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 에세이/Academic Info.

적자 대 서자: 변통에 대하여

착한왕 이상하 2016. 4. 30. 22:41


<적자와 서자의 구분: 변통에 대하여>


위 제목은 다음의 김형민 PD의 글을 읽고 머리속에 스쳐 지나가듯 구상된 책 제목이다.


'백정해방운동을 이끈 양반, 강상호를 기억하며'

http://www.huffingtonpost.kr/hyungmin-kim/story_b_9782642.html?utm_hp_ref=korea


아주 흥미로운 글이다. 그런데 나의 입장은 저자와 다르다. 흥미롭게 잘 쓴 글이지만, 지금 우리가 이해하는 방식의 인권 개념을 과거에 투영시켜 강상호를 '보편적 인권의 발견자'로 규정하기는 힘들다고 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보편적 인권 개념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개인들의 권리를 존중한다는 것이 반드시 그런 인권 개념에서 파생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일제 강점기 시절에도 여전히 신분제가 강하게 남아 있었다'는 사실이다. 구한말에 이르러 사방도처에서 민중봉기들이 일어 났으며, 그 중에는 신분제 붕괴 동기를 발견할 수 있는 봉기도 있었다. 일제 강점기는 이러한 사회 변화 조짐을 가로막은 사건이었다.


일제 강점기는 식민지사 논의에서도 아주 특별한 성격을 갖고 있다. 인접 국가가 문화적으로 유사성이 많이 발견되는 다른 인접 국가를 식민지화했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은 다른 서양 강대국과 달리 이 땅을 직접적 통치 대상으로 삼고 자국의 일부로 귀속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에 대해 사려 깊게 생각해 보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징병', '성노예' 문제 등을 '자발적 대 강제적' 구도 속에 몰아 넣는 논쟁의 터무니 없음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유는 생략)


현실 문제 중 하나는 과거 신분제의 요소가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이다. 요새 논쟁거리가 된 '갑을' 문제는 이를 대표한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많은 사람들은 말한다. 유교적 가치관이 문제라고 말이다. 그런데 유교가 정말 그 원인이라면, 유교적 전통이 약화되면 될수록 갑을 문제도 점점 사라질 것이다. 이러한 결론에서 생각해 볼 수 있듯이, 갑을 문제를 단순히 유교 탓으로 돌릴 수 없다. 중심과 주변 맥락으로 구성된 유교적 가치관은 생각보다 비정합적 체계이다. 이로 인해 세태 변화에 따라 변통될 가능성을 갖고 있다. (왜 그런지는 생략)


더욱이 유교가 종교적 측면에서 기능한 방식을 살펴보면, 유교적 전통의 제거는 사실상 '불가능한 것을 실현하려는 것'에 가깝다. 종교 시장(religious market)이 구축된 현실을 놓고 갑을박론이 많은데, 하나의 주류 입장은 '종교의 세속화'이다. 종교가 사회 통합의 정치적 권위를 잃어버린 대신 개인들의 삶 곳곳에 넓게 침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서술 방식은 기독교 전통에 대해서는 효과적으로 적용 가능할 지 모르지만, 유교에 대해서는 아니다.


유교도 기독교처럼 사회 통합의 원리로 기능한 종교였지만, 그 기능 방식은 기독교와 달랐다. 그 기능 방식은 교회의 연결망과 같은 제도에 근거하지 않았다. 정치적 권력과 독립된 종교적 권력으로서의 유교란 존재하지 않았다. 정치, 교육, 도덕 모두 유교의 측면들이라 할 수 있다. 조상을 모시는 사당의 제의를 담당하는 사람들도 서양의 성직자들과 같은 계층을 형성하지 않았다. 유교는 별도의 종교 기관을 두고 기능하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 집안의 가장, 고을의 지도자, 군주, 사대부 등이 유교의 성직자 역할을 한 셈이다. 유교든 기독교든 유사한 종교적 물음들을 다루고 있다. 다만 그 답하는 방식은 다르다. 또한 유교 문화권에서도 유교가 사회 통합 원리로 기능한 방식은 유사하면서도 차이를 보인다. 단순히 유교 교리 때문에 그러한 유사성이 나타난 것은 아니다. 유교에 바탕을 둔 중국의 제도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그러한 유사성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유교가 기능해왔던 방식을 고려할 때, 유교적 전통의 제거는 사실상 '불가능한 것을 실현하려는 것'에 가깝다는 입장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유 생략)


갑을 문제를 계급화된 계층 문제 맥락 속에 포섭시켜 다룰 때, 유교 전통이나 신분제 등 여러 복합적 요인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한 요인들을 결과에 대응된 단순한 원인처럼 간주해서는 안 된다. (이유 생략) 더욱이 유교 전통도 신분제 약화를 요청하는 세태에 적응해 변화하려는 조짐이 실제 이 땅에 있었다. 그렇다면 갑을 문제 등이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는 이유로 '변화의 조짐을 가로 막은 과정'을 들어야 한다. 일제 강점기, 독재 등은 그러한 과정의 일부이다. '실현될 수도 있었지만 실현되지 않은 변화의 조짐에 주목한다면, 갑을 문제는 '적자 대 서자'의 논의 속에 포섭시킬 수 있다.


제 1장. 적자 대 서자, 그리고 현실

계급, 계층, 관계, 계층 이동, 계층의 계급화 등 사회적 요인들,  자기 욕구 및 확신의 결여, 구속, 굴종, 따라하기 등 심리적 요인들에 근거해 적자와 서자를 개념적으로 구분한다. 그리고 그러한 개념으로 분석 가능한 사례들을 살펴본다. 그러한 사례는 일상생활에서 벌어지는 갑을 문제부터 정치판의 문제까지 아우른다.


제 2장. 적자 대 서자의 구분 맥락 생성과 관련된 요인들

유교적 전통, 신분제, 사대주의 등 '적자 대 서자의 구분 맥락' 생성에 관여된 요인들을 다룬다. 단, 그러한 요인들 자체가 현실의 그러한 부정적 구분 맥락, 즉 다수가 의식적으로 받아들이길 거부하는 맥락을 생성시킨 것은 아님을 분명히 한다.


제 3장. 가로막힌 변통

적자 대 서자의 구분 맥락 생성과 관련된 요인들이 세태 변화에 따라 약화되거나 수정되는 조짐들은 과거에 있었음을 분명히 한다. 그렇게 약화되거나 수정되는 과정을 변통이라 할 때, 변통의 조짐들을 가로 막은 사건들의 과정이야말로 적자와 서자를 구분하는 행위 방식이 여전히 남아 있게 된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제 4장. 변통의 분석

과거 전통을 사장시키고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대체한다는 사고방식이 갖는 문제점을 지적한다. 프랑스 혁명과 함께 등장한 그러한 사고방식은 심지어 실제 혁명의 양상마저도 왜곡시킨다. 그것은 단지 세태에 대한 특정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고안된 것일 뿐이다. 과거 전통은 때가 되면 약화되고 사라지는 것이다. 시간적 흐름 속의 대체도 알고보면 변형의 결과이다. 이러한 점을 함축한 변통 개념을 분석하고 '적극적 변통', '소극적 변통', '자연적 변통'으로 분류한다. 그러한 분류를 바탕으로 정도에서만 차이를 보이는 '자생적 변통', '내재적 변통', '외재적 변통' 등을 다룬다.


제 5장. 부정적인 것을 제거한다는 것

갑을 문제 등 적자와 서자의 구분 맥락에 포섭 가능한 것들이 현재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이유를 분명히 한다. 그러한 것들을 어떻게 제거할 것인가? 우리가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들, 실례로 행복, 정의 등에 근거한 이상적 사회상을 실천 목적으로 삼을 수 없다. 그러한 이상적 사회상은 실현될 수 없어도 실천적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다수의 철학자나 사회학자들은 주장한다. 그런데 행복이나 정의 등은 다양한 측면으로 삶 속에 나타나기 때문에, 그 누구도 포괄적인 단일 규정 방식을 제공할 수 없다. 정의 문제들을 분배적 정의 이론 하나로 거의다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마찬가지로 불행과 부당함도 다양한 측면을 갖는다. 하지만 행복 및 정의와 불행 및 부당함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불행과 부당함에 대해서는 이론적 정의 없이 그 제거 방법론만 제공해도 된다. 불행한 것과 부당한 것들의 목록만 만들 수 있으면, 그것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이의를 달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의 '부정적인 것을 제거한다는 것'은 행복이나 정의에 대한 올바른 이론의 강요 없이도 실천적 목적이 될 수 있다. 그러한 이론들은 단지 실천적 목적을 추구하는 데 도움을 주는 분석적 도구들일 뿐이기 때문에, '부정적인 것을 제거한다는 것'은 실용주의 노선과 맞다아 있으며, 인지적 측면에서 '이념 중심의 사회'보다는 '문제 공유의 사회'를 지향한다.


제 6장. 변통에 날개 달기

갑을 문제 등을 시민 의식을 강화시켜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의식 자체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갑을 문제는 직접적으로는 제도적 개선을 요구하고, 간접적으로는 교육 및 정치 판세의 개선을 요구한다. 더 심층적으로는 '사회를 국가의 위계질서와 동일시하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사람들이 국민이 아닌 소시민으로 자족하며 살 수 있는 상태'에 대한 성찰을 요구한다. 그러한 성찰 속에서 적자 대 서자의 구도를 깰 수 있는 제도 및 방법 등을 제안한다.


이것은 일정의 원고 스케치이며, 진행할 계획은 없다. 어쩌면 공저로 쓸 가능성은 있다. 핵심 주제를 놓고 토론을 거친 후 글로 완성시켜 오면, 다시 내가 손 보는 방식으로 말이다. 갑을 관계? 쓴다면, 위 서술 방식이 아니라 술자리에서 대화하는 듯한 문체를 사용할 것이다. 대신 그 만큼 누구에게나 와닿는 실제 및 가상의 사례들을 사용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생긴다. 사례 중심으로 쓰는 것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칸트, 헤겔처럼 사례 없이 거창한 논제 들이대고 정당화하는 방식의 쓰기가 좀 배웠다는 인간들에게는 제일 쉬우며, 멍청한 사람들에게는 뭔가 있어 보이게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