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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공유를 가로 막는 정치가들: 화학적 거세 위헌 논쟁

착한왕 이상하 2015. 5. 8. 02:05



우리는 정당 민주제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선거를 통한 다수 정당이나 인물들이 국회와 정부를 구성하여 입법 및 정책을 결정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를 대립된 관계로 배우지만, 모두 '사회의 정치 영역에 별도의 직업 정치가들을 허용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직업 정치가들 중심으로 정치가 진행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만약 정치가들이 기득권화되거나 무능하다면 어떻게 될까? 이 사회는 제대로 굴러 갈 수 없다. 정치가들이 기득권 행세를 하는 것은 누구나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치가들의 역량을 평가하는 방법은 무엇일까?'라는 물음이 중요해진다.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 먼저 현대 사회에서 정치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를 알아야 한다. 그것은 다음이다.


서로 다른 영역의 지식을 소유한 사람들이 문제를 공유하도록 만들라!


만약 입법을 담당하는 정치가들이 '문제를 공유하도록 하는 조건'을 생성해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무능하다. 불행히도 진보, 보수, 여야막론하고 현재 이 땅의 정치가들은 무능하다. 그들의 일처리 방식을 보면, '프로페셔널'하다고 볼 수 있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현재 정치가들이 유능했었다면, 이 번 화학적 거세를 둘러싼 위헌 논쟁은 벌어지지 말아야 했다. 이 번 논쟁은 지방 법원이 '강제적으로 성범죄자를 화학적 거세시키는 법안'에 대해 위헌 소송을 낸 특수한 경우이다. 만약 정치가들이 유능했더라면, 그 논쟁은 '성범죄자를 대상으로 한 치료 범위'에 대한 논쟁이 되었어야 했다. 왜 그런지 알아보자.


'화학적 거세'라는 용어는 자칫하면 '화학적 방법을 사용해 성범죄자 성기능을 제거시킨다'는 식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것은 단지 화학적으로 성호르몬을 억제시키는 것을 뜻한다. 


성범죄자의 재발을 막기 위한 방법을 논할 때, 적어도 두 영역의 전문가들이 필요하다. 한 영역은 의학이며, 다른 영역은 법학이다. 어느 영역의 전문가든, 화학적 거세가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에 성범죄자를 대상으로 반드시 화학적 거세를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


일부 의사들은 심리 치료와 함께 화학적 거세를 병행할 수 있다고 본다. 즉, 화학적 거세는 성범죄 재발을 막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성범죄자의 동의는 필요하다는 데 의사들은 동의한다. 이러한 동의를 전제하고, 법학자들은 성범죄 재발을 막기 위해 화학적 거세 방법도 사용할 수 있는지를 의사들과 논하게 된다.


성범죄자의 동의나 요청 하에 화학적 거세법을 '재발 방지 차원의 치료법'으로 허용한 나라들이 있다. 실례로 폴란드, 이스라엘, 뉴질랜드, 아르헨티나, 이스라엘 등이 있다. 정치가들은 문제가 터질 때마다 국외 사례를 들먹인다.


1. 정치가들은 화학적 거세 허용안을 논할 때 국외 사례들을 찾아 보았는가? 아니다. 관련 국외 사례들을 찾아 보았다면, 강제적으로 화학적 거세를 시행하는 법안을 상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2. 정치가들은 화학적 거세 허용안을 논할 때 의학 및 법학 영역 전문가들의 의견을 충분히 경청했는가? 그렇게 경청했더라면, 강제적으로 화학적 거세를 시행하는 법안을 상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성범죄자의 자기결정권을 무시하면서까지 화학적 거세를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의사나 법학자는 거의 없다. 더욱이 화학적 거세가 성범죄자의 재발을 막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믿는 의사는 없다. 화학적 거세는 부작용을 수반할 뿐더러, 그 치료의 효과성도 아직 충분히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정치가들이 화학적 거세 허용안을 논할 때 국외 사례 및 전문가들의 의견을 충분히 검토했더라면, 성범죄자 치료 범위에 화학적 거세를 집어 넣을 것인가를 핵심으로 법안이 상정되었을 것이다. 화학적 거세가 단순한 형벌 차원이 아니라 치료 차원에서 허용되는 경우, 당연히 성범죄자의 동의는 필수적이다.


성범죄, 특히 아동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가 늘어 나면서, 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범죄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길 원한다. 나도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이다. 그런데 살펴보았듯이, 화학적 거세를 그러한 처벌 맥락에 집어넣은 나라는 이 곳밖에 없다. 결국 '성범죄자의 자기결정권이네 인권이네 뭐니 등을 들고나오는 집단'과 '처벌적 정의를 들고나오는 집단' 사이의 해소 불가능한 갈등만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정치가들이 유능하다면, 입법을 단순히 그들의 결정 권한으로만 파악해서는 안 된다. 입법과 관련된 문제를 관련 지식 소유자들이 공유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한 공유를 바탕으로 한 토론을 통해 화학적 거세 허용안이 나왔더라면, 당연히 성범죄자의 동의 조건도 들어갔을 것이다.


이 나라 정치가들은 무능하다. 국민 세금을 월급으로 받는 직업 정치가는 프로페셔널해야 한다. 그런데 이 나라 정치가들은 아마츄어들이다. 화학적 거세 허용안을 보면, '재발 방지'라는 목적이 명시되어 있다. 성범죄 재발을 막겠다는 것은 단순히 처벌의 맥락에 종속되지 않는다. 그것은 엄격하게는 치료의 맥락에 속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치료 행위는 범죄자에 대해서도 일방적으로 강제권을 가질 수 없다. 이것은 헌법 해석만으로도 나오는 것이다. 무능한 정치가들은 두 맥락도 구분하지 못한 채 주먹구구식 화학적 거세 허용안을 상정한 것이다. 그 결과, 일어날 필요도 없는 이 번 위헌 소송이 진행되게 된 것이다. 그것도 법원이 소송 주체가 된 것이다.


무능하다 못해 무식한 직업 정치가들이여, 대중의 분노를 이용해 환심을 사고싶으면 차라리 아동 성범죄자에 대한 법적 처벌을 강화하라.


이 땅의 직업 정치가들이 하는 행태를 보면, 그들은 없어도 될 것 같다. 차라리 제비뽑기로 뽑힌 시민들이 1년 단위로 돌아가면서 입법과 정책 결정을 하도록 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이 나라 정치가들, 아니 정치꾼들을 보면, 주변에 죄다 사기꾼들이 맴도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렇게 무능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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