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 에세이/인지와 경험

세계 이해 방식들의 세계에 대한 구상 2. 세 가지 착각

착한왕 이상하 2016. 2. 8. 21:37

이 작업에서 펼쳐진 논의들을 바탕으로 세계 이해 방식들의 세계를 둘러싼 세 가지 착각들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착각은 세계 이해 방식들의 세계에서 올바른 것을 논증 및 정당화라는 방법으로 선별해낼 수 있다는 생각이다.

두 번째 착각은 과학적 지식 체계와 세계 이해 방식을 혼돈하여 전자가 세계 이해 방식들의 세계를 대체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세 번째 착각은 과학적 지식 체계의 한계를 보완해 정합적 세계 이해 방식을 건설하는 것이 철학의 당위적 목적이라는 착각이다.

 

좋은 논증론이란 결코 전제들에서 확실히 참인 결론, 즉 예외를 허락하지 않는 결론을 이끌어내는 방법론을 다루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전제들과 결론 사이의 내용적 연결성은 특정 타당한 맥락 속에서만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좋은 논증론이란 그러한 타당한 맥락의 구성 방식 및 변동 가능성을 보여 주는 것이어야 한다. 하나의 세계 이해 방식을 그러한 타당한 맥락에 대응시킬 때, 해당 세계 이해 방식의 핵심 전제들은 그러한 맥락의 경계 조건들과 같은 것이다. 그 전제들은 해당 맥락 내에서 논증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것들은 특정 사고방식과 행위를 유도하기 때문에 개인 및 집단의 삶의 양식 속에 정착하는 기능을 갖는다. 그러한 기능을 갖는 세계 이해 방식들 중 허용 가능한 것 혹은 제거되어야 하는 것을 선별하는 작업은 단순한 논증 및 정당화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더욱이 그러한 작업은 세계 이해 방식들의 내용뿐만 아니라, 삶의 환경의 변화에 대한 적응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 이를 받아들이면, 첫 번째 종류의 생각은 착각임을 인정해야 한다.

 

두 번째 착각에 빠지는 사람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특정 세계 이해 방식 W를 믿는 어느 과학자의 이론 T에는 W가 함축되어 있다. 따라서 T에 대한 올바른 유일한 해석은 W이다.

 

위와 같은 생각은 과학적 생활양식에 반하는 것이다. 과학적 생활양식은 재확인 및 재생산 가능한 측정량과 가설의 연결성에 의해 제한되어 있다. 그러한 제한 속에서 진행되는 가설 생성 과정은 특정 세계 이해 방식을 반드시 전제하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T‘T의 가설들 생성 과정에 개입된 W’의 내용과 마찰하기도 한다. 가설들, 가설들의 의미론적 기반인 개념 틀, 구체적 적용 조건들 등으로 구성된 이론의 유효성은 특정 세계 이해 방식과의 연관성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그 유효성은 이론의 예측 가능성, 적용 범위 등 검증 가능한 것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특정 조건들 아래 반복 사용 가능한 지식 체계로서의 이론은 임의의 해석을 허용하지는 않는다. 뉴턴 역학을 해석할 때, 그 과학적 지식 체계는 운동 중 변화하는 질량개념을 함축한 세계 이해 방식에 대해 저항한다. 하지만 그 과학적 지식 체계가 오로지 단 하나의 세계 이해 방식에 근거한 해석만을 허용하는 것은 아니다.

 

T의 가설 생성 과정에 W가 개입되었지만, T가 반드시 W를 함축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 심지어 TW가 내용적으로 마찰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TW에 의해서만 해석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대한 실례로 뉴턴 역학과 기계론의 관계를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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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 생활양식은 가설 생성 과정뿐만 아니라 해석 과정에서도 다양한 세계 이해 방식들에 대해 열려 있으며, 세계 이해 방식들과 무관하게 반복 사용 가능한 지식 체계 형성을 지향한다. 이러한 과학의 세속화라는 성격을 인식한다면, 하나의 과학적 지식 체계에 하나의 세계 이해 방식을 대응시킬 수 없다. 더욱이 모든 과학적 지식 체계에 공통된 세계 이해 방식이라는 것은 없다. 따라서 어떤 과학적 지식 체계에 특정 세계 이해 방식이 함축되어 있다고 전제하고, 그것을 올바른 것으로 가정하여 다른 세계 이해 방식들을 제거할 수 없다. 이때 두 번째 착각에 빠진 사람은 이렇게 주장할 것이다. 과학의 여러 지식 체계들 자체가 세계 이해 방식들이 삶에서 기능하는 방식을 대체할 수 있다. 물론 그러한 지식 체계를 얻는 탐구 과정에서 다양한 체험을 해 보고, 심지어 삶의 의미에 대해서도 고민해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탐구 과정이 세계 이해 방식들과 단절된 것은 아니다.

 

과학적 지식 체계는 무조건적이 아니라 특정 조건들, 특히 구체적 상황에서 추상화된 조건들 아래 성립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과학적 지식 체계는 그러한 조건들 아래 반복 사용 가능한 것, 즉 신뢰할 만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과학적 지식 체계들이 일상 경험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경험 속의 느낌, 정서, 염원 등의 물리적 기반이 과학적으로 설명된다고 해도, 삶 속에서 그것들이 갖는 의미, 개인의 사고 및 행위 방식이 규명되는 것은 아니다. 삶의 경험 속에서 던져지는 물음들, 그 물음들에 답하기 위해 고안된 세계 이해 방식들의 기능 방식을 대체할 과학적 지식 체계란 없다.

 

지적인 무종교인을 그 어떤 이념에도 종속되길 거부하는 사람이라고 할 때, 그는 삶의 경험 속에 침투해 있는 세계 이해 방식들을 제거하려는 사람이 아니다. 단지 현실 문제 진단과 해결 과정에서 세계 이해 방식들의 세계를 분석 대상으로 삼는 사람이다. 어느 무종교인이 두 번째 착각에 빠진다면, ‘세속적인 것이란 본인의 의도와 무관하게 반종교적인 것’, ‘물질적인 것’, ‘인간의 속물화등을 뜻하게 된다. ‘세속적인 것이 특정 종교적 세계 이해 방식의 지배 방식에서 벗어난 상태가 아니라, 그러한 것을 뜻하게 된 데에는 세 번째 착각도 한 몫을 했다. ‘세속적인 것과학적인 것으로, 그리고 과학적인 것’ ‘인간의 속물화등으로 왜곡시키고, 과학의 한계를 보완해 주어야 한다는 동기가 세 번째 착각 속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과학의 한계란 무엇인가? 그 한계란 단지 과학적 지식 체계만으로는 인간의 삶이 구성될 수도, 진행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세 번째 착각에 빠진 사람은 그 한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속물화등으로 왜곡시켜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리고 과학적인 것에 자의적으로 대비시킨 인간적인 것을 가정하고, 그러한 인간적인 것을 되살릴 특정 세계 이해 방식을 건설하는 것이 철학의 당위적 목적이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그러한 확신은 첫 번째와 두 번째 착각에서 벗어나면 또 다른 착각임을 알게 된다. 논증과 정당화를 무기로 삼는 철학은 세계 이해 방식들의 세계에서 올바른 것을 선별해내거나 건설할 수 없다. 그것도 과학적인 것의 한계를 보완해 정합적인 세계 이해 방식을 건설하는 것이라면 더욱더 그렇다. 세계 이해 방식이 인간 경험의 다 측면 중에서 일부와 맞물릴 수밖에 없다면, 그 모든 측면을 포섭하면서도 정합적 이론과 같은 세계 이해 방식을 꿈꾸는 것은 일종의 철학적 환영이다. 또한 과학의 기능 방식에서 나타나는 부정적 측면은 결코 과학적 지식 체계의 한계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다. 그 기능 방식은 반드시 전체 사회 맥락 속에서 평가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시대 및 상황에 대해서 가급적 허용되지 말아야 하는 세계 이해 방식은 분명히 있다. 더욱이 세계 이해 방식이 삶의 기반 조건들의 제한 속에서 생성되는 까닭에, 경우에 따라서는 현 상황에서 허용되지 말아야 하는 것이 득세할 수도 있다. ‘세계 이해 방식들의 세계에서 허용되지 말아야 하는 것을 어떻게 선별하고 걸러낼 수 있을까? 위 세 가지 착각에서 벗어난다면, 그렇게 선별하고 걸러내는 평가 방식은 과거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집단적 노력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이때 과학 및 철학의 역할도 재조명되어야 한다. 그렇게 재조명하는 것은 이 글의 주제가 아니다. 다만 세계 이해 방식들의 세계를 분석 대상으로 삼으려는 무종교인은 철학자들의 입장보다는 사고방식을 파악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철학자들의 입장은 역사와 무관하게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나 보편적으로 성립 가능한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 하지만 그 내면에 숨겨진 사고방식을 들여다보면, 그러한 입장 또한 특정 시대 및 장소의 어떤 세계 이해 방식에 대한 긍정적 혹은 부정적 반응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를 무시하고 어느 누가 그러한 입장의 정당화 맥락에만 매달린다면 어떻게 되는가? 한계를 갖는 여느 인간과 다를 바 없는 특정 철학자의 세계 이해 방식이 그를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철학자의 세계 이해 방식 역시 기존의 것들을 바탕으로 생성된 것임을 망각한 채 말이다. 따라서 세계 이해 방식들의 세계를 분석 대상으로 삼으려는 무종교인은 그러한 망각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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