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 에세이/인지와 경험

세계 이해 방식들의 세계에 대한 구상 1. 물음들

착한왕 이상하 2016. 2. 7. 22:54

* <세속화 '저기'와 '여기': 무종교인의 관점>과 연관된 글

 

인간, 자연, 사회, 그리고 그것들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세계 이해 방식의 변천 과정을 다루는 것을 지성사라고 할 때, 세속화 담론은 새로운 세계 이해 방식을 제시하는 것에 목적을 두지 않았다. 그것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무종교인의 관점에서 세속화 과정을 서술하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에게 중요한 현실 문제를 드러내는 것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종교인이 종교적 교리들의 진위에 무관심하다고 할 때, 그는 그러한 교리들 속에 반영된 그 어떤 세계 이해 방식에도 동조하지 말아야 한다. 특히 그가 지적으로 성숙한 무종교인이라면 그렇게 해야 한다. 그에게 세계 이해 방식들이란 진위 여부의 단순한 판단 대상이 아니다. 그것들 중 상당수는 특정 시대 지역 사람들의 생활 방식을 제한하는 방식으로 기능했다. 지적으로 성숙한 무종교인은 특정 세계 이해 방식이 아니라 세계 이해 방식들의 세계를 분석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두 물음을 던져 보자.

 

X는 자신이 오랜 동안 노력을 기울여 만든 새로운 세계 이해 방식 W’세계 이해 방식들의 세계에 포함시키려고 한다. 기존의 세계 이해 방식들을 비판적으로 고려하여 W를 만들었기 때문에 W에 따른 생각과 행위가 올바른 것이라고 확신한다. W는 과연 기존의 세계 이해 방식들과 완전히 다른 새로운 것일까? W는 과연 모든 사람이 대안으로 받아들일 정도의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을까?

 

인간의 원초적 한계를 놓고 진지하게 고민해 본 사람이라면, 위 두 물음에 대해 긍정적으로 답할 수 없다. 인간의 한계를 다루는 것은 이 작업의 주제와 거리가 멀다. 다만 인간의 한계가 보여 주는 여러 측면들 중 하나만 밝혀, 위 두 물음을 <세계 이해 방식들의 세계에 대한 물음들>로 세분화시켜 볼 것이다. 그렇게 세분화하는 것은 세계 이해 방식들의 세계를 분석 대상으로 삼는 경우의 철학이 무종교인에게 필요한 이유를 분명히 해 줄 것이다. 인간의 한계가 보여주는 여러 측면들 중 하나는 다음이다.

 

<경험할 수 없는 전제들>

모든 세계 이해 방식들에는 특정 전제들이 깔려 있다. 삶의 경험 속에서 그 누구도 그러한 전제에 대한 직접적 증거를 찾을 수 없다. X가 삶의 특정 경험을 통해 세계 이해 방식 W1을 받아들이기로 했을 때, 다른 Y가 유사한 경험을 통해 W2를 받아들일 가능성은 배제되지 않는다. 또한 X 혹은 YW1 혹은 W2를 받아들인 이유는 그들 각자의 경험만으로는 충분히 확보될 수 없다. 그 이유는 W1 혹은 W2가 각자 만족할 수 있도록 그들의 삶에 정착한 데 있기 때문이다. 특정 세계 이해 방식의 전제들을 받아들이도록 해 주는 직접적 증거들을 경험 속에서 찾겠다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부정하는 것이다. , 그렇게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세계 이해 방식들에 깔려 있는 전제들은 인간의 한계가 갖는 한 측면을 반영해 준다.

 

<경험할 수 없는 전제들>에서 언급된 경험은 지각 경험에 국한되지 않는다. 지각 경험뿐만 아니라 실재하거나 의도된 대상들에 대해 갖는 느낌을 포함한 의식적 활동 전체를 일컫는다. <경험할 수 없는 전제들>의 성격을 좀 더 명확히 하려면, 경험에서 당연하게 나타나는 믿음들과 세계 이해 방식들 사이의 관계를 간략히 다룰 필요가 있다.

 

일상 경험에서 거의 모두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믿음들이 있다. 실례로 모든 인간은 죽는다’, ‘인간은 동물이다’, ‘우리는 걸어서 달에 갈 수 없다’, ‘비가 오면, 땅이 축축해 진다등의 믿음들을 들 수 있다. 그러한 믿음들은 삶의 기저로 작용한다. 이 때문에 그러한 믿음들에 대해 의심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당연한 믿음들은 우리의 사고방식과 행위를 제한한다. 그 제한 방식을 경험의 기본적 경계 조건들이라고 할 때, 그러한 조건들로 전체의 특징은 부분에서도 발견된다’, ‘서로 다른 두 사건이 동시에 한 장소에서 발생할 수는 없다’, ‘서로 다른 두 대상이 동시에 한 장소를 차지할 수는 없다등을 들 수 있다.

 

경험의 기본적 경계 조건들은 당연한 믿음들이 기능하는 방식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경험을 가능하도록 해 주는 선험적 조건들로 규정되어서는 안 된다. 삶의 환경이 다르다면, 실례로 우리가 수중에서 생활하는 생명체라면, 일상 경험도 지금의 방식과는 달라진다. 따라서 일상 경험에서 당연한 믿음들도 달라지며, 경험의 기본적 경계 조건들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특정 경험의 기본적 경계 조건들과 관련된 믿음들을 바탕으로 여러 현상을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을 해석할 수는 없다.

 

전체의 특징들이 부분에도 반영된다는 것은 분류에서는 효과적이지만 다른 현상들에 대해서 일률적으로 적용될 수 없다. 전체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들이 있는 것일까? 부분과 전체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러한 물음들은 일상 경험의 당연한 믿음들로만은 대답될 수 없다. 사회에서 발생하는 불공평하고 정의롭지 못한 일로 누구나 한 번은 고민에 빠진다. 그러한 고민은 단순히 사회를 좀 더 공평하고 정의롭게 만드는 방법론에 대한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 행복할 수 있을까? 선은 죽음을 극복할 수 있을까? 이러한 물음들 역시 일상 경험의 당연한 믿음들로만은 대답될 수 없다. 세계 이해 방식은 이러한 물음들에 답하는 방식이다.

 

특정 세계 이해 방식의 궁극적 전제들은 일상 경험을 통해 검증 및 반증 불가능하다. 그러한 전제들로부터 예측 가능한 결론을 이끌어낼 수도 없기 때문이다. 세계 이해 방식들은 그러한 전제들에 근거해 경험과 삶의 해석에 개입하는 기능을 갖는다. ‘경험의 기본적 경계 조건들에 직접적으로 반하는 것은 그러한 기능을 가질 수 없다. 이 때문에, 세계 이해 방식들은 그러한 조건들에 직접적으로 반하지 않으면서도, 그러한 조건들에 의해 경계지어지는 일상 경험의 영역들에서 벗어나 있다. 자연에 관해 생각해 보는 경우, 질서 잡힌 자연, 무질서한 자연,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자연, 인간에게 무관심한 자연 등 여러 세계 이해 방식들이 가능하다. 더욱이 그러한 세계 이해 방식들에 대항해 자연에 무관심한 인간관점을 함축한 세계 이해 방식도 생성 가능하다. ‘세계 이해 방식들의 세계에서 각 세계 이해 방식은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세계 이해 방식들과의 역동적 관계 속에서 변화한다. 그러한 역동적 관계 속에서 어떤 세계 이해 방식은 우리의 삶에 더 이상 허용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게 되거나, 새로운 세계 이해 방식이 생성되기도 한다.

 

세계 이해 방식들의 세계를 분석 대상으로 삼는 경우, 적어도 다음과 같은 물음들을 다루어야 한다.

 

<세계 이해 방식들의 세계에 대한 물음들>

경험에서 보고, 듣고, 만지는 등 지각이 차지하는 부분은 어느 정도인가? 일상 경험에서 당연한 믿음들은 기능적, 내용적 측면에서 어떻게 분류되는가? 그러한 분류와 관련된 경험의 기본적 경계 조건들은 무엇인가? 그 조건들은 어떤 식으로 행위와 선택을 제한하는가? 삶을 논할 때 의미있지만 경험적으로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은 어떤 것들인가? 언어에 함축된 존재론적 구분 방식, 삶의 환경, 과학 기술의 수준 등은 어떤 식으로 세계 이해 방식의 생성에 영향을 미치는가? 역사 속에서 반복해 나타나는 원초적인 세계 이해 방식들이 있는가?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세계 이해 방식은 개인과 집단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치는가? 세계 이해 방식과 과학적 지식 체계는 어떻게 구분되는가? 세계 이해 방식이 삶의 환경 변화에 적응해 가는 방식은 어떠한가? 그 적응 과정에서 세계 이해 방식들과 과학적 지식 체계는 어떠한 관계를 맺는가? 하나의 세계 이해 방식이 다른 세계 이해 방식들을 변형 수용해 변화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은 무엇인가? ‘세계 이해 방식들의 세계에서 허용 가능한 세계 이해 방식과 허용 불가능한 세계 이해 방식은 어떻게 선별되는가? 상황 및 역사적 맥락과 무관한 그러한 선별 기준을 마련하는 것은 가능한가? 불가능하다면, 인간의 삶에서 철학의 역할은 어떻게 규정되어야 하는가 

 

세계 이해 방식들의 세계를 분석 대상으로 삼는 경우의 철학은 위 물음들에 대한 설명 체계를 마련하는 것이다. 그러한 설명 체계를 마련하는 것은 별도의 작업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세계 이해 방식들의 세계를 분석 대상으로 삼는 사고방식은 지금까지 주목받지 못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세속화 '담론에서 해체된  독단적 지성사들이 인류사에 대세가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세속화 담론은 나에게는 세계 이해들의 방식들의 세계를 분석 대상으로 삼는 경우의 철학으로 옮겨 가는 징검다리와 같다. 그럼에도 그 어떤 이념에도 종속되길 거부하는 무종교인들은 별도의 논의 없이도 그러한 철학에 대해 호감을 가질 것이다.

 

종교적 세계 이해 방식들이 여기에서나 저기에서나 사회의 지배적 통합 원리로 기능했던 시절, 무종교인의 의견은 무시되어 왔다. 무종교인의 의견이 사회에 무관심한 것으로 간주되지 않게 된 시점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종교적 세계 이해 방식들이 더 이상 사회의 지배적 통합 원리로 기능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사회 상태는 저기여기의 과거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았던 성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성향을 보이는 사회는 세속화된 사회 상태이다. 세속화된 사회 상태가 모든 종교적 세계 이해 방식들이 제거된 상태라면, 세속화된 사회 상태란 실현 불가능한 것이 되고 만다. 이러한 실현 불가능한 세속화된 상태에 대한 이상은 현실을 왜곡시켜 버린다. 그러한 왜곡으로, 무종교인들도 자유롭게 의견을 표출할 수 있게 된 과정을 사소한 것으로 여겨 현실을 단순히 과거의 연장선으로 인식하는 것, 그리고 종교가 사라진 가상의 미래에 도달하기 위한 필연적 단계로 현실을 인식하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세속화된 사회 상태에서 종교는 개인의 의무가 아니라 선택의 범위에 속한다. 이 때문에, 다양한 종교적 세계 이해 방식들이 세속화된 사회 상태에 도사리고 있다. 그러한 종교적 세계 이해 방식들 중 그 어떤 것도 무종교인의 사고방식을 지배할 수 없다. 그러한 무종교인에게 필요한 철학은 특정 세계 이해 방식의 정당성이나 우월성을 다루는 방식이 될 수 없다. 이 때문에, 세계 이해 방식들의 세계를 다루는 경우의 철학에 대해서 호감을 가질 수 있는 사람들은 우선적으로 무종교인들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철학을 여기서 다루지는 않겠지만, 지금까지의 논의만으로도 한 가지는 어느 정도 분명히 할 수 있다. 세계 이해 방식들의 세계를 둘러싼 착각들을 지적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