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 에세이/인지와 경험

제한적 합리성(Bounded Rationality)

착한왕 이상하 2016. 3. 11. 20:23

* 다음은 10여 년 전에 발표했던 논문의 일부를 수정한 것이다. 당시 글쓰기 능력이 개판이라 일부 수정만으로는 가독력을 충분히 높이기 힘들다. 그럼에도 이 글을 올리는 이유는 최근 구글 알파돌과 이세돌의 바둑 대국을 놓고 직관에 대한 어처구니없는 말들이 신문 및 방송에 돌기 때문이다. 어이없게도 소위 전문가들이 그런 말을 해대기 때문이다. 더욱 한심한 것은 새로운 도구의 정착에 의한 사회 구조적 변동 맥락과 윤리라는 담론을 생성시키지 못한 채, 소위 국내외 석학이라는 자들이 AI를 둘러싼 윤리적 담론을 누가 누구를 지배하는가?’라는 물음 속에 매몰시켜 버리는 현실 때문이다. 지금 현실에 필요한 사회 구조 변동 맥락 속의 윤리학과 같은 담론조차 생성시키지 못하는 자들이 석학이라니? 나는 제한적 합리성의 열렬한 옹호자가 아니다. 특히 언급만하고 넘어가는 '판단과 정보의 유기적 관계에서 문제 공간의 역사적 표류'라는 개념은 지나치게 진화생물학에 매몰된 현재의 제한적 합리성 연구에서 도외시되고 있는 것임을 밝혀 둔다. <인공 직관(Artificail Intuition)>이라는 글을 조만간 올릴 것인데, 제한적 합리성에 대한 약간의 지식이 글 이해에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제한적 합리성

 

1. 제한적 합리성의 개념과 역사

 

(1) 합리성의 역사

전통적 합리성은 예증적 확실성(demonstrative certainty)을 추구한다. 고대 그리스 기하학에 기원을 둔 예증(demonstration)은 철학에서는 연역적 증명과 동일시되어 왔다. 예증 개념의 변화 방식에 대한 언급 자체가 합리성에 접근하는 방식의 역사적 변화 과정을 보여준다. 주어진 결론의 참을 보장하는 전제를 찾는 것이 원래 분석(analysis)의 의미였고, 전제에서 그 결론을 구성해 내는 종합(synthesis)예증으로 불렸다. 예증은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치면서 연역적 증명의 의미를 확보한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예증 개념이 현대적 의미의 연역적 방법과 일치한다는 주장에 동의하는 주석가는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실천지와 이론지를 구분했을 때, 실천지는 상황에 합당한 개연적 판단의 일종으로서 이론적 방법론을 대표하는 예증에 속하지 않는다. 그는 실천지에 대한 이론지의 우월성을 강조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그에게 예증은 합리성 전체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었다. 더욱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예증에서 추론 형식, 곧 연역의 형식 절차가 올바른 판단과 논증에 대한 절대적 기준은 아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증을 시작하기 위한 첫 원리가 예증 자체에서 얻어질 수 없음을 분명히 했고, 이 점은 중세와 르네상스 시절의 수사학이 논리학과 공존할 수 있었던 토대였다. 예증에서 이론적 삼단논법 자체가 논증의 합리성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과 개념에도 명백히 반영되고 있다. 형상인, 목적인, 작용인과 질료인으로 구분되는 원인의 규명은 단순히 예증의 합리적 추론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다.

 

예증이 연역적 증명과 동일시되면서, 연역 자체가 합리적 추론의 유일한 기준으로 과장되기도 했다. 확실성을 추구하는 합리성을 전통적이라고 말할 때, 그 전통의 뿌리는 자연과 도덕의 보편적 지식 체계를 건설하려고 했던 근대의 시대정신이다. 그러한 보편적 지식 체계의 건설 가능성에 대한 철학적 토대는 개인주의 관점에서 파악된 이성의 자율성’(autonomy of rationality)이였다. ‘이성적 사고만으로 추론의 첫 원리를 얻을 수 있다는 합리론경험에 이성의 비판적 능력이 개입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경험론이 근대의 시대정신을 대표한다. 합리론은 형이상학에서 과학적 지식 체계를 이끌어 낼 수 있다는 관점에 대응되며, 경험론은 형이상학과 과학적 지식 체계를 구분하려는 관점에 대응된다. 회의론은 이성적 능력에 대한 의심일 뿐, 그것이 보편적 확실성을 추구하는 근대의 시대정신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다. 그 어떤 경우든, 집단적 속성은 개인의 속성에 근거해 설명 가능하다는 생각이 지배했고, 개연성은 합리적인 것의 적으로 규정되었다.

 

현실 세계에서의 판단은 정보의 원천과 정보가 주어지는 방식에 근거한 개연성을 갖는다. 가설과 결론 찾기, 가설 인정, 일반화, 진단 및 추정에서 사람의 판단은 사물, 개인 및 집단이 처한 상황적 특수성과 과거 경험의 기억에 의존한다. 확실성을 추구하는 전통적 합리성의 사유 틀은 정보를 정보의 원천, 정보의 주어지는 방식과 무관한 초기 조건 혹은 입력처럼 다룰 것을 강요한다. 그러한 초기 조건 및 입력에서 필연적으로 참인 결론, 곧 출력을 얻을 수 있는 보편 형식 절차, 추론 및 계산법의 개발은 전통적 합리성의 이상이었다. 이러한 이상을 실현하려면,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특수한 상황적 요인들을 동질화할 것이 요청된다. 주사위를 던졌을 때 1이 나올 주관적 확률 1/6은 개인이 처한 구체적이고 특수한 모든 상황적 요인을 초월하여 믿음의 정도를 나타내는 등가 확률’(equi-probability)’로 취급되었고, 등가 확률 개념에 근거해 확률 1/6을 동질적으로 다룰 수 있는 보편 확률 계산식을 얻을 수 있었다. 통계에서는 기저 비율(base rate)과 관계된 표본 집단의 상대성을 동질화하기 위해 정규화(normalization) 방법론이 개발되었다. 그러한 방법론에 의해 자연 빈도수(natural frequencies)독립적인 단일 사건들과 연관된 주관적 확률로 대체시킴으로써 베이즈 공식을 얻을 수 있었다. 논리학에서는 연결사의 기능을 판단 내용과 분리시킴으로써 추론의 공리화를 꾀했고, 사물, 개인 및 집단의 상황적 특수성을 고려하는 수사학 및 결의론(casuistry)은 논리학의 적으로 몰리게 되었다.

 

철학, 경제학 및 통계를 사용하는 분야에서 살아남은 전통적 합리성은 주관적 기대 효용(subjective expected utility)의 최적화 모델, 기호논리학 및 규범적 교육 방법론 등에 스며있다. 이렇게 여러 모습으로 현대의 담론 속에 스며있는 전통적 합리성은 크게 다음의 세 가지 이분법을 함축한다.

 

형식과 내용의 이분법: 판단과 논증의 합리적 기준이 보편 형식 절차 및 계산의 이념을 만족하려면, 그러한 합리적 기준은 정보의 원천, 곧 환경구조 및 정보가 주어지는 방식과 무관해야 한다.

 

논리적인 것과 심리적인 것의 이분법: 형식과 내용의 이분법에 따라 추론의 형식 규칙이 마치 사고의 규칙처럼 여겨졌고, 심리적인 것을 합리성의 영역에서 배제시키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발견과 정당화 맥락의 이분법: 논리적 추론이 합리성을 대표하게 되면서, 합리성은 정당화 맥락 속에 종속된다. 발견은 발견의 논리라는 이름으로 정당화 맥락에 귀속되거나 합리성의 영역에서 다뤄질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전통적 합리성은 개인주의 관점에서 자연과 도덕의 확실한 지식체계를 건설할 수 있다는 이성의 자율성 개념에 근거한다. 사고는 추론의 보편적 규칙을 따르는 능력이다. 전통적 합리성의 이념은 집단 차원의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기원을 무시한다. 이러한 개인주의 관점의 이성은 17세기 철학의 이단아로 지목된 비코(G. Vico) 19세기 실험심리학 탄생의 초석을 닦은 심리학자들의 공격 목표였다. 이들의 작업은 심리주의가 철학에 대한 모독처럼 인식되는 분위기 속에서 20세기에 제대로 전파되지 않았다. 이 점은 프레게(G. Frege)의 저술에 자극된 20세기 언어철학의 흐름이 의미론에서 심리적 요소를 완전히 제거하는 데 주력했다는 사실과 부합한다.

 

형식과 내용의 이분법은 오스트리아의 뷜러(K. Bühler)와 그의 제자 브룬스위크(E. Brunswick)의 비판을 받았다. 브룬스위크는 전통적 합리성에 대비된 현실세계의 합리성을 유사합리성(quasi rationality)’으로 명명했다. 그는 판단과 환경구조를 연관시킴으로써 합리성의 생태적(ecological) 측면을 부각시켰다. 브룬스위크는 유사합리성이 이상화된 합리성을 시뮬레이션할 수 있지만, 역은 불가능하다고 논했다. 사이몬(H.A. Simon)은 의사결정의 만족화 모델(satisficing model)에서 인간의 판단이 정보의 원천과 정보가 주어지는 방식에 좌우됨을 분명히 했다. 형식과 내용의 이분법은 웨이슨의 선택실험(Wason's selection test)에 의해 결정적 타격을 입는다. 인간이 형식논리의 규칙에 따라 판단하지 않는다는 실험적 사실을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인간은 형식적 오류를 범하도록 인지적으로 편향되어 있다는 해석, 곧 전통적 합리성에 대비해 인간을 비합리적 동물로 규정하는 해석에 대항한 일련의 시도는 진화 심리학의 정착에 기여했다.

 

심리적인 것이 논리적인 것은 아니지만 결코 비합리적인 것이 아니라는 관점은 진화 심리학의 흐름 속에 반영되어 있다. 감정은 생존 및 환경 적응의 측면에서 긍정적 인지 기능을 갖는 본능으로 파악된다. 반면에 전통적 합리성에서 감정은 충동으로 여겨졌다. 사이몬에게 영향을 끼쳤던 조직 경영학의 대부이자 록펠러 회사의 회장이었던 바나드(C.I. Barnard)는 그의 경험을 바탕으로 심리적인 것을 비합리적인 것으로 몰아세우는 세태를 비판했다. 논리적인 것과 심리적인 것의 이분법에 대한 비판은 실제 여러 수학자와 과학자의 글 속에 담겨있다. 특히 발견법(heuristic)을 학문 담론으로 정착시키려고 했던 푸앵카레(H. Poincare)의 제자 하다마르(J. Hadamard)와 오스트리아 출신의 폴리야(G. Polya)는 발견에서 심리적 측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철학에서 퍼스(C.S. Peirce)는 단일 가설 생성과 관련하여 심리적인 것의 역할을 강조했다. 논리적인 것과 심리적인 것의 이분법에 대한 비판은 발견과 정당화 맥락의 이분법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심리적인 요인 때문에 발견의 논리가 불가능하다는 관점은 합리적인 것에서 심리적인 것을 추방하려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발견 과정에서 가설 생성은 가설에 대한 평가적 요인을 배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발견과 정당화 맥락을 이분하는 것은 비상식적이다.

    

 

(2) 제한적 합리성의 학제 간 연구 틀

언급된 세 가지 이분법에 대한 도전은 현대에 들어와 제한적 합리성이라는 학제 간 연구 속에서 더욱 구체화되었다. 이 구체화 과정은 전통적 합리성을 대표하는 합리성의 최적화 모델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그 도전 과정을 정리해 보자.

 

합리성의 최적화 모델에서 인지과정은 확률 계산, 효용성 그리고 최적 결정을 포함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심리학에서는 통계 추론의 도구가 1950년대 이후 연구실의 일상적 활동에서 자리 잡게 되자, 그것이 연구자들에 의해 인지과정의 모델로 제안되었다. 피셔(R. A. Fisher)의 편차 분석, 네이만-피어슨(Neyman-Pearson)의 결정 이론이 대표적이다. 신고전경제학파 이론은 베르누이(J. Bernoulli)의 기대 효용 최대화의 원리가 합리성을 정의할 수 있다는 믿음을 확신시켰다. 신베이즈주의 학파들은 베이즈 통계의 형식적 절차가 모든 면에서 합리적 추론을 정의한다고 주장하였다. 동물학자들은 최적 먹이 구하기 이론을 발전시켰고, 인공 지능이라는 분야는 최적을 추구하는 동물과 유사한 합리적 행위자를 설계하는 데 승부를 걸었다. 다시 말해, 환경에 대한 완벽한 표상과 계산적인 최적 행위를 위한 광범위한 계산 능력을 가진 인공 행위자를 만들려는 이상을 추구하였다.

 

1970년대 이후 추론, 판단, 결정의 합리적 규범과 인간의 실제적 판단 사이의 불일치가 심리학적 담론의 중요한 주제가 되면서, 인간의 사고와 행동의 합리성에 대한 여러 의문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전통적 합리성을 대표하는 합리성의 최적화 모델을 위협했다. 여기서 우리의 선택지는 두 가지가 될 수 있다. 그 중 한 가지는 인간의 사고와 행동이 본성적으로 비합리적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두 번째는 전통적 합리성의 개념 자체를 문제 삼고, 새로운 합리성의 개념과 모델을 착안해 보려는 입장이다. 이것은 기존의 합리적 모델이 설명의 틀로서 한계를 드러내었다고 보고, 인간의 인지, 사고, 그리고 합리성의 개념에 대한 새로운 개념화를 시도하려는 입장이다.

 

위의 두 가지 선택지 중 둘째 입장을 대표하는 것이 제한적 합리성의 모델이다. 제한적 합리성은 최적화의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보통 효용성도 배제한다. 그것은 사람들이 현행 규범과 어긋나는 모습을 보일 때 현행 규범에 대한 대안을 제공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 제한적 합리성은 규범에 재고하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마음과 제도의 실제적 기능 방식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다. 이러한 입장은 최적화 모델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허버트 사이몬에 의해 제안되었다. ‘제한적 합리성이라는 용어를 창안한 사이몬은 가위의 유추를 사용하였는데, 가위의 한 쪽 날은 실제 인간의 인지적 한계이고, 다른 쪽 날은 환경의 구조이다. 제한된 시간, 지식 자원 속에서도 마음은 그러한 제한에도 불구하고 환경 구조를 이용함으로써 성공적으로 기능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한적 합리성의 모델은 그 어떤 결정도 제한된 시간, 지식, 자원 속에서, 그리고 불확실하고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현재 제한적 합리성은 전통적 합리성을 비판하고, 현실 세계에서의 합리성을 구제하려는 일련의 시도들을 인지 심리학 및 진화 심리학을 바탕으로 통합하려는 학제 간 연구로 규정된다. 기거렌처(G. Gigerenzer)와 그의 동료들은 전통적 합리성의 최적화 모델에 반대하면서, 기존의 논리적 접근과 추론의 심리적이고 발견법적인 측면을 기술적으로 통합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그러한 시도 속에서 합리성 논제를 둘러싼 여러 종류의 이분법, 즉 논리적인 것과 심리적인 것, 형식적인 것과 내용적인 것, 이론적인 것과 실천적인 것, 발견의 맥락과 정당화의 맥락, 생물학적인 것과 문화적인 것의 이분법을 거부한다. 그 대신 우리 인간의 인지가 갖는 적응적 본성에 주목할 것을 강조한다. 기거렌처와 그의 동료들에 의해 발전한 제한적 합리성은 생태적이고, 영역 특수적이며, 사회적이다.

 

첫째, 제한적 합리성은 생태적이며 영역 특수성(domain specificity)의 성격을 갖는다. 모기와 인간에게 공통된 합리성은 환경 맥락에 의존적이라는 것이다. 환경 맥락을 무시한 규범적이고 절대적인 합리성은 없다. 판단, 추론 및 행동에 합리성이라는 개념을 적용할 때는 특정 환경 맥락이 고려되어야 한다. 둘째, 제한적 합리성은 유기체의 합리성이다. 특정 환경 속의 판단, 추론 및 행동은 모든 가능한 조건을 고려하지 않는다. 모든 유기체는 환경 조건에서 발견되는 몇 가지 단서들에 바탕을 둔 발견법을 채용함으로써 선택을 하거나, 문제를 해결한다. 셋째, 유기체들의 합리성에서 생태적 측면은 사회적 측면과 연관된다. 유기체들은 동종의 다른 유기체들로 구성된 사회적 환경을 바탕으로 인지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환경에서는 모방 및 속임수 알아채기와 같은 것이 의사 결정과 문제 해결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제한적 합리성의 생태적이고, 영역 특수적이며, 사회적 측면은 유기체의 문제 해결의 발견법적 맥락에서 나타나며, 문제 해결의 만족화 수준(satisfiability-level)은 최적의 결과가 아니라 유기체의 적응 및 생존과 맞물린다. 기거렌처와 동료들에 의해 확대된 제한적 합리성의 연구 방향은 다음과 같이 규정된다.

 

제한적 합리성의 기본 틀: 합리성은 이상화된 지식 체계가 아니라 문제 해결의 발견 과정과 행동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마음은 진화 과정에서 여러 문제 상황에 반응하는 다양한 인지 전략으로 구성된 적응적 도구 상자(adaptive toolbox)’이다.

 

실험적 측면: 발견 과정에 동원되는 다양한 인지 전략들, 실례로 만족화 모델, 범주의 단순화 모델 및 단서 추정법 등을 실험적으로 찾고 규명한다.

 

설명적 측면: 실험적 방법론에서 찾아진 인지 전략들의 효과성과 적응성을 진화론, 인지 심리학 및 진화 심리학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철학적 측면: 제한적 합리성이 전통적 합리성과 구분되는 특징들을 찾고, 이 특징들에 함축된 철학적 의미를 규명한다. 아울러 제한적 합리성이 현실세계의 합리성을 대표할 충분한 자질을 갖고 있는지를 따진다.

    

 

(3) 적응적 사고

제한적 합리성의 모델은 제한된 조사 범위, 지식, 시간의 제약 조건 아래서 훌륭하게 기능하는 단계적 발견법의 인지 전략들로 구성된다. 발견법의 인지 전략들로 구성된 레파토리는 하나의 종(species)이 진화의 어떤 시점에서 가질 수 있는 것으로서, 이를 적응적 도구상자라고 부른다. 적응적 도구상자의 개념은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갖는다. 첫째, 그것은 일반적인 의사 결정 알고리듬이라기보다는 발견법의 인지 전략들의 다발을 가리킨다. 둘째, 이 발견법의 인지 전략들은 일관성이 있고, 정합적이며, 빠르고, 단순하며, 계산적으로 쉽다. 셋째, 이 전략들은 과거이건 현재이건, 물리적이건 사회적이건, 특정한 환경에 적응한다. 이러한 발견법의 전략들에 근거해 유기체는 자연적 환경에서 정보의 구조를 이용함으로써 빠르고 간결하면서도 정확하게 판단한다.

 

만족화 모델, 단서추정법 등 발견 과정에 동원되는 다양한 인지 전략들에 대한 실험적 연구는 현실 세계의 적응적 사고(adaptive thinking)’가 갖는 제한적 합리성의 요인들을 드러내 준다. 첫째, 지식과 계산 능력의 제한성은 문제 해결에서 반드시 불리한 것만은 아니다. 특정 환경 구조에 적응된 발견법의 인지 전략은 계산을 단순화시키는 미덕을 갖는다. 최적화 모델에 의하면, 우리는 환경에 대한 완벽한 표상을 필요로 하고 거대한 양의 계산을 행해야 하기 때문에 쉽사리 분석을 끝낼 수 없다. 반면에 문제 해결에서 불필요한 변수를 고려하지 않는 단순한 발견법은 빠르고 간결하면서도 정확한 결정을 가능하게 한다. 둘째, 단순한 발견법은 환경에서의 규칙성, 실례로 야구공을 잡을 때 일반적으로 유지되는 응시 각도와 같은 것을 이용할 수 있다. 바람, 속도, 표면 마찰 등의 변수를 무시한 채 야구공의 응시 각도만을 주목함으로써 우리는 쉽게 야구공을 잡는다. 셋째, 여러 환경 구조와 맞물린 발견법의 단순한 인지 전략들의 다양한 조합 가능성은 최적화 계산 없이도 복잡한 문제 해결을 가능하게 해준다. 시간이 부족하고, 자원이 제한되어 있으며, 무지의 조건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는 현실 세계에서 우리의 마음이 내리는 결정, 선택 그리고 판단은 모두 적응적 사고의 결과다.

 

제한적 합리성의 학제 간 연구 틀 속에서 적응적 사고는 판단에 동원되는 인지 전략과 문제의 맥락 혹은 환경 사이의 적합성과 관련되는 것이지, 맥락 의존성을 무시한 신비한 창의력을 전제하지 않는다. 효과적인 문제 해결은 적절한 문제의 표상 방식에 공조할 수 있는 적응적 인지 전략들이 개입함으로써 가능하기 때문에, 판단과 정보의 유기적 관계가 성립한다. 적응적 사고의 증진은 신비한 통찰력이 아니라 맥락에 맞는 문제 해결의 적응도와 연관된 인지 전략들의 효과적 사용에 근거한다.

  

  

 

2. 제한적 합리성, 판단과 정보 표상의 유기적 관계

 

(1) 판단과 정보 표상

전통적 합리성에 대항해 나온 여러 합리성의 개념은 동질적이지 않다. 브룬스위크의 유사합리성은 판단에 동원되는 직관 혹은 상식을 규명하는 데 목적을 둔다. 사이몬은 의사 결정 과정에서 마음을 일종의 정보처리 기관으로 본다면, 제한적 합리성의 학제 간 연구에서 마음은 적응 기관에 유비된다. 이들 모두에게 공통된 것은 판단이 정보의 원천 및 정보의 주어지는 방식에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다. 이 점은 판단과 정보 표상의 유기적 관계에 대한 하나의 사례를 살펴봄으로써 명확해진다.

 

미국의 모 여성 A가 집안에 유방암 환자가 많다는 사실에 겁을 먹고 미리 양쪽 유방을 절제한 사건이 있었다. 과연 이 여성의 결정은 현명한 처사였는가? 의사가 이렇게 말했다고 하자. "양쪽 유방을 절제한 여성이 유방암에 걸릴 위험은 80%로 줍니다."

 

의사의 말에 담긴 80%는 의학에서 사용되는 RRR(relative risk reduction) 비율, 소위 상대 위험 감소율이다. 이 통계치는 치명적 약점을 갖고 있다. 해당 지시 대상 영역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A는 양쪽 유방을 자르면 암으로 사망하지 않을 확률이 80%라고 믿는다. 그런데 이 믿음은 착각이다. 상대 위험 감소율을 정하는 절차는 다음과 같다.

 

(i) 조사 지시 대상 영역, 실례로 유전적으로 유방암에 걸릴 위험성이 많은 50대 여성의 집단이 정해져야 한다.

(ii) 그 집단에서 실제 유방암에 걸린 사람은 5%의 비율로 나타났다.

(iii) 그 집단에서 유방 제거술을 받아도 유방암에 걸릴 비율은 1%였다.

(iv) 5%에서 1%를 빼면, 4%가 나온다.

(v) (4%/5%) ×100=80%. 유방 제거술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유방암에 걸릴 비율을 기준으로 유방을 제거한 상태에서 유방암에 걸릴 상대적 위험 감소율을 끄집어 낸 것이다.

 

의사가 이렇게 말했더라면 어땠을까?

 

아주머니의 걱정은 잘 이해합니다. 유전적으로 유방암에 걸릴 확률을 가진 사람들이 100명이라고 합시다. 100명에서 실제 암에 걸리는 사람은 통계적으로 볼 때 약 5명 정도가 됩니다. 100명 모두가 사전에 유방 제거술을 받는 경우에도 1명 정도가 암에 걸린다고 합니다.”

 

처음 방식의 설명과 이렇게 설명하는 것은 동일한 내용이지만 차이가 있다. 80%는 단일 사건의 확률로서 정보의 원천을 숨기고 있다. 절차 (5)의 결론만 함축할 뿐, 실제 절차 (i)-(iv)80%라는 수자에 은폐된다. 위의 의사의 말 속에서는 단일 사건이 아니라 100명 중의 몇 명이라는 식의 빈도수가 주어졌고, 유방 제거술을 받지 않은 경우와 받는 경우의 상대적 비교가 명확히 나타나있다. 이 경우는 절차 (i)-(iii)에 함축된 실험 조사의 대상 집단, 곧 정보의 원천에 대한 암시를 포함하고 있다. 별 차이가 아닌 것 같지만, 환자의 반응은 매우 다르게 나타난다. 실험적으로 인간의 인지 체계가 정보의 원천이 숨겨진 단일 사건 확률보다는 빈도수에 민감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수와 기학학적 표상은 인간이 환경 구조의 패턴을 단순화하여 저장하는 데 필수적이다. 여기에는 종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이 차이가 종 생존율 및 생식적 적합성과 직접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각 종의 인지 체계는 환경구조 속에서 살아 나가도록 변이와 선택을 통해 구축된 것이다. 차이 비교에 수적 기억(numerical memory)이 사용되는 경우, 단일 사건은 큰 의미가 없다.

    

 

(2) 제한적 합리성의 측면에서의 분석

전통적 합리성의 개념은 '주어진 것으로부터의 추론 혹은 계산(inference or calculation from the given)‘이며, 정보의 양만 문제가 된다. 정보가 흘러온 원천, 정보의 사용과 연관된 문제의 공간 그리고 행위자에게 주어지는 정보 및 계산 순서는 무시된다. 위험 감소율이 단일 사건에 대한 확률 80%로 주어진 것은 이에 해당한다. 전통적 합리성 개념은 현실 세계 속의 인간의 합리성이 아니다. 대상 영역에 관한 정보를 함축한 빈도수로 문제가 표상되는 경우는 다르다. 이러이러한 특징을 가진 몇 명 중에 몇이라는 표현 방식은 판단에 필요한 정보의 원천으로서 대상 영역을 암시한다. ‘판단에 개입하는 인지 능력문제와 연관된 대상 영역의 구조사이의 공조 가능성이 깨어진 상황에서 인간은 오류를 범하기 쉽다. 그러한 오류를 인지 편향으로 해석하지 않으려면, 판단에서 영역 특수성(domain specificity)이라는 현실 세계의 합리성이 갖는 성격에 주목해야 한다. 피아제(J. Piaget)가 생각했던 것처럼 인간의 인지 능력은 규칙의 보편적 적용 가능성에 근거하지 않는다. 추론, 계산 및 지식 습득은 동일한 방식이 아니라 문제의 내용에 따라 다양하게 작용한다. 판단은 주어진 입력 혹은 초기 조건에 형식 추론 절차 및 계산법의 적용 결과가 아니다. 개개의 인지 능력의 효율성은 그 능력과 관계된 알고리듬의 구조뿐만 아니라 주어진 문제의 내용에 좌우된다.

 

인간의 인지 체계가 단일 사건의 확률보다는 빈도수에 예민하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정보 제공의 원천과 정보의 주어지는 방식에 민감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민감한 경우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종 보존을 위한 평균 적응도를 높인다. 정보 제공의 환경 및 정보의 주어지는 방식과 무관할 수 없다는 점에서, 현실 세계의 합리성은 생태적이다. 의사가 공포에 떨어 양쪽 유방을 제거하려는 여성을 설득하려는 경우, 의사는 각종 정보를 사망률보다는 감소율 혹은 치료율을 가지고 설명하는 것이 좋다. 인간의 사고와 행위는 생존의 부정적 측면보다는 긍정적 측면에 대해 능동적으로 반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고와 행위가 사회의 가치적 상징체계에 무관할 수 없다는 점에서, 현실 세계의 합리성은 사회적이다. 합리성의 영역 특수성, 생태적 그리고 사회적 측면이 인간의 사고와 행위를 제한한다.

    

 

(3) 판단과 정보 표상의 유기적 관계 모델

제한적 합리성이 문제 해결의 발견법 맥락에서 이해될 때, 판단과 정보 표상은 유기적 관계를 맺는다. 실험자 혹은 피험자의 지위 여부와 상관없이, 문제 상황에 합당한 판단은 효과적인 정보 표상에 좌우된다. 이론, 통계학 등 분석적 도구(analytical tools)와 연장 및 실험 장치와 같은 물리적 도구(physical tools)를 사용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으로 발견법을 규정할 때, ‘판단과 정보 표상의 유기적 관계 모델은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위 도식의 모델에서 단서에 근거한 판단은 여러 요인들의 유기적 관계에 의한 문제 공간을 형성한다. 문제 해결은 열망 혹은 만족 수준에 따라 결정되는데, 문제 해결에 합당한 판단은 적절한 단서 추출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맺는다. 적절한 단서의 자질은 적응적 도구 상자의 인지 전략 혹은 능력 및 정보 표상에 좌우된다. 유방암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적응적 도구 상자의 여러 인지 진략은 영역 특수성을 갖는다. 직관적 통계 처리는 단일 사건의 확률보다는 빈도수에 민감하다. 이러한 통계 처리 판단의 합당성은 단서 추출을 위한 정보 표상을 빈도수로 디자인할 것을 우리에게 요청한다. 적응적 도구 상자의 다양한 전략들은 생태적 그리고 사회적 제한 조건에 영향을 받는다. 단서 포착에 필요한 정보의 원천과 정보가 주어지는 방식이 정보 표상의 디자인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동일한 내용을 사망률보다는 치료율에 근거해 구성해야 설득에 효과적이라는 사회적 제한 조건도 생태적 제한 조건과 함께 정보 표상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또 적응적 도구 상자의 전략들은 발견법의 분석적 도구와 물리적 도구에 의해 제한된다. 큰 수를 다룰 때, 연산 법칙의 활용은 합당한 판단에 도움이 된다. 그러한 법칙은 적응적 도구 상자의 인지 전략과 함께 판단에 개입하는 분석적 도구에 속한다.

 

판단과 정보 표상의 유기적 관계 속에서 문제 해결 과정이 열망 혹은 만족 수준에 다다르면, 결과물이 얻어진다. 그렇지 않은 경우, 문제 해결의 과정은 단서와 연관된 초기 상태로 되먹임(feedback)한다. 결과물은 열망 수준과 관계된 목적에 따라 인공물에서 방정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결과물은 문제 해결의 발견법 틀 속에 새로 유입되거나 과거의 것을 대체하기도 한다. 분석적 도구 및 물리적 도구의 사용법에 변화가 수반되며, 문제 공간의 배경 지식도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다. 도구 사용법의 복잡성은 배경 지식의 복잡성을 함축하며, 새로운 역사적인 정보들이 생태적, 사회적 제한 조건들에 유입된다. 이러한 문제 공간의 역사적 표류(historical drift) 속에서 적응적 도구 상자의 인지 전략들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발견의 결과물들이 얻어진다.

 

판단과 정보 표상의 유기적 관계가 함축하는 미덕은 무엇인가? 전통적 합리성의 방식대로 사람들이 문제를 해결하고 판단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실험적으로 규명되었다. 그 결과, 인간의 인지 체계는 오류를 범하도록 되어있다는 인지 편향 이론이 득세하기도 했다. 인지 편향 이론은 전통적 합리성에 대한 대안이 아니라 반발이다. 비합리성을 강조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판단과 정보 표상의 유기적 관계에 따르면, 실험의 오류는 새롭게 해석된다. 많은 오류는 문제 공간에서 판단과 정보 표상의 유기적 관계가 깨진 실험 설계 때문이다. 제대로 된 정보 표상은 그러한 유기적 관계를 충족하는 것을 의미하고, 그러한 유기적 관계 속에서 문제 해결의 능력이 커진다. 문제 해결 능력의 증가는 환경과 인지 전략의 공조를 요구하기 때문에, 적응적 사고는 내적인 관점에서의 계산능력 혹은 IQ로 환원되지 않는다. 적응적 사고는 문제의 환경 혹은 상황에 합당한 인지 전략을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적응적 사고를 자극하는 교수 학습법에서 정보 표상의 설계가 중요한 주제로 떠오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