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동물: 세계들과의 조우/Lecture 1

인간과 동물 2. 받아 들이기 힘든 관점, 철학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 필요성 암시(수정)

착한왕 이상하 2015. 7. 8. 02:50

 

 

모두가 합의할 수 있을 정도로 관점을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방식에 따라 관점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으로 이해할 때, 그것은 이미 세계를 함축하고 있다. ‘관점은 경우에 따라서는 비교를 바탕으로 한 어떤 관계에 대한 입장을 뜻하기도 한다. 따라서 관점세계보다 더 탄력적으로, 더 폭 넓게 사용되는 개념이다.

 

인간과 동물에 대한 관점은 특정 세계혹은 두 세계를 비교하여 이끌어 낸 특정 입장일 수도 있다. 이 작업의 목적에 비추어 받아들일 수 없는 후자의 관점 하나가 있다. 그 관점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는 논의가 진행되면 될수록 분명해질 것이지만 여기서 미리 밝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관점을 간략히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세계들과의 조우하는 인간 삶의 측면이 어렴풋이나마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 관점은 다음과 같다.

 

<검토 대상의 관점 하나>

특정 영혼론에 근거해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강조하는 아퀴나스(R. Descartes)의 세계와 진화론에 근거해 그들의 유사성을 강조하는 다윈(C. Darwin)의 세계를 비교할 때, 과거에는 전자가 우세했다. 하지만 과학이 발전하면서 전자의 세계는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후자의 세계에 따르면, 인간과 동물은 능력의 측면에서 상대적 차이만 보일 뿐이다. 동물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고통을 피하려는 자연적 성향을 갖고 있다. 동물도 주변 환경을 각자의 생존에 유리하도록 변형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따라서 동물도 인간의 도덕적 판단의 범위 내로 집어넣어야 한다.

 

이 작업에서 보게 될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대한 원형적 세계들은 아퀴나스의 세계, 다윈의 세계와 같은 것들이 아니다. 그 원형적 세계들은 설명 체계로서 구체화된 세계들에서 엿볼 수 있는 것들이다. 이때 원형적이라는 것은 선사 시대의 사람조차 누구나 삶을 통해 조우할 수 있는 그런 것이다. 아퀴나스가 살던 시대의 다수 민중들의 삶에서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대한 어떤 원형적 세계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러한 원형적 세계는 기독교의 교리, 그리고 그 교리를 정당화하려는 동기에서 만들어진 아퀴나스의 세계에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그러한 원형적 세계는 기독교가 아닌 종교에도 반영되어 있다. 역시 다윈의 세계에서 발견 가능한 원형적 세계는 진화론과 다른 이론들에도 배어 있다. 더욱이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대한 원형적 세계들 중 어느 하나가 종교 등과 맞물려 다수의 추종자를 갖는다고 해서, 다른 것들이 완전히 묻히게 되거나 기능을 하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대한 특정 원형적 세계와의 조우를 <검토 대상의 관점 하나>와 같은 어떤 관점에 기대어 삶에서 단절시킬 수 있다거나, 더 이상 수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요할 수 없다. 그러한 강요는 완전히 객관적일 수도 주관적일 수도 없는 삶의 경험에 우선적으로 근거하기 때문이다.

 

남편이 죽고 나서 계속 집안에 좋지 않은 일이 생겨 친척들의 권유로 어쩔 수 없이 굿판을 연 부인이 있다고 하자. 그녀는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는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그랬던 그녀는 무당이 건네준 나무에 이리저리 이끌려 다닌 경험을 한 후 그러한 영혼의 세계와 조우했다. 그리고 정말 그러한 세계가 있는지를 놓고 고민했다. 과학 등에 기대어 그러한 세계의 실재성을 부정할 수 있지만, 과학이 그녀의 고민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 갑자기 비명사한 부인의 영정 앞에서 남편은 세상이란 허무한 것을 넘어서 불공평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적어도 인간에게는 사후 세계가 있다고 믿기로 했다. 그는 사후의 세계와 관련된 세계와 조우한 것이다. 그리고 그 세계의 모습을 놓고 고민했다. 그 어떤 관점도 그의 고민을 그에게서 무의한 것으로 만들 수 없다. 만약 그것이 그렇게 무의미한 것이라면, 인간은 삶뿐만 아니라 죽음 앞에서도 불평등한 존재가 되고 만다.

 

물론 모든 세계들이 선별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 모든 세계들이 세상 속에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이란 모든 세계들이 아니라 특정 세계들이 투영된 현실이기 때문이다. 인간과 동물에 대한 원형적 세계들은 거의 모든 세상에 허용될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원형적 세계들은 옳고 그름의 판단 범위에서 벗어나 있다. 반면에 히틀러의 세계가 다시 이 세상에 허용되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 점은 철학의 특정 관점에서 나온 어떤 실천의 보편적 당위성의 결론이 아니다. 그러한 관점이 있다고 해서 실천이 그것에 부합하도록 진행되는 것은 아니며, 히틀러 이전의 상당수 철학자들의 관점은 오히려 그 세계에 부합하는 측면을 띠고 있었다. 소위 교양이라는 것에 유혹된 많은 사람들이 관심있어 하는 근대 철학자들 중, 인종주의 관점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인물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종주의는 히틀러의 세계와 밀접한 연관성을 맺고 있었던 관점이다.

 

세상을 구성하는 사회는 개인들의 거래 관계 및 범위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의 구조적 연결 방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한 구조적 연결 방식이 히틀러의 세계에 종속되는 경우, 해당 사회뿐만 아니라 다른 사회까지도 파괴된다는 사실을 인류는 경험했다. 간단히 말해, 히틀러의 세계는 세상을 파괴시킨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을 망각하지 않는 한, 히틀러의 세계는 권장될 수 없는 것이다. 이를 은유적으로 표현한다면, 히틀러의 세계는 역사라는 여과기에서 허용되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걸러진 것이다.

 

히틀러의 세계는 개인들의 거래 관계 및 범위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의 구조적 연결 방식에 관한 것이다. 그러한 구조적 연결 방식에 대한 세계들은 선사 시대 사람들도 누구나 생각해 볼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 세계들은 집단들의 관계 속에서 집단을 유지하려는 사유의 실험들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인간과 동물에 대한 원형적 세계들은 그러한 의도적 사유의 실험들과 직접적 관계를 맺지 않는다. 그 원형적 세계들은 앎과 무관하게 누구에게나 나타날 수 있는 그런 것이다. 그 원형적 세계들 중 무엇이 그에게 나타나는 가는 그가 처한 삶의 환경에 의존적이다.

 

원형적 세계들 중 하나가 종교적 교리로 구체화되어 사람들을 지배하는 경우, 그러한 종교적 교리의 세계와 그 원형적 세계의 관계는 필연적인 것이 아니다. 그 원형적 세계는 다른 방식으로 구체화될 수 있으며, 또 그 구체화 과정은 개인들의 거래 관계 및 범위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을 고려하는 것과 맞물릴 수밖에 없다. 물론 그것들을 고려하는 것이 인간과 동물에 대해 생각해 보는 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러한 생각이 인간과 동물에 대한 특정 관점으로 구체화된 경우, 그러한 관점은 어떤 원형적 세계가 아니다. 어떤 원형적 세계는 단지 그러한 관점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일 뿐이다.

 

역사라는 여과기를 통해 긍정적 혹은 부정적인 것으로 걸러지길 거부하는 원형적 세계들은 인간의 근본적 한계에서 기인하며, ‘인간의 근본적 한계는 자연과 세상을 이해하면 할수록 터무니없는 것으로 만든다. 이 점은 인간과 동물에 대한 원형적 세계들을 소개하고 분석한 후에 다룰 것이다.

 

<검토 대상의 관점 하나>특정 세계로부터 실천의 보편적 당위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의 사례이다. 그런 사고방식은 인류가 아직까지 붕괴시키지 못한 지배 구조, 권력을 가진 소수 대 대수의 지배 구조의 상부를 차지하려는 소위 배웠다는 자들에게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다양한 정치 체제 형태를 통해 반복되어 나타난 그 지배 구조는 제거할 수 없는 개인차에서 기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아예 여기서 더 나아가 개인차에 따른 불평등이 사회를 발전시키는 촉진제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이 특정 세계로부터 실천의 보편적 당위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을 정당화해 주는 것은 아니다.

 

<검토 대상의 관점 하나>는 과학의 이름으로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관점이 아니다. 그 관점의 결론, 인간의 도덕적 판단이 반드시 동물도 포함하도록 확대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 관점에서 선호된 세계와 필연적 연관성을 맺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결론은 과학의 다른 분과, 실례로 생리학이나 생태학과도 연관성을 맺을 수 있다. 과학은 하나가 아니라 다양한 분과들의 다발체이며, 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과학의 역사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 역사는 분과들이 늘어나고 그 관계가 복잡해져 온 과정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검토 대상의 관점 하나>에서 선호된 세계를 전혀 다른 결론과 연관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인간의 도덕적 판단에서 종족 보존을 우선시 하는 것이 그 관점에서 배제되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관점에서 부정된 세계가 반드시 그 관점의 결론에 반하는 것으로 귀결되는 것도 아니다. 그 관점에서 부정된 아퀴나스의 세계는 중세 존재 사슬(chain of beings)’의 세계와 맞물려 있어 오히려 그 관점의 결론을 수용하라고 강요하는 측면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업의 목적을 달성하려면, 다음의 물음들을 다루어야 한다.

 

첫째,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대한 원형적 세계들로 어떤 것들이 있는가. 그러한 세계들이 원형적이라 불릴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둘째, 인간의 근본적 한계는 어디서, 어떻게 나타나는가? 그러한 한계가 원형적 세계들의 모태(母胎)가 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셋째, 인간 삶의 한 측면이 원형적 세계들을 포함한 다양한 세계들과의 조우라는 평범한 사실은 어떤 이유에서 지금까지의 지식의 역사에서 잘 드러나지 않았던 것일까? 삶을 촉진시킬 수 있는 과학 및 기술 체계의 역할은 어떻게 한정되어야 하는가?

 

세 번째 물음과 관련하여 누군가 다음과 같은 반문할 것이다.

 

삶을 촉진시킬 수 있는 철학의 역할을 다루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 삶의 한 측면은 다양한 세계들과의 조우라는 평범한 사실이 정말 인류사에서 최근에 들어서야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라면, 다양한 세계들과 조우하는 삶의 측면에서 과학, 기술 체계, 철학 등의 기능 및 정의 방식을 재평가해 보는 것은 당연하다. 세 번째 물음을 다룰 때 보게 되듯이, 과학 및 기술 체계의 기능 방식에 대한 재평가가 그것들에 대한 전통적 정의 방식마저 송두리째 뒤바꾸어 버리지는 않는다. 이 점은 철학에 대해서는 그대로 적용될 수 없다. 이 사실 정도만 이 작업에서 암시될 것이다.

 

다양한 세계들과 조우하는 삶의 측면에서 철학의 기능 및 정의 방식을 재평가하고, 삶을 촉진시킬 수 있는 철학의 역할은 이 작업 이후의 작업 <삶의 의미: 세상의 그림들>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어쨌든 지금까지의 논의만으로도 인간 삶의 한 측면을 다양한 세상들과의 조우로 파악하는 나의 동기는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덧글:

학계들 버린 사람이 학계의 글쓰기 방식, 즉 논문이나 연구서 글쓰기 방식을 고집할 이유는 없다. 그러한 글쓰기 방식은 현재 윤색 중인 개인 원고 <세속화: '저기'와 '여기'>를 마지막으로 '굿바이'이다. 물론 그 원고도 논문 및 연구서 글쓰기의 전형적 방식에서는 어느 정도 벗어나 있다. 새로운 작업 <인간과 동물: 세계들과의 조우>는 공식적으로 그러한 글쓰기 방식에서 벗어남을 선언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인간과 동물: 세계들과의 조우>은 <삶의 의미: 세상의 그림들>, <자연과 나: 관심과 무관심>과 함께 삼부작을 이룬다. 여기에는 <인간과 동물: 세계들과의 조우>의 초벌만 올린다. 어느 정도 완성 단계에 들어가면 봉인시킬 것이다. <인간과 동물: 세계들과의 조우>에서 그나마 논문이나 연구서 글쓰기 방식이 나타나는 부분은 '본문'이 아니라 '부록'들이다. 그러한 부록들로 <서양 철학의 영혼 개념에 대한 두 뿌리>, <서양 철학사에서 영혼과 마음의 관계>, <칸트 형이상학의 영혼: 하나 또는 다수>, <동북아 사상에 성양의 마음과 같은 개념이 없는 이유> 등을 들 수 있다. 부록으로 들어가는 글들 중 몇 개는 여기에 올릴 것이며, 원고가 완성 단계에 접어 들어도 봉인시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