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 에세이/Academic Info.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

착한왕 이상하 2016. 5. 1. 21:59

유교를 경전 중심이 아니라 삶 속에 침투한 세계 이해 방식의 일종으로 간주하는 경우, 유교적 가치 체계는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으로 규정할 수 있다. 그 구분 맥락은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 '우열 구분의 관점', '엄격한 신분 구분의 관점'이다. 이에 대한 논의는 7월에 나올 <세속화 '저기'와 '여기': 무종교인의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여기서는 그 세 가지 관점의 핵심만 정리해 본다.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

인간은 천명(天命)에 따라 지()를 다스리는 존재로서 천지조화(天地調和)의 중심이다. ‘천지조화는 유교에서 궁극적 실체로 가정된 ()에 따라 기()가 활동한 결과로 나타나는 상태를 뜻한다. 모든 것은 기의 활동에 따른 전체의 분화 과정 속에서 의미를 갖기 때문에, 만물은 하나의 관계망을 형성한다. 다른 모든 것에 의존적인 인간은 천지(天地)를 매개하는 존재이다. 여기서 인간()가 반영된 본성을 지닌 도덕적 존재를 뜻한다. 인의예지(仁義禮智)란 이()가 사람에게 반영된 것이다.

 

우열 구분의 인간 관점

모든 것이 양()과 음()의 상보적 관계에 기인한 것이라고 해도, 양을 상징하는 것은 음을 상징하는 것보다 우월하다. 천지를 매개하는 도덕적 존재인 인간은 양을 상징하는 천()의 명()에 따라 음을 상징하는 지()를 다스려야 한다. 음양의 상대적 차이에 근거해 중심과 주변의 구분이 나타난다. 그러한 중심과 주변의 구분에 따른 자연의 위계질서가 반영된 사회만이 조화로운 사회이다. 그 누구보다 천명을 잘 받들 수 있는 군주가 사회의 중심이 되어야, 사회의 조화로운 상태는 유지될 수 있다. 사대부는 군주의 명을 받아 아래를 다스리는 자이다. 가족의 관계에서 남편은 천(), 그리고 부인은 지()에 비유된다. 자식은 부모를 매개하는 존재로 여겨진다.

    

엄격한 신분 구분의 관점

우주 전체에 해당하는 천(), (), ()의 관계가 반영된 사회 상태만이 조화롭다. 천명을 받드는 군주를 제외한 각 사람에게는 받들어야 하는 윗사람이 있다. 사물과 동물을 다루는 천민을 제외한 각 사람에게는 다스려야 하는 아랫사람이 있다. 이 때문에, 각 사람이 속한 신분이 있다. 사람이 각자가 속한 신분에 따라 행동할 때, 위아래의 관계는 군주를 중심으로 조화로운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엄격한 신분 구분에 따른 위계질서는 자연스러운 것이며, ()은 각 신분에 요구되는 도리를 자발적으로 행하려는 심성과 다르지 않다.

 

내용적 분리 가능성에 초점을 맞춘 비정합성 개념에 따르면,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은 내용적으로 정합적 체계를 이루지 않는다, 이 점이 왜 흥미로은 것일까? 세태 변화에 따라 유교적 가치 체계가 변통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내용적 비정합성 및 그러한 변통 가능성을 여기서 다루지 않는다. 각자 생각해 볼 거리로 남긴다. 다만, 유교적 가치 체계를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학으로 해석하는 경우, 그 맥락의 내용적 비정합성으로 인해 유교의 도덕적 측면과 다른 측면은 긴장 관계를 맺게 된다. 왜 그런지 대충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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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의 현대적 연구 결과에 따르면, 유교적 가치 체계는 크게 도덕적 측면과 사회정치적 측면을 갖는다. 도덕적 측면에서의 담론은 인의예지가 완전히 구현된 인간, 즉 성인을 표본으로 진행된다. 성인을 표본으로 삼는다는 것은 단순히 성인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합당한 격식을 갖춘 행위를 통해 누구나 유교가 지향하는 인간다움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정치적 측면에서의 담론은 군주의 권력을 정당화하면서도 조화로운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마련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유교적 가치 체계의 도덕적 측면은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 그리고 사회정치적 측면은 우열 구분의 관점엄격한 신분 구분의 관점에 대응한다. 유교적 가치체계의 도덕적 측면은 유교의 내적 측면으로, 그 사회정치적 측면은 유교의 외적 측면으로 불리기도 하는 데, 여기에는 관계 중심의 인간 관점을 유교의 핵심으로 간주하는 입장이 반영되어 있다.

 

유교적 가치 체계의 도덕적 측면은 신분과 무관하게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것이다. 인의예지가 완전히 구현된 성인을 따르는 것에는 군주와 백성의 구분이 없다. 이 때문에, 유교적 가치 체계의 도덕적 측면과 사회정치적 측면은 긴장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 예는 그러한 긴장 관계를 해소시키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도덕적 측면과 관련해 '예를 다한다는 것'은 인간을 천지조화의 중심으로 파악하도록 해준다는 점에서 신성적 측면을 갖는다. 또한 유교가 지향하는 인간다움을 사회에 투영시켜 사회를 평가하도록 해 준다. 이러한 점에서 예는 개인에게 사회 개선을 요구한다. 하지만 사회정치적 측면과 관련해 실제적 예는 개인에게 기존 질서에 수긍할 것을 요구한다. 결국 유교적 가치 체계의 도덕적 측면과 사회정치적 측면은 긴장 관계는 예를 통해 현실 개선적 측면과 현실 수긍적 측면의 긴장 관계로 전이될 가능성을 갖고 있다. 유교적 가치 체계 및 가치 체계의 기능 방식에 잠재된 긴장 관계는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에 근거해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유교가 변화해 온 과정 자체를 그러한 긴장 관계에 대한 시기별 지적 반응으로 보는 것은 유교의 현대적 연구 결과이다. 따라서 유교적 가치 체계를 중심과 주변의 구분 맥락 속에서 파악해 보는 것은 굳이 공자(孔子), 주자(朱熹), 왕양명(王陽明), 웅십력(熊十力) 등을 논하지 않고서도 그러한 긴장 관계를 드러내 주는 작업이다.

 

위에서 언급한 '긴장 관계'를 잘 보여 주는 책은 많다. 다음의 핑가레트 책은 그런 긴장 관계를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예를 일상생활과 관련지어 다루는 방식 속에서 그러한 긴장 관계를 오히려 더 생생하게 느껴볼 수 있다. 

 

Fingarette, H.(1972), Confucius: The Secura as Sacred, Harper & Low (이 책은 <공자 철학>으로 1993년 우리말로 번역되어 나왔음)

 

핑가레트는 실존 철학 쪽에서 많이 활동한 사람이다. 중국철학 전공자는 아니다. 하지만 유교의 누구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 기능한 유교적 가치 체계' 혹은 '유교적 사고방식'을 이해하는 데 핑가레트의 책만큼 좋은 책도 없다.

 

핑가레트의 또 다른 책 <Heavy Drinking: The Myth of Alcoholism as a Disease>은 제목만으로도 흥미를 끈다. 폭주를 무조건 질병시 취급할 수 없다는 내용인데, 아마도 이본주의적 심리학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아무튼 읽어 보지는 않았지만, 사례 중심의 철학서라 번역되어 나왔으면 한다. 구체적 사례 없이 거창한 체계성을 강조하거나, 특정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입맛 대로 이 사례 저 사례를 수단으로 삼는 글 쓰기 방식, 즉 여전히 대다수 철학자들의 글 쓰기 방식은 이제는 좀 벗어나야 할 때가 되었다.

 

Fingarette, H.(1989), Heavy Drinking: The Myth of Alcoholism as a Disease, University of California. (서지 정보-> http://www.amazon.com/Heavy-Drinking-Myth-Alcoholism-Disease/dp/0520067541)