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동물: 세계들과의 조우/Lecture 1

인간과 동물 1. 목적(수정)

착한왕 이상하 2015. 6. 30. 00:52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인간과 동물 사이의 유사성 혹은 차이점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은 자연에서의 인간의 위치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기도 하다.

 

이 작업의 목적은 인간과 동물에 대한 여러 관점들을 비교하여 다음의 결론을 이끌어 내고 구체화하는 것이다.

 

인간 삶의 한 측면은 세계들과의 조우이다. 인간의 사회에 국한되지 않는 인간과 동물들의 관계에 대한 기본적인 세계들은 과거에나 현재에나, 그리고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원형적 세계들이다.

 

인간과 동물들의 관계에 대한 원형적 세계들은 한 장소에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각 원형적 세계는 특정 삶의 조건들에서 생성되어 삶의 방식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각 원형적 세계는 유사한 삶의 조건에 처한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생활환경이 다양한 조건들로 중첩되어 있으면 있을수록 인관과 동물의 관계에 대한 여러 원형적 세계들과 조우하게 된다.

 

원형적 세계들 중 무엇을 선별할지는 개인의 선택 문제이다. 과학 및 기술 체계가 그러한 원형적 세계들 중 올바른 것을 선별해 줄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그러한 생각은 사방전후(四方前後)로 제한된 인간의 한계을 부정하는 것이다.

 

과학 및 기술 체계의 역할은 세상을 유지시키기 위해 선택할 수밖에 없는 조건들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는 동시에 삶을 촉진시키는 것이다.

 

이 작업에서 세계세계를 이해하는 방식과 동등한 의미로 사용되는 개념이다. 굳이 후자의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에서 세계는 단순히 모든 가능한 것을 포함한 우주혹은 인간의 개입과 무관하면서도 그 개입을 허용하는 없는 우주의 상태로서의 자연을 뜻하지 않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세계는 우주 혹은 자연을 해석하기 위한 개념 틀과 같은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플라톤의 세계,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 신유학(新儒學)의 세계, 인간들의 관계에 대한 세계,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대한 세계 등을 언급할 수 있다.

 

플라톤은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친숙한 대상들보다는 그것들을 하나로 묶어 주는 형상을 가정하고, 형상들을 궁극적 실재로 간주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의 세계를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이와 유사하게, 모든 사람은 셈 능력을 갖고 있지만, ()의 세계가 정말 있는지는 지금도 논쟁 중이다. 심지어 숫자가 없는 언어도 있다. 그러한 언어를 사용하지 않아 셈 능력을 양적 비교에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수의 세계란 이해할 수 없다는 점에서 터무니없는 것이다. 따라서 숫자라는 기호 사용 없이는 셈 능력만으로는 수의 세계를 가정할 수 없다.

 

기호 사용 능력의 어떤 측면에서 수를 가정할 수 있게 되었을까?’라는 주제는 수의 세계가 정말 있는지라는 물음보다 논리적으로 선행하는 것이다. 그 주제가 수의 세계를 둘러싼 철학적 논쟁에서 도외시 되는 점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어쨌든 세계 없이는 우주나 자연은 인간의 해석 대상이 될 수 없다. 이 점에서 세계는 적어도 개념적 측면에서 우주나 자연보다 더 큰 것이다.

 

세상특정 세계들이 투영된 현실을 뜻한다. 분명히 우리는 한 세상 속에 살고 있다. 정치적 제도와 관련된 어떤 세계, 사물의 분류와 관련된 어떤 세계, 행위와 관련된 어떤 세계들의 중첩 없이는 현실이라는 것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미 인간의 삶의 한 측면은 세계들과의 조우임을 엿볼 수 있다.

 

짧은 분량 속에서 이 작업의 결론에 도달하려면,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대한 세계들, 그것도 삶의 조건들에서 생성되어 삶에 영향을 미치는 원형적 세계들을 다루는 방법론이 필요하다. 그러한 방법론을 밝히기 전에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대한 잘못된 관점 하나를 지적하자. 그러한 지적을 통해 앞서 밝힌 이 작업의 결론이 어렴풋이나마 드러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