘허생전’을 읽고 -
정수연(중 3)
사대주의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주체성 없이 큰 나라에 빌붙는 것’을 뜻한다. 그러한 사대주의가 조선 후기에는 사대부 문화의 한 측면이었음을 ‘허생전’을 통해 알게 되었다.
1.
조선 후기 문장가 연암 박지원이 쓴 단편 소설 ‘허생전’에는 당시 사대부들의 무능력을 질책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그 당시에는 유난히 인재가 활약을 못했다. 정말 인재가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인재가 있었어도 제 빛을 발하지 못한 것일까? 인재가 있었어도 등용되지 않았다. ‘허생전’에는 당시 이러한 세태를 한탄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적국에 사신으로 보낼만한 인물이 베잠방이로 죽고, 군량을 책임질 만한 인물이 바닷가 배장일을 하며 일생을 소모한다. 백성의 민심과 세태 변화에 무관심한 사대부는 조선을 작은 중국으로 여기는 ‘소중화 사상’에 빠져 양반의 체면치레인 관습과 군자의 덕을 쌓는 것을 구별하지 못했다. 변화하는 세태에 둔감하고 난세를 구할 생각도 없는 그들은 그저 자신의 배를 불리는 생각밖에 없었다.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었던 그들에게는 중국은 군주나 다름없었다.
허생은 글 읽기를 좋아하는 선비였다. 가세가 기울대로 기울자, 그는 저자거리로 나가 돈을 벌어야만 하는 상황에 처했다. 하지만 다른 양반들처럼 양반 신분을 팔아 돈을 벌 생각을 하지 않았다. 부자를 찾아가 만 냥이라는 거금을 빌렸다. 만 냥을 빌린 허생은 그 길로 안성으로 가 대추, 밤, 감 등을 매전 매석하여 나라 경제를 좌지우지 할 수 있게 된다. 이후 그는 비슷한 방법으로 백만 냥까지 벌어들여 십만 냥을 부자에게 갚고 오십만 냥을 바다에 던진다. 우리에게 흥미로운 사건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2.
평소 친분이 있었던 정승 이완이 인재를 원하자 부자는 허생을 그에게 소개한다. 허나 말로는 난세를 구하기 위해 인재를 구하고 싶다했던 이완은 허생의 세 번의 요청을 거절한다.
허생은 와룡과 같은 인물을 조정에 천거할 테니 임금이 그의 초가집까지 세 번 찾아가 달라 요청한다. 이완은 거절한다. 허생은 조선에 흘러들어온 옛 명나라 장병들에게 종실의 딸들을 시집보내고 세도가의 재산을 빼앗아 그들이 쓰게 해 달라 한다. 이완은 거절한다. 허생은 청나라와의 교류를 돈독히 하고 지식인은 빈공과에 응시하도록 하고 고관 자제들은 중원의 호걸들과 친분을 맺으라 한다. 이완은 거절한다.
이완은 난세를 구하고 싶다면서 어째서 허생의 세 번의 제의를 거절한 것일까? 그는 난세를 구하기 위한 현실적 방법에 대해서는 진정한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청나라를 오랑캐라 부르며 업신여기고 ‘소중화 사상’에 빠져 체면치레하기 바쁜 양반께서 어찌 난세를 구할 수 있겠는가! 이완은 단지 그러한 양반 중 한 명에 불과했다.
허생은 양반의 체면치레에 불과한 관습과 군자의 덕을 구별하지 못하는 양반들에게서 아무런 희망을 찾을 수 없었다. 이에 허생은 세태의 변화에 둔감한 사대부들을 신랄하게 꾸짖으며 속세에서 사라져 버린다. 허생의 요청에 대한 이완의 거절은 나라를 일으킬 기회와 인재 한 명을 잃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만약 이완이 허생의 제의를 받아들였다면 지금쯤 우리 주변은 변해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사대주의를 무조건 나쁘다고 비판할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가 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에게 지배를 당했으나, 그로 인해 산업을 발전시킬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물론 이완이 허생의 제의를 받아들였다면 우리나라는 조금 더 일찍 발전하여 강대국과 교류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좀 더 일찍 발전해 강대국이 되었다면, IMF 시절 금모으기 운동이나 일제 강점기 시절 독립운동 같이 우리 민족을 한데 끌어 모을 수 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좋지 않은 일이고, 옳지 않은 일이라 하여 무조건 비판하다 보면, 그로 인해 일어난 좋은 일들은 보이지 않을 것이고 또한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많은 가능성들을 놓치는 일이 될 것이다. 이를 보이기 위해 뒤에 연암 박지원이 현재 환생하여 살아있다면, 이것을 주제로 소설을 하나 써 볼 것인데, 먼저 연암 박지원이 누군지 알아보자.
3.
연암 박지원은 한양 서쪽 야동이라는 고을에서 출생했다. 그는 반남 박 씨라는 명문 집안의 자손이었다. 당쟁에 휘말리기 싫었던 그의 할아버지는 벼슬을 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가세가 기울었다. 열여섯에 결혼하여 뒤늦게 장인에게 고전을 배운 박지원은 빼어난 글재주에도 불구하고 생계의 어려움을 격어 청년 시절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의 작품 중 하나인 ‘양반전’은 청년 시절에 지은 문집으로 양반을 비판한다는 점에서 ‘허생전’과 공통점을 갖고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박지원은 양반임에도 불구하고 양반의 잘못을 못마땅해 하며 비판하였다. 그는 서른이 넘어 당대학자들과 교류하면 중국에도 갔다 와 나이 오십에 관청의 하급관리가 된다. 육십이 넘어서 군수가 되었고,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과농소초’를 지었다.
연암 박지원은 ‘양반전’을 통해 양반을 비판하였고, ‘허생전’을 통해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사상을 비판하였다. 양반다운 양반은 군자의 덕을 갖춘 이들이어야 한다. 당시 백성의 눈에 비친 양반은 양반다운 양반과는 아주 달랐다. 가식에 가까운 체면치레, 허세에 빠진 사람들이 양반이었다. 양반이 속한 사대부란 백성을 편히 살도록 해야 하는 의무를 가진 계층이나 당시 양반들은 자신을 위한 유흥에 빠져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에 빠져 명 멸망 이후 주변 정세에도 둔감했다. 그 결과 나라가 약해졌으며, 결국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러나 양반과 사대주의에 대해 무조건 비판만 해야 하는 것일까? 부패한 양반들이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에 삐졌던 조선 후기의 연암 박지원이 당시 양반과 사대주의를 비판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사대주의로 인해 좋은 일도 겪은 현재 우리는 무조건 과거의 사대주의 사상을 무조건 비판만 해서는 안 된다. 이를 보이기 위해 하나의 소설을 써본다.
4.
만약 연암 박지원이 현재 옛날의 기억을 가지고 환생해 있다 가정하고 이야기를 이어 나가자.
박지원은 길을 걷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푸르고 푸른 하늘이 눈에 들어 왔다. 그러나 다시 고개를 내려 눈앞을 바라보면 평온한 하늘과는 다른 추악한 인간들의 권력 다툼이 벌어지고 있다. 그는 조선시대 당시 연암 박지원이었으나 현재 그때 당시의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21세기에 태어났다. 어린아이일 당시 초등학교라는 곳에서 교사라 불리는 훈장이 사회를 가르치며 양반을 치켜세우길 레 그는 그에 반론하며 양반의 온갖 더러운 권모술수와 가식, 허세를 예로 들었다. 이에 놀란 교사는 윗선에 보고하였고, 이후 그는 영재원이라는 곳에 들어가 주입식 교육을 받았으며 성인이 될 때까지 천재라는 타이틀을 달고 승승장구 할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일부 지식인이나마 대우를 받을 수 있고 많은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었다. 박지원은 조선 시대와는 달리 권력을 얻고 사회에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 있는 지위까지 올라왔으나, 그의 주변은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체면치레에 신경을 쓰며 미국 중심의 사대주의 사상에 찌들어 있는 정치가들, 재벌들이 그의 주변을 채우고 있었다. 그는 결심했다. ‘오늘 모든 것을 바꿀 것이다.’ ‘그의 모든 것을 걸 것이다.’
박지원은 자신의 계획을 실행시켜 나갔다. 인터넷과 페이스북, 트위터 등 각종 소셜 네트워크 사이트에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담은 글을 일제히 내보냈고, 기자 회견 또한 준비해 놓았다.
“박지원 씨! 현재 천재라는 타이틀 아래 많은 혜택과 재산을 얻고 계신대요. 오늘 기자 회견을 여신 것은 그것을 모두 포기할 각오가 되셨다는 말씀이십니까?”
“재산은 제 것이 아니므로 모두 사회에 환원할 예정입니다. 현재 재벌들의 재산은 그들의 것이 아닙니다. 피땀 흘려 벌은 국민 모두의 것입니다. 국민이 없다면 그들도 없습니다.”
“본인이 조선시대 당시 연암 박지원의 환생이라 주장하신 적이 있으신데요. 사실입니까? 사실이라면 앞으로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네 사실입니다. 저는 분명 죽음을 맞으며 눈을 감았으나, 다음 순간 눈을 떠보니 어쩐 일인지 저는 아기가 되어 이제 막 태어났더군요. 그리고 저는 앞으로 이 인터뷰가 끝나면 모든 것을 버리고 속세를 떠날 작정입니다. 저는 조선과는 달리 개인의 주장이 많은 사람들에게 순식간에 퍼져나가는 것을 보고 그 당시 이루지 못하였던 저의 사상을 이루고자 했지만, 현실은 가혹했습니다. 당시의 사대주의 사상은 여전히 존재하며, 그 바탕이었던 ‘소중화 사상’은 ‘소미화 사상’으로 변하였을 뿐,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회를 고치고자 노력하며 많은 좌절을 겪었습니다. 당시 양반들처럼 권세가들은 소시민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이익이 최우선이며, 나라에 관해서는 자신에게 피해가 오지 않는 한 상관하지 않습니다. 몇 번이나 시도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 모든 것을 포기하려 합니다. 이 기자 회견을 결정하기 전, 몇 번이나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이것입니다. 사대주의는 무조건 나쁜 것이 아닐 것이다. 그것도 존재 의의가 있어 존재하는 것이다. 조금 더 넓은 시각에서 바라보자. 만약 당시 사대주의 사상에 찌들어 나라에 관여하지 않은 양반들이 아니라 조금이나마 백성을 생각하던 양반들이 권력을 쥐고 있었다고 가정하면, 우리가 일본에 강제 점령당하는 수모를 겪지 않았을 것이고, 약소국이라는 수모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위기가 없었다면 우리 민족이 그만큼 단결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며, 단 기간에 이만큼 IT강국으로 성장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무조건 모든 것을 선악의 잣대로 판단하지 말자. 이것이 저의 생각이며 결론입니다. 이제, 저는 인터뷰를 마치겠습니다.”
5.
보통은 ‘허생전’을 읽으며 사대주의가 나쁘다는 식의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또한 옳고 그름을 따지는 도덕적 관점으로 볼 때 그 생각이 맞다. 그러나 조금 다른 시각으로 허생전을 바라보자. 무조건 사대주의를 비판만 할 수 없다. 비록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에 빠진 양반들 때문에 그 당시 사람들이 비참한 삶을 살았을지라도, 사대주의가 무조건 부정적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우리는 일제 강점기라는 쓰라린 경험을 겪었지만, 그 덕에 지금까지 놀라운 속도로 산업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밑거름을 마련했다. 도덕적 관점으로 보았을 때 옳지 않다 해서 무조건 비난만 할 수는 없다. 사회가 발전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악, 즉 ‘필요악’이 있어야 한다. 옛 조선 시대 당시, 사대부는 자신의 욕심만 채우며 나랏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 결과 민족은 위기 시 서로 믿고 의지하며 단합할 수 있었고, 빠른 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다. 결론은 모든 것을 선악의 잣대로 포기하지 말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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