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 에세이/인지와 경험

가설 생성 추리(Abduction)

착한왕 이상하 2010. 1. 16. 16:41

가설 생성 추리(Abduction)

 

 

1.

성장 과정은 ‘세상에 대해 구조화된 지식 체계’의 형성 과정이기도 하다. 대상들 사이에 유사성을 찾고 대상들을 분류하는 능력은 언어 습득 이전에 이미 활성화된다. 지각 경험과 달리 사고는 진술, 그림 및 방정식과 같은 표상을 매개로 하여 구성되며, 표상은 기호 조작(operation of signs) 없이는 불가능하다. 기호 조작에 근거한 표상이 언어적 표현에 국한되지 않는 까닭에, 언어 습득 이전의 단계에서도 사고의 핵심인 추론 및 추리 활동이 나타난다. 어떤 대상 A가 B와 유사하고, B가 C와 유사할 때 어린 아이도 A와 C도 유사할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원초적인 추론 과정조차 대상 분류 방식에 의존적이다. 다시 말해, 일상적 추론 및 추리 활동은 ‘세상에 대해 구조화된 지식 체계’에 의존적이다.

 

언어를 습득해 가는 과정 속에서 ‘세상에 대해 구조화된 지식 체계’는 점차 정교해진다. 이때 그 정교성은 단순히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의 양적 증가를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지식 체계가 상호 추론적 관계를 맺지 않는 경험들을 통합적으로 설명해주는 해석의 기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지식 체계를 통해 추상적인 이론 및 가치 체계 등도 생성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세상에 대해 구조화된 지식 체계’는 ‘삶의 지도(life-map)’에 비유될 수 있다. 항해에 필요한 지도는 환경 구조에 대한 조직화된 정보망을 담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지도를 사용하여 목적지를 찾아낼 수 없다. 또 지도에는 학교의 위치나 인구수 등이 나타나 있다. 따라서 지도의 사용 목적은 특정 장소를 찾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세상에 대해 구조화된 지식 체계’가 삶의 지도에 비유될 때 그것은 이처럼 사고 활동과 행위의 방향성을 정하는 역할을 한다.

 

영원불멸의 고정된 지도가 없듯이, 삶의 지도에 비유되는 지식 체계도 고정된 것이 아니다. ‘세상에 대해 구조화된 지식 체계’에서 세계의 해석과 관련된 추상적인 이론 등은 새로운 사실의 발견만으로도 급격한 수정 요구를 받을 수 있다. 새로운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가설 생성이 필요하고, 새로운 가설의 수용은 경우에 따라서는 지식 체계의 급격한 변동, 즉 재조직화를 발생시키기도 한다. 추론 및 추리가 ‘세상에 대해 구조화된 지식 체계’에 근거하지만, 역으로 그러한 지식 체계의 변동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이와 관련하여 특별히 주목해야 할 사고 활동이 있다. ‘가설 생성 추리’ 혹은 ‘가추(abduction)’라 불리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2.

추리는 일반적으로 문제 해결을 위한 ‘이유 찾기’ 혹은 ‘근거를 가진 해결책 찾기’를 뜻한다. 이는 ‘추리’에 대응하는 라틴어 ‘reri'가 ‘문제 해결을 위해 생각하다’를 뜻하고, 그 명사형 ‘ratio'가 계산 능력 혹은 합리적 능력을 뜻한다는 데에서 알 수 있다. 추론은 추리 활동의 특별한 방식, 특히 논증에서 결론이 전제에 근거하는 방식을 뜻하는데, 그러한 방식 중 연역, 귀납, 유추의 패턴을 살펴봤다. 하지만 추리와 추론을 엄격히 구분하는 것은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실례로 ‘연역 추리’, ‘연역 추론’ 중 무엇을 사용하든, 이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다만, 추리는 문제 해결 과정과 맞물려 이해될 수 있는 까닭에 좀 더 폭 넓게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연역 추리’가 주어진 맥락에서 확실한 결론 찾기 과정과 맞물린 사고 활동을 뜻한다면, ‘연역의 추론 패턴’은 결론이 전제들에 근거하는 방식을 뜻한다. 지금까지 그러한 패턴은 논증 결과가 아닌 논증 과정의 맥락 속에서 분석되었다. 그러한 패턴은 형식의 관점이 아닌 내용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하는데, 이 점은 형식 추론을 다룰 때 분명해질 것이다.

 

가설 생성 추리를 촉발시키는 데이터는 연역, 귀납이나 유추와 달리 주어진 것으로 취급되지 않는다. 가설 생성 추리의 데이터는 설명을 요구하며, 그러한 설명을 위해 일반적으로 단일 가설이 생성된다. 가설 생성 추리의 결론, 곧 데이터를 설명해주는 가설은 잠정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까닭에, 가설 생성 추리는 귀납의 일종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가설 생성 추리의 추론 패턴은 연역이나 귀납과 달리 순환적(circular)이다. 유추의 패턴도 순환적임을 보았다. 논증 맥락에서 데이터가 보증 장치에 의해 그럴듯한 결론과 연결되면, 해당 결론은 유비 자료의 부분적인 정보 및 관계들의 구조를 유비 표적에 전이시키거나, 유비 자료와 표적을 통합시켜주는 기능을 갖는다. 가추의 결론인 가설은 데이터에 함축된 사실을 설명해줌으로써 기존의 지식 체계의 유용성을 검토하는 기능을 갖는다. 즉, ‘세상에 대해 구조화된 지식 체계’는 그대로 유지되거나, 급격한 변동 과정을 겪게 된다. 이를 두 사례를 통해 알아보자.

 

[사례 1]

당신은 오랜 항해 끝에 터키의 연안에 도착하자마자 말을 탄 일군의 기수들에 둘러싸인 사람을 보았다. 기수들은 그의 머리 위를 덮어 그림자를 만들기 위한 천개(天蓋)를 잡고 있었다. 황금 장식의 천개가 그의 머리를 덮고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당신은 그가 어떤 인물인지 궁금해 한다. 당신은 그가 이 지역의 지배자라는 가설을 세운다. 이러한 가설에 의해 왜 기수들이 그를 위해 천개를 잡고 있는지가 일단 설명된다. 비록 그 가설이 거짓으로 밝혀질지라도, 그 가설 덕에 새로운 사실을 설명할 수 있게 된 당신의 마음은 안정을 찾는다.

 

[사례 2]

193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지구의 내부는 지각, 맨틀, 핵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러한 지구 내부의 구조를 밝히는 데 S와 P 지진파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각 지진파가 관측되지 않는 영역이 있는데, 그 영역을 암영대(shadow zone)라 한다. S파는 진원지의 정반대 영역에서는 관측되지 않는다. P파의 암영대는 진원지에서 지구 중심까지의 수직선을 기준으로 105도와 140도 이다. 그러나 지진계의 발달로 P파의 암영대로 알려진 140도 근처에서도 약한 P파가 감지되곤 하였다. 이 사실은 많은 지진학자들에게 하나의 골칫거리였다. 덴마크의 여성 과학자 레만(I. Lehmann)은 대범한 가설을 세웠다. 그녀는 지진파를 빛처럼 직진하는 것으로, 그리고 지구 외핵의 경계를 유리면에 유비하였다. 빛에 유비된 P파의 일부는 반사되고 일부만 핵을 통과한다. P파의 암영대에서 P파가 관측되기 위해서는 지구 핵 내에 또 다른 경계면을 갖는 핵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하여 레만은 지구 내핵 가설을 세웠다.

 

[사례 1]이 일상적인 가설 생성 추리에 해당한다면, [사례 2]는 과학적 발견과 맞물린 가설 생성 추리에 해당한다. 이 두 사례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부인할 수 없지만 설명을 요구하는 사실이 추리의 데이터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가설 생성 추리의 결론인 가설은 데이터에서 직접 추론되는 것이 아니다. 데이터와 가설 사이를 연결시켜주는 보증 장치가 있어야 한다. [사례 1]의 경우, 값비싼 장신구로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지위가 높다는 통념이 그러한 보증 장치로 작용했다. [사례 2]의 경우에 작용한 보증 장치는 여러 요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지진파를 빛처럼 다루기 위한 추상화 과정, 핵의 경계면을 유리면에 유비한 것, 그리고 지진 현상은 단순한 우연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는 믿음 등을 들 수 있다. [사례 1]과 [사례 2]의 미묘한 차이를 논하기 전에 그 둘을 관통하고 있는 가설 생성 추리의 추론 패턴을 살펴보자.

 

 

   

가설 생성의 추론 패턴은 근본적으로 순환적이다. 순환적 추론 패턴이 순환적 오류를 함축한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데이터에서 결론, 즉 가설로 향하는 방향의 목적이 가설 생성이라면, 가설에서 데이터로 향하는 목적은 설명이기 때문이다. 가설로 데이터의 사실이 설명된다고 할 때 이러한 설명은 추론 패턴의 일부분이다. 이러한 순환적 추론 패턴이 [사례 1]과 [사례 2]를 관통하고 있지만, [사례 2]에는 [사례 1]과 달리 추상화 과정과 같은 것도 보증 장치에 개입하게 된다. 이는 [사례 2]의 데이터에 함축된 사실의 성격이 다름을 의미한다.

 

• 가설 생성 추리의 데이터에 함축된 사실은 설명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사실’을 뜻한다. 새로운 사실이 항상 기존의 지식 체계에 반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존의 지식 체계와 극심한 마찰 관계를 맺기도 한다. 이러한 경우, 생성된 가설은 기존의 지식 체계에 변동을 불러온다.

 

• 기존의 지식 체계에 반하는 새로운 사실이 이론적 설명을 요구하는 경우, 가설 생성 추리의 추론 패턴은 가설 생성과 설명이라는 본래의 순환적 구조를 유지하면서도 추상화 능력이나 유추와 같은 다른 추리 방식과 하나의 그물망을 형성하곤 한다. 여러 현상들을 통합 설명할 목적으로 고안된 이론에는 전자(electron)나 지구 내핵처럼 관찰 불가능한 ‘이론적 대상(theoretical objects)’이 포함되어 있는 까닭에, 이론 수정 과정은 복잡할 수밖에 없다.

 

연역, 귀납, 유추, 가설 생성의 추론 패턴들을 담당하는 각각의 두뇌 기능이라는 것은 없다. 그러한 패턴은 각 추리 과정의 데이터와 결론의 내용적 관계망을 나타낸 것일 뿐이다. 실제 추리 과정은 복합적이다. 이는 [사례 2]에서 데이터와 결론인 가설을 연결해주는 보증 장치에 추상화 과정 및 유추가 개입했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가설 생성 추리는 그 순환적 패턴을 유지하는 가운데 다른 추리 방식의 도움을 받아 가설을 생성시키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생성된 가설을 검증 하는 과정도 더욱 복잡하다.

 

[사례 1]의 경우, 해당 인물이 정말 터키 연안 지역의 지배자인지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된다. 설령 그가 지배자라는 가설이 잘못된 것으로 밝혀져도, 가설을 세운 사람의 믿음 체계는 그대로 유지된다. [사례 2]에서 지구 내핵 가설 설정으로 암영대에 P파가 감지되었다는 사실은 설명되어도, 가설 검증 과정은 매우 까다로워 상당한 기간을 요구한다. 단일 가설 생성 추리가 여러 가설의 평가나 가설 검증에 직접적으로 해당하지는 않기 때문에, 생성된 가설의 잠정적 수용 여부는 그것의 설명력에 대한 가설 생성자의 ‘만족 수준(satisficing level)’에도 의존적이다. 그러한 만족 수준을 결정하는 것은 가설 생성자의 배경 지식, 경험 및 심리적 성향과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가설 생성 추리 과정에는 논리적인 것과 심리적인 것을 이분하는 관점은 유지될 수 없다. 그러나 가설 생성이 가설 생성자의 만족 수준에 의존적이라고 하여, 가설 생성 추리가 임의적이거나 무작위적으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이 점은 가설 생성 추리에 속하는 ‘단서 추정법’을 살펴볼 때 분명해진다.

 

   

   

3.

추론은 기억 없이는 불가능하다. 일상생활에서 어떤 과업을 수행해야 할 때 갑자기 문제 해결을 위한 단서(cue)가 떠오른다. 누구나 한 번은 경험해본 이러한 상황은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되는 단서 추출이 단순한 논리적 절차의 결과는 아님을 암시한다. 기억은 제한된 자원과 시간 속에서 효과적으로 문제를 풀기 위한 단서 추출의 기반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단서 추출의 결과는 의식되지만, 그 과정은 의식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의식적이고 논리적 사고를 대표하는 추론이 문제 해결 과정에 필수적인 것은 맞지만, 이 때문에 기억을 논리적인 것에 대비시켜 문제 해결의 인지 과정에서 제외시켜서는 안 된다. 즉, 추론 활동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는 ‘기억에 근거한 추론’이며, 단서 추출은 기억에 근거한 추론의 핵심이다.

 

대부분의 문제는 제한된 자원과 시간 속에 진행되는 일종의 게임과 같다. 문제 해결을 위해 많은 단서를 사용하면 할수록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시간은 늘어난다. 제한된 시간 내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인지적 전략 중 하나는 가급적 적은 양의 단서를 사용하는 것이다. 많은 경우, 단 하나만의 단서를 사용한다. 이때 기대할 수 있는 기대 효과는 문제 해결에 필요한 에너지와 시간의 절약이다. 하지만 이미 그 해결 방법이 알려진 문제가 아니라면, 오판을 범할 가능성도 커진다. 일상생활에서 이를 보완하기 위해 사용되는 인지적 전략이 있다. 인지심리학자 에곤 브룬스윅(E. Brunswick)에 의해 연구된 그러한 전략은 일반적으로 단서의 ‘대체 기능(vicarious function)’에 근거하고 있다. 가설 생성 추리의 일종인 단서 추정법도 단서 대체 기능에 근거하고 있는 까닭에, 먼저 그 기능을 살펴보자.

 

• 일산과 성남 중 어느 곳이 인구가 더 많을까?

 

일본인 관광객에게 위와 같은 물음을 던졌다고 하자. 한국의 지리에 밝지 않은 그는 ‘러브 모텔’을 문제 해결을 위한 단서로 잡았다. 그는 과거 경험에 비추어 러브 모텔이 많은 지역의 인구도 많았기 때문이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인 관광객은 일산을 답으로 택했다. 그는 단 하나의 단서만을 사용하여 신속하게 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답은 틀렸다. 이를 안 그는 새로운 단서로 ‘프로 축구팀’을 택해 ‘성남’이라 답했다. 프로 축구팀을 갖고 있는 도시의 인구가 농구팀을 갖고 있지 않은 도시보다 많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답이 틀렸을 때 해당 단서를 다른 단서로 대체하는 것을 ‘단서 대체 기능’이라 한다.

 

위에서 살펴본 단서 대체 기능에 의한 일상적 문제 해결 과정에 사용되는 단서는 하나였다. 전문적인 문제는 많은 단서를 사용해야 풀릴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문제의 전문성은 단서의 양보다는 단서의 질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해결에 적합한 단서가 일반인에게 포착되기 힘든 문제나 과업은 전문적인 것으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문가에게 요구되는 것은 문제 해결에 적합한 단서를 추출하는 능력이지, 결코 많은 정보량을 다룰 수 있는 계산 능력은 아니다. 만약 문제가 전문적이고, 많은 정보를 처리해야 하는 경우라면, 문제 해결은 한 명의 전문가가 아니라 여러 전문가들의 협동 연구를 요구한다. 이러한 현상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다만, 과거에는 관심을 공유한 이들의 자발적 협동이 연구의 중심축을 형성했다면, 현재의 연구는 정부의 정책적 관리 아래 대규모 형태로 진행되는 협동 연구가 많다. 그러한 연구 중에는 서로 이질적인 분야의 관심사들이 거래 관계를 맺게 되기도 하는데, 그러한 거래 관계를 바탕으로 한 협동 연구를 학제 간 연구로 규정하여도 무방하다.

 

 

 

   

단서 대체 기능에 근거한 단서 추정법은 다음의 추론 패턴을 보여주는 가설 생성 추리의 일종이다. 단서 추정법은 설명을 요구하는 사실, 즉 ‘주목 단서(attention cue)’와 가설이 또 다른 단서, 즉 ‘설명 단서(explanatory cue)’에 의해 가설로 연결되는 추리이다. 이때 가설이 주목 단서를 설명하는 정도가 가설 생성자의 만족 수준에 도달한 경우, 가설 생성 추리는 그에게 일단 받아들여진다. 만약 생성된 가설이 주목 단서를 설명하지 못하거나, 가설 생상자의 만족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경우, 가설 생성자는 기존의 설명 단서를 다른 단서로 대체해야 한다. 이러한 단서의 대체 기능 때문에, 단서 추정법은 단서 대체 기능에 근거한 가설 생성 추리의 일종으로 규정되는 것이다. 단서 추정법의 추론 패턴을 단계적으로 살펴보자.

 

• 주목 단서: 주목 단서는 문제 해결자에게 주목되는 새로운 사실에 해당한다. 설명을 요구하는 주목 단서는 가설 생성 추리의 추론 패턴에서 데이터에 속한다. 문제를 발생시키는 새로운 사실이 누구에게나 주목되는 것은 아니다. 특정 분야에서 오랜 훈련을 받은 사람만이 발견할 수 있는 주목 단서들이 있다.

 

• 설명 단서: 설명 단서는 주목 단서와 결론인 가설을 연결해주는 보증 장치에 속한다. 문제를 발생시키는 사실이 누구에게나 주목 단서가 되지는 않는 것처럼, 문제 해결에 적합한 설명 단서를 찾는 것은 개인의 능력, 배경 지식 및 경험에 의존적이다. 심지어 설명 단서의 발견은 운(運)에 좌우되기도 하는데, 이 점은 이어지는 글에서 보게 될 것이다.

 

• 부가 보증 장치: 설명 단서를 찾는 것뿐만 아니라 설명 단서를 근거로 가설을 생성하는 경로에는 통념, 기존 경험을 바탕으로 한 믿음, 추상화 과정 및 연역, 귀납, 유추 등의 추리가 개입한다. 언급된 모든 것들이 항상 가설 생성 경로에 개입하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복잡한 문제일수록 보증 장치에 속하는 것들이 많아지는 경향이 있다. 과학적 가설을 생성하는 경우, 세계를 이해하는 특정 방식, 실례로 기계론적 세계 이해, 유기체론적 세계 이해, 전일론적 세계 이해 등이 가설 생성 경로에 개입하기도 한다.

 

• 가설 생성과 설명: 설명 단서 및 부가 보증 장치를 근거로 가설이 생성되면, 가설의 그럴듯함은 주목 단서를 설명하는 정도에 의해 결정된다. 이러한 결정은 가설 생성자의 설명 목적과 만족 수준에 의존적이다. 모든 가설 생성 추리가 단서 추정법은 아니지만, 단서 추정법은 일상생활에서뿐만 아니라 과학적 발견에 이르기까지 흔히 발견되는 가설 생성 추리의 일종이다. 단서 추정법은 다수가 아닌 단일 가설 생성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다수의 가설 중 가장 설명력이 높은 것을 선택하는 ‘최적 설명 추론(inference to best explanation)’과 구분되어야 한다. 일부 학자들은 최적 설명 추론이 가설 생성 추리의 유일한 논리적 기준인 것처럼 주장하지만, 최적 설명 추론은 가설 생성보다는 가설 선택 및 평가의 영역으로 여겨져야 한다.

 

• 되먹임: 생성된 가설이 만약 주목 단서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럴듯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면, 가설 생성자는 새로운 설명 단서를 찾는 과정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이를 단서 추정법의 ‘되먹임(feedback)’이라 한다. 되먹임 과정에 의해 발견된 새로운 설명 단서는 기존의 설명 단서를 대체하게 된다.

 

위에서 살펴본 단서 추정법에 대한 아주 사소한 사례 하나를 살펴보자. 여기서 사소하다는 것은 살펴볼 사례가 글 [2]의 [사례 1]과 마찬가지로 기존의 지식 체계에 아무런 변동을 불러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은 소나기가 온 다음 날 등산을 하던 중 산골짜기에서 해골 하나를 발견했다. 그 해골의 윗부분에는 구멍이 나있었다. 당신은 해골에 구멍이 난 이유를 찾기 위해 주변을 살펴보았다. 인근 지역에 군사 기지가 있었다. 당신은 이를 단서로 의미심장한 하나의 가설을 세웠다. 이러한 일상적 사례는 단서 추정법을 대표한다. 기존의 지식 체계뿐만 아니라 삶의 방식에도 급격한 변동을 불러온 과학적 발견 사례에 해당하는 단서 추정법도 많다. 이어지는 글에서 그러한 사례 하나를 분석할 것이다.

 

   

 

4.

단서 대체 기능에 근거한 단서 추정법이 가설 생성 추리의 추론 패턴을 유지하면서도 과학적 발견의 그물망 속에 구현된 하나의 방식을 분석해 보자. 우리가 분석할 사례는 젬멜바이스(I.P. Semmelweis)의 소독법의 발견이다. 19세기 오스트리아 제국, 곧 합스부르크 공화국에 속했던 헝거리 태생의 젬멜바이스는 비엔나 대학 제 1 병동의 의사였다. 젬멜바이스는 그의 배경 지식 및 경험에 근거하여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그가 주목한 단서는 다음과 같다.

 

• 산욕열로 인해 사망한 제 1 병동 산모의 수가 제 2 병동에 비해 너무나 많았다.

 

 

 

 

  

젬멜바이스는 왜 제 1 병동 산모들이 제 2 병동 산모들보다 산욕열로 인해 더 많이 사망했는가라는 문제를 해결해야 할 과업으로 정했다. 그의 경우, 이러한 문제 설정이 단순히 주목 단서에만 근거한 것은 아니었다. 모든 문제가 과학자에게 해결해야만 하는 의미있는 문제는 아니며, 주목 단서에서 문제 설정 단계로의 전이는 구체화 과정에 근거해야 하기 때문이다. 젬멜바이스는 우선 제 1 병동과 제 2 병동의 사망률을 비교하였다. 이러한 비교를 통해 젬멜바이스는 그가 주목한 단서가 일회성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발생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집 혹은 병원 호송 과정에서 출산한 산모들의 사망률이 낮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러한 사실은 산욕열에 의한 입원 산모의 사망률이 ‘병원 출산 대 비병원 출산’이 아니라 ‘제 1 병동 대 제 2 병동 출산’의 맥락에서 다뤄져야함을 암시한다. 이렇듯 문제가 설정되는 과정은 사망률이라는 측정량과 관련된 통계적 방법과 주목 단서를 비엔나 병동의 출산 맥락 속에 가둬버리는 지지 사실에 의해 구체화된 것이었다.

 

• 산욕열로 인해 사망한 제 1 병동 산모의 수가 제 2 병동에 비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은 비엔나 대학 병원의 문제이다. 왜 산욕열로 인한 산모의 사망률이 유독 제 1 병동에서 높은 것일까?

 

설명을 요구하는 주목 단서를 근거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설정되면, 가설을 세우기 위한 설명 단서를 찾아야 한다. 젬멜바이스가 찾은 첫 번째 단서는 제 1 병동과 제 2 병동의 기능적 차이였다. 해부실과 연결되어 있는 제 1 병동의 경우, 의사와 의대생들이 산모를 다루고 있었다. 제 2 병동의 경우, 산파들이 산모를 다루고 있었다. 젬멜바이스의 발견 맥락 전체를 통해 유지되고 있는 이러한 두 병동의 기능적 차이는 가설 생성에 필요한 설명 단서에 해당한다. 하지만 하나의 설명 단서로는 가설을 세우기에 부족했다. 젬멜바이스는 가설을 생성하는 데 필요한 단서를 찾기 위해 환풍기 주변의 청결도, 병원 내 환자들의 분포 방식 등을 검사했다.

 

설명 단서들을 근거로 가설을 세우는 단계에 ‘지침서 개념(guideline concept)’들이 개입하곤 한다. 물리학의 경우, 보존량, 대칭성 및 단순성과 같은 개념을 들 수 있다. 의학의 경우, 진단 역사 속에서 굳어진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을 구분해주는 개념들을 들 수 있다. 또 발견 맥락에 개입하는 지침서 중에는 과학의 여러 분야를 가로지르는 태도와 같은 것도 있다. 초자연적인 것을 가지고 자연적 현상을 설명하지 않겠다는 ‘자연주의적 태도’와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젬멜바이스는 초자연적인 것을 가지고 병리 현상을 설명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부 의사들은 제 1 병동 산모들의 높은 사망률을 교회 목사나 신부가 지나갈 때 제 1 병동에 크게 퍼지는 발소리와 연관시켰다. 목사나 신부의 발소리가 어떤 이유에서 타락한 산모의 영혼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었다. 자연주의적 태도를 가진 젬멜바이스는 처음부터 이러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 까닭에 과학적으로 검증 불가능한 가설을 사전에 배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젬멜바이스가 두 병동 사이의 산모 사망률 차이를 설명할 수 있는 올바른 가설을 세우는 데 결정적 단서는 친구 콜렛쉬카(J. Kolletschka)의 죽음이었다. 콜렛쉬카는 검시 과정에서 손에 상처를 입었다. 젬멜바이스는 그 상처에 주목했다. 그 상처는 그에게 의사들의 해부 및 검시와 산욕열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암시했다. 젬멜바이스는 친구를 직접 검시했다. 검시 결과는 산욕열에 의해 사망한 산모의 검시 결과와 매우 유사했다. 친구의 손에 난 상처, 검시 결과라는 설명 단서는 최초의 설명 단서, 즉 두 병동 사이의 기능적 차이와 정합적 관계를 맺는다. 이를 바탕으로 젬벨바이스는 하나의 가설을 세웠다.

 

• 의사들이 시체를 해부하거나 검시하는 과정에서 시체의 이물질이 의사들에게 옮겨졌고, 이렇게 의사에게 옮겨진 이물질이 제 1 병동의 산모들에게 옮겨졌다.

 

위의 가설은 젬멜바이스에게는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최소한 산욕열로 인한 제 1 병동의 산모 사망률이 제 2 병동에 비해 높은 사실은 위의 가설로 자연스럽게 설명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로부터 젬벨바이스의 가설이 검증된 것은 아니다. 젬벨바이스의 가설은 단지 설명을 요구한 주목 단서를 자연스럽게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는 그럴듯한 ‘개념적 장치(caonceptual instrument)’에 불과하다. 젬멜바이스는 자신의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제 1 병동에 근무하는 의사와 의대생들로 하여금 해부나 검시 후 반드시 염소로 처리된 석회수에 손을 씻고 산모들을 다루게 했다. 염소로 처리된 석회수는 소독약의 일종이다. 처음에는 의사들과 의대생들의 강한 반발이 뒤따랐다. 하지만 점차 젬멜바이스의 권고를 따르는 의사와 의대생이 늘어나면서 제 1 병동의 산모 사망률은 제 2 병동의 수준으로 급격히 떨어졌다. 이렇게 하여, 젬멜바이스의 가설은 의학의 유용한 개념적 도구가 되었다. 산욕열은 부패한 시체의 이물질뿐만 아니라 다른 원인에 의해서도 발생할 수 있다. 산욕열을 일으키는 실제 원인은 부패한 시체의 이물질이 아니라 연쇄상구균과 같은 세균이다. 이러한 사실의 발견이 젬멜바이스의 업적을 약화시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젬멜바이스가 왕성하게 활동했던 19세기 중엽 무렵의 과학기술은 질병과 세균을 대응시킬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젬벨바이스의 발견은 적어도 ‘의학의 과학화’의 한 장을 연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무엇보다도 그가 가설 검증을 위해 고안한 실험, 즉 소독법은 이후 병원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이러한 까닭에, 현대 예방의학을 논할 때 젬멜바이스의 발견이 언급되는 것이다.

 

가설 생성 추리와 관련하여 젬멜바이스의 발견 사례는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는가?

 

• 첫째, 추리를 여러 종류로 분류하는 것이 가능하더라도, 실제 인간의 추리는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두뇌에 연역, 귀납, 유추, 가설 생성 추리의 추론 패턴들을 각각 담당하는 영역은 없다. 다만, 논증 과정을 분석하여 그러한 식으로 추론 패턴들을 나누는 것은 인간의 사고방식을 연구하는 데 필수적이다. 사고 과정이라는 것은 관찰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 인간의 추리가 복합적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은 가설 생성 추리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젬멜바이스의 발견 사례는 가설 생성 추리의 순환적인 기본 패턴이라는 기본 틀을 보여주지만, 주목 단서에 근거하여 해결해야 할 문제를 설정하고 설명 단서를 찾아 가설을 생성해나가는 과정에는 여러 인지적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 둘째, 가설 생성 추리의 가설도 그럴듯한 결론이라는 점에서는 귀납과 맥(脈)을 같이 한다. 하지만 가설 생성 추리는 그 추론 패턴이 순환적이라는 점에서 ‘주어진 것으로부터의 추론’을 대표하는 귀납과 구분된다. 단서 추정법의 경우, 주목 단서와 가설을 연결해주는 설명 단서의 추출은 외적 요인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즉, 문제 해결에 효과적인 설명 단서의 발견에는 우연적인 운까지도 작용한다. 실례로 젬멜바이스는 친구의 우연한 사망 덕에 가설 생성을 위한 결정적 단서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한 결정적 단서의 발견이 가설 생성 추리의 추론 패턴에 내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럴듯한 가설 생성이 항상 추론 내적인 결과는 아니다. 반면, 귀납에서는 관찰 사실은 일반적으로 데이터의 자료로 활용될 뿐 그럴듯한 결론을 이끌어내는 보증 장치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이러한 까닭에, 논증 맥락에서 결론의 확실성을 추구한다는 점 외에는 연역과 귀납의 차이를 크게 부각시키지 않는 입장도 있다.

 

• 셋째, 가설 생성 추리는 기존의 지식 체계뿐만 아니라 삶의 방식에 급격한 변동을 불러오기도 한다. 여러 분야의 추상적 이론들은 단순히 전문가적 권위만을 상징하지 않는다. 그러한 이론들은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의 기반으로 작용하며, 또한 집단적 삶을 위한 인공 환경의 설계에도 필수적이다. 젬멜바이스의 발견 사례는 초자연적인 것이 질병을 일으킬 수 있다는 통념을 뒤엎게 되는 효시로 여겨질 수 있다. 그의 발견은 소독법을 사회에 확산시킴으로써 부분적으로나마 집단적 삶의 방식을 변화시킨 계기가 되었다.

   

 

 

5.

추리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세상에 대해 구조화된 지식 체계’의 성장과 함께한다. 추리 및 추론은 그러한 지식 체계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또한 기존의 지식 체계의 변동을 불러온다. 이러한 의미에서 ‘세상에 대해 구조화된 지식 체계’는 삶의 지도에 비유될 수 있고, 삶의 지도의 수정 과정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은 가설 생성 추리이다. 가설 생성 추리에 속하는 단서 추정법은 일상생활에서 실제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것이다. 시시각각 만나는 일상의 사소한 문제들이 단서 추정법에 의해 해결되는 까닭에, 그것을 ‘문제 해결의 논리’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연역과 귀납은 ‘세상에 대해 구조화된 지식 체계’를 바탕으로 주어진 데이터에서 확실하다고 여겨지거나 그럴듯한 결론을 이끌어내는 사고 활동에 속한다. 연역과 귀납은 이러한 의미에서 ‘주어진 것으로부터의 추론’을 대표하며, 그 추론 패턴은 데이터에서 결론으로 향하는 일방향성을 보여준다. 유비 자료의 부분적인 정보 및 관계들의 구조를 유비 표적에 전이시키거나, 유비 자료와 표적을 통합시켜주는 기능을 갖는 유추의 패턴은 순환적이다. 유추가 지식 체계의 변동에 영향을 미치는 정도는 연역이나 귀납보다 강하지만, 유추의 대부분도 ‘주어진 것으로부터의 추론’을 대표한다. 이에 반해, 가설 생성 추리는 데이터의 사실을 설명함으로써 기존 지식 체계의 유용성을 검토하는 기능을 갖는다. 세계의 해석과 관련된 이론 등은 새로운 사실의 발견만으로도 급격한 수정 요구를 받을 수 있는 까닭에, 가설 생성 추리를 빼먹고 과학적 발견 및 지식 체계의 변동을 설명한다는 것은 불충분할 수밖에 없다. 그럴듯한 가설을 생성함으로써 새로운 사실을 설명한다는 것은 문제 해결의 과정에서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에, 가설 생성 추리는 추론 외적 요인에도 의존적인 경우가 많다. 실례로 젬멜바이스가 절친한 친구의 죽음으로 인해 문제 해결의 단서를 찾았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보증 장치에 근거한 데이터와 결론의 내용적 연결성이 개방된 정도, 즉 추론 외적 요인이 개입하는 정도를 ‘개방성 O(Openness)’라 하고, 그 반대의 경우를 ‘추론적 조밀성 ID(Inferential Density)'이라 할 때 다음의 관계가 성립한다.

 

O(연역)≤O(귀납)≤O(유추)≤O(가추)

 

ID(연역)≥ID(귀납)≥ID(유추≥ID(가추)

 

이상적인 연역의 경우, 결론은 데이터와 보증 장치로 구성된 전제부에 내용적으로 함축되어 있다. 따라서 연역의 개방성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이에 반비례하여 연역의 추론적 조밀성은 ‘빽빽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이상적인 귀납의 경우, 데이터와 결론을 연결해주는 보증 장치에는 통념과 같은 것이 들어가게 된다. 귀납의 관찰은 주로 데이터와 관련되어 있는 까닭에, 귀납의 개방성은 사소하다. 그만큼, 귀납의 추론적 조밀성 정도도 높다. 유추에서 유비 자료와 표적을 통합 설명할 때 발상, 즉 아이디어를 얻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유추의 개방성 정도는 연역과 귀납보다 크다. 가설 생성 추리에서 가설 생성으로 인해 기존의 지식 체계에 변동이 일어나는 경우, 문제 해결 과정은 결코 추론적 사고에 국한되지 않는다. 가추의 개방성 정도는 그만큼 크며, 역으로 가추의 추론적 조밀성 정도는 낮아진다. 이러한 까닭에, 새로운 발견을 목표로 하는 모든 작업이 성공적이기 위해서는 개인 간 혹은 집단 간 교류에 의한 관심사의 거래 관계가 촉진되어야 한다. 발견을 존중하는 오랜 전통을 가진 나라에서 연구 공간에 ‘티타임(tea time)’제와 같은 여유 공간을 마련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가설 생성 추리 없이는 과학의 발달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가설 생성 과정을 논하지 않고 과학적 발견을 논할 수 없으며, 과학적 발견을 논하지 않고 과학의 발달을 논한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기 때문이다. 이를 체계적으로 밝힌 철학자를 들라면, 퍼스(C.S. Peirce)를 빼먹을 수 없다. 많은 문제는 이미 알려진 문제에 근거하여 해결된다. 가설 생성 추리에 해당하는 용어 ‘abduction'은 이미 알려진 것을 빌린다는 의미에서 ‘유괴’ 혹은 ‘납치’를 뜻한다. 하지만 모든 문제가 그러한 방식으로 풀리는 것은 아니다. ‘가설 생성 추리’라는 용어는 추측(guess)을 우연적인 것 혹은 신비한 것으로 여겨 발견의 논리가 불가능하다는 관점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태도에 기인한 것이다. 가설 생성 추리가 외부에 열려 있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은 결코 그것의 무작위성을 뜻하지 않는다. 발견 과정에서도 기본적인 추론 패턴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설 생성이 이론 수정 과정으로 이어지게 되는 경우, 추측은 ‘이론 구상(theory conjecture)’의 출발점이 된다.

 

그러나 가설 생성 추리가 과학적 발견 과정에만 국한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퍼스가 간과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럴듯한 가설 생성이 가설 생성자의 목적과 만족 수준에 의존적이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과학자가 아닌 까닭에, 가설 생성의 목적도 반드시 과학적 작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설명을 요구하는 사실에 의해 가설 생성 목적도 제한되는 것은 맞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동일한 사실이 가설 생성자의 관심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어 가설도 다르게 생성될 수 있다. 또 동일한 사실에 대해 어떤 이는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만, 다른 이는 설명을 요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혜성을 처음 본 사람들 중 어떤 이는 새로운 천구의 구조를 생각했다면, 또 다른 이는 종교적 해석을 가하기도 했다. 상호 주관적 의미에서 신뢰할만한 지식 획득만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 과학적인 것이 미적이거나 종교적인 것에 우선해야 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인간의 삶은 과학적인 것만으로 구성되지 않으며, 미적이거나 종교적인 것에 대한 긍정적 혹은 부정적 평가는 결코 과학적인 것에 종속되어 있지 않다. 그렇게 종속되어 있다고 믿는 것은 ‘세상에 대해 구조화된 지식 체계’를 폭 넓은 세계 이해 혹은 해석의 방식이 아니라 ‘정당화된 믿음 체계’와 같은 것으로 치부하는 선입관에 기인한 것일 뿐이다.

 

‘세상에 대해 구조화된 지식 체계’를 삶의 지도에 비유할 때 가설 생성 추리는 세상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아가는 인간의 운명을 반영한다. 인간의 삶은 그러한 지도를 찾기 위해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과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설명을 요구하는 새로운 사실을 비정상적인 것에 비유할 때 가설 생성 추리는 ‘비정상적인 것’을 어떻게 하든 ‘정상적인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다. 가설 생성 추리를 논했지만, 우리가 살펴본 것은 단지 그것의 추론 패턴일 뿐이다. 가설 생성 추리를 가능케 하는 능력이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규명되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가설 생성 추리와 유사한 사고 활동이 ‘정상적인 것’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만드는 과정, 실례로 패러디(parody)를 만드는 과정에서도 발견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란 결국 비정상적인 것을 정상적인 것으로, 정상적인 것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만드는 게임의 연속으로 규정하여도, 이에 대해 쉽게 이의를 제기하기 힘들다. 문제 해결을 위해 생성된 가설이 가설 생성자의 만족 수준에 도달해도, 그의 안정적 심리 상태는 삶 전체를 통해 지속될 수 없다. 따라서 가설 생성 추리를 삶의 지도에 비유할 때 그것의 기능을 심적 안정화와 관련시키는 것은 무의미하다. 가설 생성 추리의 개방성으로 인해 가설은 대부분 새로운 가설을 요구하는 문제를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비정상적인 것을 정상정적인 것으로, 정상적인 것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만드는 게임을 가능케 해주는 능력은 여전히 신비에 쌓여 있다. 가설 생성 추리는 적어도 그러한 능력에 대해 의심하는 것이 부자연스러운 것임을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난제를 만난다.

 

• 삶의 지도에 비유되는 ‘세상에 대해 구조화된 지식 체계’는 고정된 것은 아니지만 무작위로 형성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와 원시 인류 사이에서도 그러한 지식 체계는 유사성을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지식 체계에서도 분명히 집단 간 차이가 나타나며, 또 개성(個性)도 무시될 수 없다. ‘세상에 대해 구조화된 지식 체계’의 역동성은 어떻게 분석되어야 하며, 또 ‘비판적 사고(critical thinking)’전반에 걸쳐 무엇을 시사하는가?

 

형식 추론을 둘러싼 논쟁거리들을 살펴본 후 위 난제를 다룰 것이다. 얼핏 생각하기에 위 난제는 비판적 사고와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위 난제와 관련하여 비판적 사고를 진지하게 연구한 작업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 난제에 답하는 것은 비판적 사고 교수법 설계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우리의 관심사를 형식 추론 분야로 옮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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