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동물: 세계들과의 조우/Lecture 1

인간과 동물 4. 속성 존재론의 문제(철학자는 안 보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음)

착한왕 이상하 2015. 7. 17. 23:12

 

 

개별적 대상들을 서술하는 방식이 반드시 주어와 술어의 문법적 구조를 전제하는 것은 아니다. 명사들로만 구성된 언어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말도 주어와 술어의 문법적 구분을 갖고 있는 언어이다. 하지만 우리말이 주어와 술어의 엄격한 논리적 구분을 갖고 있다고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반면에 영어, 불어 등 인도유럽어족 대부분의 언어들은 그러한 논리적 구분을 갖고 있다. 주어와 술어의 문법적 구분이 아닌 엄격한 논리적 구분이란 무엇인가? 그러한 논리적 구분을 갖는 언어는 다음을 만족한다.

 

(i) 엄격한 의미에서의 논리적 주어는 특정 개별적 대상을 지칭한다.

 

(ii) 모든 개념 F는 논리적 술어 ‘x is F’, F(x)로 대체 가능하다. ‘x’는 개별적 대상을 지칭하는 임의의 논리적 주어를 나타낸다. 이때 논리적 술어 F(x)’는 속성 F를 함축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한 속성 FF 그 자체(being F)’ 혹은 F를 갖는 것(having F)’ 등을 들 수 있다. 실례로 ‘dog’이라는 개념은 Dog(x)’라는 논리적 술어로 대체 가능하며, ‘Dog(Waldo)’‘Waldo is a dog’이라는 단순 진술을 뜻한다. ‘Dog(x)’라는 논리적 술어는 개 그 자체(being a dog)’라는 속성을 함축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iii) 논리적 주어와 속성을 결합하는 기능을 갖는 특별한 동사, 실례로 ‘be’ 동사와 같은 것이 있다. ‘a’가 특정 개별적 대상을 뜻할 때, ‘F(a)’a와 속성 F‘be’ 동사에 의해 결합한 논리적 구조를 갖는다F(a)’에서 ‘be’ 동사가 숨겨진 이유는 논리적 주어와 속성을 결합하는 방식이 주어의 대상은 속성을 만족한다는 식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iv) 주어와 술어의 문법적 구분을 가진 언어들의 표현 방식은 다양하며, 이는 주어와 술어를 연결하는 방식의 다양성으로 나타나며곤 한다. 이 점은 동일 언어에도 해당한다. 실례로 F(a)’가 문법적 차원에서 표현되는 방식은 다양하다. 이렇게 다양하게 표현되는 진술들 모두가 F(a)’의 형태로 귀결되는 경우, 그 진술 모두는 '대상과 속성의 구분에 따른 동일 내용', 즉 '명제(proposition)'로 취급된다.

 

주어와 술어의 엄격한 논리적 구분을 갖는 언어의 경우, 하나의 범주 개념에 대해 외연뿐만 아니라 특정 속성을 가정할 수 있게 된다. 이때 그러한 속성이 있다고 가정하는 경우, 그러한 속성은 해당 개념의 외연에 속하는 개별적 대상들과 존재론적으로 분리될 가능성을 갖는다. ‘푸름 그 자체’, ‘개 그 자체등의 속성은 푸른 특정 나뭇잎, ‘땡칠이라 불리는 특정 개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구체적 특징들이 아니다. 그 어떤 푸른색도, 그 어떤 개별적 개도 푸름 그 자체’, ‘개 그 자체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속성이란 무엇인가? 어떤 철학자는 그저 언어적으로 가정된 것에 불과하거나 개념과 동일한 것이라고 말한다. 다른 철학자는 개별적 대상들에 잠재된 것이거나 그 대상들의 시공간성을 초월한 것으로 실재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사실만으로도 속성 존재의 문제는 서양 철학사 전체에 걸쳐 있으며, 인도유럽어족의 구조에 기인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주어와 술어의 엄격한 논리적 구분을 갖는 언어는 사람들로 하여금 속성들이 있다는 속성 존재론으로 유혹한다. 속성 존재론을 받아들이면, 개별적 대상들과 외연의 관계는 원소 대 집합의 관계로 해석된다.

 

F(a)’ , ‘a is F가 참인 경우, 개별적 대상 a는 속성 F를 만족한다. 이 점은 ‘a{x|F(x)}’로 표현된다. aF(x)’를 만족하는 논리적 집합 {x|F(x)}의 원소라는 것이다.

 

위 해석에 따르면, 개라는 범주 개념의 외연은 논리적 집합 {x|Dog(x)}이다. 이때 그 외연을 구성하는 원소들인 개별적 개들은 개 그 자체라는 속성과 분리되어 다루어질 수 있는 것들이다. , 집합 {x|Dog(x)}에 속하는 특정 개는 그 논리적 집합과 교차하지 않는 다른 집합의 원소가 될 수도 있다. 이 점은 집합론에서 두 집합의 합집합을 구성하기 위한 조건이기도 하다.

 

대상을 서술하는 방식에서 모든 언어가 주어와 술어의 엄격한 논리적 구분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주로 명사들로만 구성된 언어를 생각해 보자. 그러한 언어의 기본적 형태는 ‘xY’이다. ‘x’에 개별적 대상을 지칭하는 고유 명사가 들어간다면, ‘Y’에는 그러한 대상을 서술하는 일반 명사가 들어간다. 실례로 땡칠이는 우리말의 땡칠이는 개다에 대응된다. ‘xY’에서 ‘x’‘Y’ 모두 명사이기 때문에, 전자와 후자가 논리적 주어와 술어로 이분되고, 전자와 후자가 지칭하는 것이 존재론적으로 분리될 가능성을 갖는다고 주장할 수 없다. ‘xY’의 관계는 원소 대 집합의 관계가 아니라, 벽과 벽의 일부 혹은 팔과 팔의 일부로서의 손처럼 전체 대 부분의 관계로 해석될 여지가 크다.

 

원소 대 집합의 관계에서 원소는 집합과 분리되어 다루어질 수 있다. 한 집합이 다른 집합의 원소가 되는 경우, 전자의 집합에 속하는 원소가 후자의 집합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반면에 부분 대 전체의 관계에서 부분은 전체와 분리되어 다루어질 수 없다. 한 전체가 다른 전체의 부분인 경우, 전자의 부분은 후자의 부분이 된다. 이 점에서 원소 대 집합의 관계를 함축하는 속성 존재론부분 대 전체의 존재론은 확연히 다르다.

 

주어진 범주 개념에 대해 개별적 대상들과 외연의 관계는 속성 존재론에 따라 해석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부분 대 전체의 존재론에 따라 해석되어야 하는가?

 

존재론도 세계의 일종이다. 그것을 바탕으로 무엇으로 규정해 분류하기 때문이다. 존재론이라는 세계의 구성이 언어의 논리적 구조에 영향을 받는다면, 그리고 그러한 구조가 다양하다면, 위 물음은 대답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대답하라고 강요하는 것과 같다. 이 점은 원형적 세계들이 인간의 근본적 한계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논할 때 분명해질 것이다.

 

어떤 개념의 외연에 대해 논할 때, 그 외연은 특정 개별적 대상들의 모임이다. 여기서 모임은 속성 존재론에 따라, 혹은 부분 대 전체의 존재론에 따라 해석될 수 있다. , ‘모임은 특정 존재론을 전제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외연들의 관계로 해석하는 경우, 그러한 존재론들과 마주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외연들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은 대상을 무엇으로 규정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외연들의 관계가 아닌 느슨한 내연적 공간들의 관계로 접근하려는 것이다.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외연 자체는 개별적 대상들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 혹은 공유하는 믿음들과 직접적 연관성을 맺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렇게 알고 있는 것 혹은 공유하는 믿음들은 외연의 경계를 설정하는 데 필요할 뿐, 그 경계 속에 드러나 있지 않다. 간단히 말해, 개념은 외연 속에 들어 있지 않다.

 

우리말은 주어와 술어의 문법적 구분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말은 인도유럽어족의 언어들처럼 주어와 술어의 엄격한 논리적 구분도 갖고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해 긍정적으로 답할 수 있다면, 우리말도 (i)~(iv)와 같은 조건들을 만족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보기는 힘들다. 개별적 대상들의 분류 방식에만 국한해 생각하는 경우, 주어와 술어의 엄격한 논리적 구분을 갖는 언어의 표현 유형은 다음과 같다.

 

‘Waldo is a dog’, ‘Waldo is white’, Waldo has a tail’ 등은 Be(Waldo, being a dog)Be(Waldo, being white)Be(Waldo, having a dog)’의 논리적 구조 ‘Be(a, F)’를 보여 준다. 술어에 함축된 속성과 주어를 결합시켜 주는 ‘be’ 동사의 기능은 마치 수학의 연산자 기능과 비슷하다.

 

우리말의 땡칠이는 개다에서 ‘...’의 기능을 문법적으로 ‘be’ 동사의 기능에 대응시켜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위의 의미에서 땡칠이라는 개별적 대상과 개 그 자체라는 속성을 결합시키는 기능을 갖는다고 단언할 수 없다. 그 진술을 ‘Be(a, F)’의 형태로 단순화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점은 땡칠이는 개다’를 부정하는 경우에 더욱 명확해진다. ‘Waldo is a dog’의 부정은 ‘Waldo is not a dog’이며, 후자의 진술은 논리적 구조 Not[Be(a, F)]’를 보여 준다. 땡칠이는 개가 아니다를 그렇게 단순화시킬 수 있는지는 나로서는 의심스럽다. 그렇게 단순화시킬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우리말에서 표면적 구조와 심층적 구조가 있다고 가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심층적 구조가 인도유럽어족 언어의 논리적 구조를 반영하고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 그러한 증명을 나는 본적이 없다.

 

우리말은 인도유럽어족의 언어들처럼 주어와 술어의 엄격한 논리적 구분을 갖고 있는가? 그러한 논리적 구분이 우리말에 있다면, 플라톤의 형상들과 같은 것이 우리 대다수에게 자연스럽게 다가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말의 특성들과 자연스럽게 연관되는 존재론은 무엇인가? 우리말의 논리학이라는 것은 무의미한 것인가?

 

위 물음을 진지하게 다룬 체계적 연구들은 거의 없다. 그러한 연구가 설령 있다고 해도 소외받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말로 철학을 한다는 것은 그저 우리말로 쉽게 푼 서양 철학’, ‘우리말로 쉽게 읽는 누구와 같은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을 변화시킬 조짐조차 보이지 않는다면, 철학이라는 학문을 이 땅에서 없애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한 조짐조차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철학은 철학자들에게는 전문성을 획득해 그럴듯한 지위와 명성을 차지하기 위한 수단이며, 일반 사람들에게는 남에게 과시를 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래서 묻고 싶다.

 

도대체 어떤 목적으로 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를, 칸트의 세계를 혹은 공자의 세계를 알고 싶어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