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 에세이/인지와 경험

쾌락주의(Hedonism)

착한왕 이상하 2015. 9. 16. 02:15

 

이상하(철학 박사학위를 생업에 사용하지 않게 된 사람)

 

쾌락주의

 

 

행복한 삶이란 어떤 삶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단순한 대답 중 하나는 행복과 쾌락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 쾌락을 추구하는 삶이 행복한 삶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의 쾌락주의(hedonism)의 어원은 쾌락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ἡδονή(hēdonē)’에서 기인한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다수 사람들이 쾌락주의를 이해하는 방식은 자위행위에 중독되어 죽은 침팬지를 연상시킨다. 쾌락주의와 관련해 성 중독’, ‘알코올 중독’, ‘약물 중독등을 연관시키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쾌락주의라는 용어 대신 향락주의라는 용어가 사용되기도 한다. 또한 쾌락을 추구하는 것을 극단적 이기주의와 연관시키는 사람들이 많다. 이러한 이해 방식이 널리 퍼지게 된 이유는 철학에서 쾌락주의가 부정적으로 평가되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덕적 지혜를 의 관계로 파악하는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는 여전히 매력적임을 살펴볼 것이다.

 

 

1.

쾌락을 추구하는 것과 이기주의를 연관시키는 사고방식은 고대 인도의 차르바카(Cārvāka) 유물론자들, 소크라테스의 제자 아리스티포스(Aristippos, c. 435~356 B.C.E), 그리고 에피쿠로스(Epicurus, c. 341~271 B.C.E) 등에서 엿볼 수 있다. 이들 모두는 쾌락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입장을 공유한다.

 

쾌락은 본래 선한 것이다. 반면에 고통은 본래 악한 것이다.

 

일반 사람들이 이해하는 방식과 달리, 이들 모두는 쾌락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지 않는다. 쾌락이 본래 선한 것이라고 할 때, 선은 쾌락의 본래적 가치(intrinsical value)라는 것이다. 본래적 가치는 도구적 가치(instrumental value)에 대비된 것이다. 흡연이 즐거움을 준다고, 담배 자체가 좋은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없다. 담배는 흡연이라는 즐거움을 얻으려는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이 점에서 담배는 도구적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간주된다. 반면에 즐거움 그 자체는 그 즐거움을 얻는 방법이나 수단과 무관하게 선한 것으로 간주된다. 이때 그 즐거움은 본래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간주된다. 이 점에서 이들이 추구한 쾌락주의는 가치적이다.

 

차르바카 유물론자들, 아리스티포스, 에피쿠로스 모두가 공유한 또 다른 입장은 다음과 같다.

 

쾌락은 오로지 를 위한 것이다.

 

쾌락이 를 위한 것이라면, 쾌락이라는 선을 추구하는 것은 이기적이다. 이 때문에, 일부는 고대 쾌락주의를 가치적이면서 이기적인 것으로 분류한다. 쾌락 상태에 머물려는 동기가 이기적이라면, ‘선을 추구하는 것은 상호주관적 의미에서의 정당한 권리(right)’를 보장할 수 없다. 선이라는 쾌락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 삼아 자신의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정당한 권리로 여겨질 수 없다는 점에서, 고대 쾌락주의는 분별력(prudentiality)을 갖추지 못한 것으로 간주되곤 한다. ‘분별력을 갖춘 쾌락주의(prudential hedonism)’에서 쾌락은 단순히 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이는 도덕적 판단에서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고려하고 공감할 수 있다는 사실에 의해 뒷받침된다. 그러나 만을 위한 이기적 쾌락 추구가 정당한 권리를 보장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없다. 또한 무조건 분별력을 작추지 못한 것이라 할 수 없다. 이 점은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에서 분명해 진다.

 

 

2.

에피쿠로스에게 행복이란 육체적, 정신적 고통이 없는 쾌락 상태를 뜻한다. 사회 세계 및 신에 대한 두려움도 고통의 일종으로 간주된다. 불필요한 쾌락 추구는 더 큰 고통의 원인이 된다. 자기 보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쾌락만이 자연스러운 쾌락이며, 그러한 자연스러운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만이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다. 경험적으로 알 수 없는 것들을 믿는 것은 그러한 쾌락을 얻는 데 방해만 될 뿐이다. 불필요한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불필요한 욕구의 원인이며, 불필요한 욕구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어 불행한 삶을 살게 된다. 따라서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에서 나만을 위한 쾌락이라는 것은 삶 전체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나의 삶을 위한 것이다. 쾌락이라는 선에 대한 판단은 어디까지나 의 관계에 국한된다.

 

자기 보존에 필요한 쾌락을 얻는 것에 경쟁이 필요 없다면, 그러한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 삼을 필요가 없다. 이때 만을 위한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이 점은 충분한 자원 속에서 모두 각자 행복한 삶을 누리는 루소의 자연 상태개념에도 반영되어 있다. 에피쿠로스는 행복한 삶을 원하는 사람에게 온갖 사회적 제약으로 가득 찬 도시의 삶을 멀리하라고 권한다. 행위를 격식화하고 삶을 특정 방향으로 유도하는 법과 규범이 만인의 자발적 합의를 거치지 않은 것이라면, 루소 역시 그러한 법과 규범이라는 제약이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원인으로 간주했다.

 

사람들이 각자의 삶을 위해 최소한의 자연스러운 쾌락만을 추구하는 에피쿠로스 공동체’ C를 가정해 보자. C각 구성원은 쾌락을 자신의 삶 전체 속에서 조망한다는 점에서 분별력을 갖춘 사람이다. 하지만 그에게 중요한 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삶을 위한 쾌락이지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 때문에,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는 현대적 의미에서의 분별력을 갖춘 쾌락주의와는 차이를 보인다. 후자의 쾌락주의는 분별력의 적용 범위를 사람들로 확대시키기 때문이다. 동물 해방론으로 유명세를 탄 싱어(P. Singer)모든 동물을 위한 쾌락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현대적 의미에서의 분별력을 갖춘 쾌락주의의 옹호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분별력의 적용 범위를 동물들까지 확대시켜 도덕적 판단 범위에 동물들을 포함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쾌락은 동물과 사람 구분 없이 그 자체로 선한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러나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가 현대적 의미에서의 분별력을 갖춘 쾌락주의와 양립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적어도 에피쿠로스 공동체 C에서 모든 사람은 행복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을 위한 쾌락은 만의 쾌락에 수반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C의 구성원들이 C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의 삶을 방해할 이유도 없다. 오히려 C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이 C반사회적 공동체로 규정하고 공격할 가능성이 있다. C가 외부 사람들에 의해 위협을 받는 경우, C의 구성원들은 생존을 위해 저항해야 한다. 에피쿠로스는 그러한 경우를 심각히 고려했기 때문에 쾌락주의자들 사이의 우정을 강조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일부 윤리학자는 우정과 관련하여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가 모순적이라고 지적한다. 그들은 에피쿠로스의 우정 개념이 이기주의와 양립 불가능한 것으로 판단한다. 하지만 에피쿠로스의 우정은 동정심, 배려, 사랑, 희생 등에 바탕을 둔 것이기보다는 쾌락주의적 삶을 영위할 목적으로 맺어진 관계와 같은 것이다. 그러한 관계 속에서 누구나 각자의 쾌락을 추구하며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 에피쿠로스의 입장이다,

 

영어의 ‘prudential hedonism’은 종종 건전한 쾌락주의로 번역되곤 한다. 그러한 번역을 사용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 그러한 번역을 사용하면,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는 이기적 성격을 갖는다는 이유만으로 불건전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살펴보았듯이,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는 쾌락 증진을 위해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 삼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또한 삶 속에서 쾌락을 조망하는 분별력을 요구한다. 더욱이 사람들을 위한 쾌락을 전제하지는 않지만, ‘만을 위한 쾌락이 사람들을 위한 쾌락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3.

중세 시절, 유럽 사람들 대다수는 지상계와 천상계를 구분했다. 천상계는 신성이 깃든 곳, 지상계는 괴물들이 사는 곳으로 간주되었다. 그러한 괴물들 중 인간은 천상을 바라보며 신을 찬양할 수 있는 존재로 가정되었다. 이러한 생각에는 기독교의 원죄설이 침투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세계 이해 방식은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변화한 유럽의 정세로 인해 위협을 받게 된다. 새로운 변화에 부합하는 자연철학과 정치론이 요구되었으며, 이에 따라 기독교 교리도 지역별 특성에 맞추어 재해석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러한 과정에 영향을 미친 것 중 하나는 아이러니하게도 무신론을 대표했던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이다. 그러한 과정이 진행되면서 그의 쾌락주의도 재조명받게 된다. 특히 서양 지성사의 개인주의(individualism)의 형성 과정을 다룰 때, 고대 원자론과 쾌락주의는 빼먹을 수 없는 것이다. 벤담(J. Bentham)과 밀(J.S. Mill)은 쾌락과 고통을 합리적 계산의 대상으로 삼았고, 그러한 계산을 바탕으로 사회를 개선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게 개선된 사회는 다수가 행복한 사회이다. 이 점은 그들의 공리주의에 함축되어 있다.

 

벤담과 밀 모두 쾌락을 증진하고 고통을 피하려는 것을 인간의 자연스러운 성향으로 간주했다. 개인의 복지(well-being)는 쾌락의 정도로 결정할 수 있다고 여겼다. 이 때문에, ‘복지의 심리학적 이론(psychological theory of well-being)’의 출발점으로 벤담과 밀의 행복론이 거론되는 것이다. 그들에게 행복한 삶이란 고통을 피하면서 쾌락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삶이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도 차이가 있다. 벤담이 쾌락을 오로지 양적 계산의 대상으로 파악한 반면, 밀은 쾌락들 사이의 질적 차이를 더욱 중시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벤담이 양적 쾌락주의(quantitative hedonism)’를 옹호했다면, 벤담의 공리주의를 계승한 밀은 질적 쾌락주의(qualitative hedonism)’을 옹호했다고 할 수 있다.

 

벤담에 따르면, 쾌락의 가치는 그것의 강도와 지속 시간에 의해 결정된다. 이때, 쾌락을 얻는 원천, 쾌락의 종류는 무시된다. 따라서 쾌락을 추구할 때, 쾌락을 갖는 주체의 환경적 요인들도 무시된다. 심지어 쾌락을 갖는 주체가 사람인지 돼지인지도 무시된다. 밀에 따르면, 쾌락에도 질적 차이가 있다. 본능적 쾌락이 아무리 강하고 지속적일지라도, 그러한 쾌락만을 추구하는 삶을 행복하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본능을 억제하는 인간의 삶사료를 먹으며 만족스러워 하는 돼지의 삶보다 낫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누리려는 사람은 본능적인 쾌락보다는 상위의 쾌락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례로 우정, 지식, 고상한 취미와 관련된 쾌락의 가치는 본능적 쾌락보다 높다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벤담과 밀은 다음과 같은 입장을 공유한다.

 

쾌락 증진, 고통 회피라는 원리로부터 누구에게나 적용 가능한 보편적 행위 규범을 이끌어낼 수 있고, 쾌락을 대상으로 한 합리적 계산을 통해 사회 유지를 위한 의무를 정당화할 수 있다. 개인에 대해서는 쾌락의 정도와 질이 높은 것을 결과로 갖는 행위가 그렇지 않은 행위보다 합리적인 것이다. 집단에 대해서는 사회 전체에 걸친 쾌락의 합으로 계산되는 총효용이 높은 것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 선한 것이다. 사회 전체에 걸친 총효용을 증진시킬 수 있는 조건을 충족하는 행위는 의무로 규정된다.

 

 

4.

벤담과 밀이 공유하는 입장을 에피쿠로스가 본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도 시큰둥하거나, 밀에 대해서는 아예 자신의 입장을 왜곡했다고 화를 낼 것이다. 최소한의 자연스러운 쾌락은 에피쿠로스에게는 양과 질과 무관하게 선한 것이다. 그러한 쾌락을 합리적 계산 대상으로 삼는 것은 그에게는 이질적인 것이다. 또한 그러한 쾌락에 따른 삶을 살라는 것은 그에게는 일종의 삶의 지침서와 같은 것이다. 그러한 지침서에 따라 살려는 사람들의 공동체는 외압적인 특정 위계질서의 사회를 피해 자발적으로 구성되는 것이지, 결코 총효용 계산에 따른 의무를 전제하지 않는다. 에피쿠로스에게 그러한 공동체가 그렇지 않은 사회보다 선함을 증명하라고 요구한다면, 그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 전체에 걸친 총효용의 비교가 아니다. 단지 에피쿠로스 자신의 삶이 온갖 규범으로 뒤섞인 위계질서의 사회 구성원들보다 더 행복한 것임을 보이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는 서양 지성사에서 가장 강력한 형태의 개인주의로 규정될 수 있다. 살펴보았듯이, 그에게 도덕적 판단은 어디까지나 의 관계에 국한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도덕적 판단이 누구에게나 적용 가능한 보편적 행위 규범과 같은 것일 필요가 없고, ‘사회적 의무와 반드시 연결되어야 할 이유도 없다. 밀과 벤담이 공유하는 입장은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보다 훨씬 더 규범적이며 사회적이다. 더욱이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에는 온갖 규범에 근거한 사회의 위계질서에 대한 반감이 도사리고 있다. 이 때문에, 그의 쾌락주의는 반사회적인 것으로 평가되어 경계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많은 철학자들이 그에게 통찰을 얻었음에도 결국 그를 혹독한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마지막에는 그에게 진 빚을 은폐시켜 왔다.

 

의무론을 옹호하는 철학자들은 벤담과 밀이 공유하는 입장에 반대하는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그들의 반론은 이렇다. 상황을 초월하여 누구나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는 합리적 계산 이 전에 규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계산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벤담, , 의무론자 모두 동일한 사고방식에 갇혀 있다. 그들 모두 어떤 원리에서 보편적 행위 규범을 이끌어 내고 사회적 의무를 정당화할 수 있는 이론 체계를 꿈꾼다. 이러한 근대 이후 서양 규범 윤리의 사고방식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벤담과 밀을 비판 대상으로 삼는 인물들도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에 큰 호감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이 단순히 쾌락주의 전통에 서 있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들은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가 권리를 함축하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에는 그들이 전제하는 이론 체계의 성격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누구에게나 적용 가능한 행위 규범이라는 것이 있을까? 그러한 규범이 있다면, 그것은 상황과 무관한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상황을 초월한 윤리 이론 체계들은 하나가 아니다. 그러한 윤리 이론 체계들 중 올바른 것은 무엇일까? 이 물음에 대해 부정적으로 답하는 입장은 자동적으로 상대주의 혹은 해체주의로 분류되는 것일까? 이러한 물음들을 제쳐 놓고 생각해도, 고민거리가 발생한다. 문제가 발생한 상황에 대해 보편성을 지향하는 두 이론 체계는 구체적 해결책을 제공하기보다는 대립 관계를 맺고 만다는 것이다.

 

논의를 단순히 하기 위해 여러 규범적 윤리 이론 체계들을 가치 체계들이라고 하자. 현재 우리는 가치 체계들이 다원화된 세계 속에 살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그러한 가치 체계들의 모임 W(={W1, W2, ..., Wn})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윤리학이 반드시 보편성을 지향해야 한다면, W에 속할 수 없는, 즉 허용될 수 없는 가치 체계를 선별해 주는 기준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W 중 하나만을 강요하는 윤리학의 전통은 현재 우리의 삶에 적용되기 힘들다. 다른 작업에서 강조했듯이, ‘일상적 공감대의 역동성을 고려하는 가운데 더 이상 허용될 수 없는 가치체계가 무엇인지를 묻는 윤리학이 필요하다(<상황윤리: 현실 세계 속의 공학담론, 2상식과 상황윤리).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에 함축된 가치 체계를 W에서 제거할 수 있을까? 나의 대답은 절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음 사례를 보자.

 

현재 사회 상태는 X가 원하는 세상의 그림과는 너무나 다르다. X는 그의 그림을 비도덕적이라고 판단하지 않는다. 그의 그림에 대해 들어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한때 X는 현재 사회 상태를 개선시켜 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확신한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이 원하는 세상의 그림을 지키는 길은 현재 사회 상태에 대해 철저히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가급적 대인 관계를 끊고 먹고 살 정도로만 일할 것이다. 그리고 자기 보존을 위한 범위 내에서 나만의 쾌락을 추구할 것이다.

 

위 사례의 삶을 방식이 보여 주는 가치 체계 W가 어떤 방식으로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에 함축되어 있는지를 따지는 것은 독자의 몫으로 남긴다. 또한 W허용 가능한 가치 체계들의 모임 W에서 쉽게 제거할 수 없는 구체적 이유도 독자의 몫으로 남긴다. 하지만 X의 삶의 방식이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저해하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가 능력을 발휘했더라면 사회가 더 나아졌을 것이라는 주장은 이에 대한 반박이 될 수 없다. X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X의 가치 체계가 누구에게나 적용 가능한 보편적 행위 규범을 결여했다고 해서, 그 누구도 그것을 비도덕적인 것으로 규정할 수 없다. 그것은 적어도 X에게는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효과적인 전략이자 도덕적인 것이기도 하다. 만약 네가 누구에게나 적용 가능한 보편적 행위 규범을 함축한 이상적 사회를 꿈꾼다면, 유명한 철학자들의 글을 탐독하고 그 내용에 대해 평생 음미하며 살기를 권한다. 17세기 이후 서양 철학자들 중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 인물이면 된다. 하지만 X나 에피쿠로스를 반사회적이거나 비도덕적 인몰로 몰지 말기를 부탁한다. 나는 사실 네가 칸트, 헤겔, 하버마스 등에게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이 자위행위에 중독된 침팬지의 동물적 쾌락보다 더 가치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있다. 행복을 논했거나 논하는 철학자들 중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 행복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 인물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